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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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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형곡동 시무실>
경북도의회 전찬걸의원이 8일 열린 경북도의회 본회의 5분발언을 통해 한국 전쟁 전후 도내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위령탑을 건립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 국가적 차원의 책임있는 조치와 특별법이 제정되도록 도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정부에 건의하고, 무엇보다도 희생된 분들의 명예회복과 다양한 추모 사업들을 추진해야 한다고 거듭 촉구했다.
한국 전쟁 당시 미군폭격기가 형곡동인 시무실을 맹폭해 수백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 미제로 남아 있는 구미로서도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이다.
도의회 차원에서 한국 전쟁 전후 도내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추모사업을 요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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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찬걸 의원 |
전의원에 따르면 경상북도는 항일 독립운동의 발상지이면서 나라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때 지정학적 위치에서 나라를 구하는데 큰 역할을 해 왔다. 하지만 한국전쟁 전. 후에 공권력에 의해 민간인이 희생된 일련의 사건들은 반만년의 민족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민간학살은 1950년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시작돼 전쟁이 끝난 1953년 이후까지 계속됐다. 이 기간 동안 자행된 민간인 학살은 전국적으로 이뤄 졌고, 경북도 여러 지역에서도 동시에 이뤄졌다.
알려진 사건만해도 구미시 형곡동 시무실 미군 폭격기 맹폭사건을 비롯 부역혐의 사건, 보도연맹사건 등이 있다. “부역혐의 희생사건”은 인민군 점령시기에 군.경이 부역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민간인들을 집단 살해한 사건이며, “국민보도연맹사건”은 1950년 당시 도내 지역에 주둔, 활동했던 군.경이 좌익 활동과 무관한 비무장의 민간인들을 국민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집단 살해한 사건으로서 대표적인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이다.
전찬걸의원이 밝힌 도내 민간인 학살 희생현자 수는 총 3천475명으로 이중 부역혐의 279명, 보도연맹사건 1천470명, 미군폭격 299명, 기타 1천427명에 이르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다 미제로 남아있는 사건까지 포함하면 억울한 희생을 당한 민간인 수는 상당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현재까지 도내 민간인학살과 관련 진실규명을 신청한 39건 중 36건이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실로 규명, 결정이 내려져 희생자와 유가족의 참혹했던 아픔을 헤아리고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이와 관련 전의원은 단순히 진실규명에 그칠 것이 아니라 희생자들의 명예가 회복되고, 유가족 및 지역주민들이 그동안 억울한 희생에 대해 최소한 위로받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국가와 도차원에서 제도적. 정책적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전의원은 또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의 공식사과와 위령사업의 지원 및 가족관계등록부 등 관련기록을 정정할 것,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의 역사를 바르게 기술하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평화인권교육을 실시할 것”을 국가에 권고했다면서 국가적 차원의 책임있는 조치와 특별법이 제정되도록 도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정부에 건의할 것을 촉구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이미 반세기를 넘어 61년의 세월이 흘러가고 있다. . 과거 암울했던 역사의 진실을 규명해 인권과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규명된 진실의 토대 위에서 희생된 이들을 추모. 위로해야만 화해와 화합을 이뤄낼수 있다는 것이 전의원의 주장이다.
<구미 형곡동 시무실 미군 폭격기 사건>
구미에도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폭격기 맹폭 사건으로 후유증에 시달리는 이들이 있다.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발생한 양민학살 사건과 미군 오폭 사건등 있어서는 안 될 이 불행한 일이 구미지역에서도 발생했기 때문이다.
1950년 8월 16일( 음력 7월 2일) 오전 10시경, 기체 불명의 폭격기 몇 개 편대가 수 시간 동안 지금의 형곡동인 시무실을 맹폭하면서 마을은 삽시간에 비극의 먹구름으로 뒤덮혔고,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설상가상, 폭격이 끝나자마자 다시 제트기 몇 대 편대가 마을을 향해 기관포 사격을 가해왔다. 이 와중에 죄 없는 이들은 소중한 생명을 뺏겨야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61년이 지난 지금도 지천에 떠돌고 있을 원혼과 악몽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한은 응어리진 채 남아 있다.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는 이규원 전 구미시의회 의원은 지난 해 경북문화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분노와 서러움을 쏟아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수차례에 걸쳐 조사를 했습니다. 폭격으로 피해를 입은 분들과 당시 상황을 목격한 분들의 녹취까지 하는 등 조사를 마쳤으나, 돌아온 것은 허망한 메아리 뿐입니다."
<그래도 희망은 있었는데>
지난 2009년 4월 6일 구미시 형곡동 이규원 전 시의원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진실 화해위)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았다. 4월 7일부터 8일까지 시무실(형곡)미군 폭격기 오폭사건을 현장조사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2007년 1월 30일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로 부터 조사개시를 결정받은 지 2년 3개월만의 일이었다.
‘사건명 = 미군관련 희생사건, 결정이유 = 신청사건 다-9042 미군 관련 희생사건은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 제2조 제1항 제3호의 진실규명범위에 해당하여 조사개시를 결정함’
진실화해위는 전화를 통해 약속했던대로 김 모 조사관을 파견한 가운데 2009년 4월7일부터 8일까지 형곡지구, 인동 유학산 지구, 고아지구에 대한 현장조사를 실시했다.
시무실(지금의 형곡동) 미군 오폭사건에 대한 현장 조사에 나선 형곡지구 대상자는 생존자와 피해자 가족 등 35명이었다. 더 많은 피해자가 있지만, 당시 상황을 목격한 주민이나 피해자 가족들이 전국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기 때문에 현장조사 대상자는 미군 폭격기의 오폭으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130여명에 비해서는 턱없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조사기간 동안 피해자나 그 가족, 현장을 목격했던 주민들은 기억하기 조차 싫은 미군 폭격기 오폭 당시로 되돌아가야 했고, 그 악몽의 세월 속에서 그들은 다시 깊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당시 김 모 조사관은 전국에 흩어져 있는 관련자들에 대한 추가 조사를 약속하고 돌아갔다. 조사관은 특히 미군 폭격기의 오폭에 따른 피해와 관련 " 다른 지자체에서는 위령탑 건립 등 피해자들의 원혼을 달래는 노력이 있지만, 구미에는 그 마저도 없는 것 같아 애석하다"는 말을 남겼다.
진실화해위가 가동된 후 전쟁과정에서 억울하게 생명을 잃은 피해 주민들에 대해 정부는 1천340억원의 피해 보상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형곡지구 역시 국회에서 입법발의 중이고, 법안이 의결되면 보상에 착수할 것으로 기대를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는 형곡지역 피해자 가족과 피해 당사자는 기가 막힐 수 밖에 없다. 불구의 몸으로 비극의 인생을 살아온 생존자는 대부분 80대, 언제 세상을 떠날지도 모르는 이들은 ' 언제 국회가 입법을 하겠느냐, 살아생전 보상금을 손에 쥘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2010년에는 더 기막힌 일이 발생했다. 2009년 형곡지구를 조사한 김 모 조사관이 타 부서로 옮긴 후 업무를 이관 받은 다른 조사관이 이규원 전 시의원에게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1차 조사자를 대상으로 다시 2차 조사를 해야 하겠다"는 조사관의 전화를 받은 이 전의원은 기가 막혔다. 불과 1년 전 조사한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기억하기 조차 싫은 당시 상황을 다시 녹취하겠다는 조사관의 주문에 대해 이 전 의원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진실화해위는 당초 2010년 4월말에 간판을 내릴 계획이었으나, 2개월을 연장해 6월말 업무를 끝냈다..
<미군 폭격기 시무실 오폭 사건>
그렇다면 1950년 시무실( 지금의 형곡동)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50년 6.25발발 당시 시무실로 불리던 지금의 형곡 주민들은 농사만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순박한 이들이었다.
이들에게 비극의 기운이 밀려온 것은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였다. 그해 여름,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인 지정학적인 특수성 때문에 이곳에는 수천 명의 피난민들이 만호처럼 몰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순박한 마을 주민들은 전쟁을 피해 이곳으로 온 피난민들과 함께 포성 속에서 숨죽이며 전쟁이 끝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허망한 기대였다. 1950년 8월 16일( 음력 7월 2일) 오전 10시경, 기체 불명의 폭격기 몇 개 편대가 수 시간 동안 시무실을 맹폭하면서 마을은 삽시간에 비극의 먹구름으로 뒤덮혔고,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설상가상, 폭격이 끝나자마자 다시 제트기 몇 대 편대가 마을을 향해 기관포 사격을 가해왔다.
이 난리통에 1백 3십명을 훨씬 웃도는 주민과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피난민들이 집단 떼죽음을 당해야 했다.당시 목격자들에 따르면 한 집안이 몰살된 경우가 많았으며, 마을과 인근 산야가 벌집 쑤셔놓은 것처럼 참담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피폭자들은 무장한 군인이 아니라 순수 민간인들이었다는 것.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당시 동사무소에 공식 신고된 형곡동(당시 시무실)의 사망 주민은 130여명, 전쟁 중이어서 급박한 정황 때문에 미처 신고하지 못한 사람까지 포함하면 수백 명에 이를 것으로 당시를 목격한 이들은 예상하고 있다.
특히 타 지역에서 이 마을로 피신한 이들 중 사망한 사람은 통계에 포함되지조차 않았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면, 그 피해자는 엄청날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비극을 밝혀내기 위한 노력>
지울 수 없는 악몽 속에서 살아온 생존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참극이 발생하고 40년이 지난 1992년 이종록(발기인 대표)옹을 중심으로 ‘위령탑 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미국의 미자도 꺼내지 말라’는 국방부로부터의 회신을 받고 이들은 좌절해야 했다.이어 2005년에는 구미시에 의견서를 제출하고, 진정서를 냈으나 시정에 반영되지 않았다.
결국 1년 후인 2006년 11월 28일 이규원 전 구미시의회 의원은 진정서 마감시한을 이틀 앞두고 부랴부랴 진정서를 작성하고, 과거사 정리 기본법에 따라 과거사위에 자료를 제출했다. 이로부터 2개월 후인 2007년 1월 위령탑 건립 추진위는 오매불망 그리던 ‘결정통지서’를 손에 쥘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조사개시 결정 통지서를 받을 당시 이종록 발기인 대표는 “내 나이 30세의 꽃다운 청춘에 일어난 역사의 비극을 지금이나마 국가가 결정, 현장을 조사하겠다니, 다행스러운 생각에 가슴이 미어진다”며 “83세의 나이에 이제는 여한도, 미련도 없다. 구미의 역사적 사건들이 면밀하게 조사되고 잘 기록되어 보존되기를 간절하게 바랄뿐”이라며 눈시울을 붉혀 세상을 숙연하게 했다.
그리고 현장조사에 착수한 것은 조사개시 결정 통지문을 받은지 2년 3개월 후인 2009년 4월 7일이었다. 그러나 현장조사를 했지만, 이를 뒷받침할 법안이 발의, 의결되고, 보상에 따른 재조사에 착수하려면 그 끝점이 언제일런지는 예상하기 조차 불투명한 것이 사실이다.
“지금도 파편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시는 중환자 분은 물론 심지어 폭격으로 다리가 절단된채 눈물로 살아가는 분도 생존해 계십니다.”
시무실(荊谷), 사창(司倉), 수락 (水洛) 등으로 불리웠던, 1950년 금오산 기슭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던 형곡, 당시만 해도 시무실로 불리던 이곳에 미군 폭격기의 무차별 맹폭으로 이곳에 살던 주민 일백 3십명과 수를 헤아릴수 없는 피난민들이 쓰러져 간 것은 다시는 있어서는 안될 비극이다.
이 때문에 생존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들은 " 비명에 가신 원혼을 달래고,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역사적인 교훈으로 삼기위해서라도 구미시가 위령탑을 세우는 정도의 가장 기본적인 노력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울먹였다.
이 규원 전 시의원은 또 " 지난 1992년 위령탑 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한 후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도 결국 아픈 가슴만 더 아프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경홍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