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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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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맞서 전국적으로 삼일만세 운동이 들불처럼 번진 가운데 경북도내 20개 시군은 3월 8일부터 4월 28일까지 50여일간 일본의 압제에 맞서 싸웠다.
도내에서 처음으로 만세운동을 한 곳은 대구였다. 이곳에서는 8일 고등보통학교 학생, 기독교도, 천도교도 등 약 8백여 명이 연합, 시위운동을 전개했다.9일에는 각급 학교 학생 약 4천5백여 명이 시가에 몰려나와 만세를 불렀다.
3월 11일에는 영일, 의성, 김천,12일에는 인동, 13일에는 경주, 칠곡 ,16일에는 안동, 18일에는 영덕, 봉화, 23일에는 상주, 24일에는 영양, 청송, 26일에는 영천, 4월 2일에는 성주, 3일에는 예천과 선산, 4일에는 영주, 12일에는 청도, 15일에는 문경, 28일에는 달성군이 운동에 가담하면서 삼일운동은 들불처럼 번졌다.
경북의 삼일만세운동은 3월 20일을 전후 약 10일간 절정을 이뤘다. 4월 12일 이후에는 실질적으로 끝난 상태였다.
운동의 주체는 기독교도, 천도교도, 각급 학교 학생 및 농민이었다. 산에 올라가 봉화를 울리는 소극적인 운동은 볼 수 없었다. 직집 시위운동을 전개한 것은 경상도의 화끈한 기질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20개 군의 운동 중에서 규모나 내용으로 보아 13개소에서 만세운동을 벌인 안동이 대표적이었다.예안면에서는 3월 17일 장날을 기해 1천5백여 명이 모여 만세 시위를 전개할 정도였다. 14명이 피살되고, 10명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영덕군 영해 장터에서도 기독교도와 주민 등 2천여 명이 모여 집집마다 태극기를 걸도록 했다. 정오경 독립연설회를 개최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른 뒤 시위운동에 들어갔다.경찰 주재소를 습격, 파괴하기도 했다. 주동자 60여명이 검거돼 고초를 겪기도 했다.
경북의 총 시위지역은 60여개 소에 연인원이 3만명에 달했다. 이중 26개소에서 일제와 충돌했다. 일병의 출동지역은 20개소, 발포지역은 9개소였다,경찰관서 12개소, 면사무소 3, 우편소 1, 기타 1개소 등 18개소가 파괴되었다.이 와중에서 20명이 피살되고, 70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7백여 명이 검거됐다.
구미지역의 대표적인 3.1운동 애국지사는 옥계동 문림리 출생인 장진홍(1985년- 1930년) 의사였다. 대구 조선 은행에 투탄을 하는 등 3.1독립운동을 주도했다. 1962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장의사는 1914년 3월 조선 보병대에 입대, 1916년 제대 후 곧바로 조국 고아복 투쟁에 나설 것을 결심하고, 당시 비밀 독립운동단체였던 광복단에 가입했다.1918년 7월에는 광복단 동지인 이내성의 소개로 만주 봉천성에서 김정묵과 이국필을 만나 독립운동방향에 대해 논의했다.
이후 러시아 영토인 하바로프스크로 가서 교포 청년 80여명을 모집, 군사교육을 실시했다.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아 3.1운동이 발발했다. 부친의 논을 팔아 자금을 마련하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했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만행을 인천항에 들어온 미국군함 승무원에 의뢰, 세계 각국에 배부할 것을 의뢰했다.1926년 이내성을 만나 독립운동의 전개방법을 논의했고, 1827년 만주에서 몰래 들여온 다이나마이트 뇌관과 도화선, 50원의 자금을 받고 폭탄제조법을 배웠다.
1927년 8월 폭탄 2개를 시험용으로 제작, 칠곡과 선산 경계에 있는 봉화산에서 성능실험을 하고 1927년 10월 거사용 폭탄 4개와 자살용 폭탄1개를 제조, 경북도청, 경북경찰부, 조선은행 대구지점, 신산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하려고 했다.
1927년 10월 18일 오전 9시경 대구 덕흥여관에서 폭탄에 점화 후 포장을 해 여관 종업원인 박노선에게 목표지점 4개 처에 송달을 부탁했다.
같은 날 오전 11시 50분경 폭발, 은행원과 일제 경찰 등 5명이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며, 은행창문 70여 짝이 부서졌다.
장 의사는 이후 선산군 해평면으로 피신하여 안동과 영천에서 재차 거사를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29년 2월 13일 체포된 그는 조선인 경관들에게 “조선민족의 피를 받은 자로서 일제 경찰의 주구가 되어 동족의 해방운동을 이다지도 방해하는 악질 조선인 경관의 죄상이야말로 나의 죽은 혼이라도 용서할 수 없다”고 부르짖었다.
이후 반년 만에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고, 결국 사형이 확정되었다. 1930년 그는 11시경 자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