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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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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사회나 조직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다. 수많은 인재들이 머리를 맞대 정책을 결정하고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쓰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능력 있는 인재를 발탁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적재적소에 꼭 필요한 사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조직의 흥망성쇠가 결정된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철칙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조직이든 학벌 좋고 똑똑한 사람만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스팩은 좀 부족할지라도 사람은 저마다 자신만의 남다른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누구든지 간에 필요로 하는 곳은 있기 마련이다.
인재발굴에 앞서 치밀하기로 정평이 나있는 청나라 시절의 용인(用人)의 귀재, 강희 황제는
“인재는 강점을 보고 쓰는 것이지 약점을 보고 주저해서는 안 된다.”라고 설파 했다. 인재를 어떻게 모으느냐가 군주의 자기생존 방식이다 된다.
“창고를 채우는 일에 관심 갖지 말고 인재 축적하는 일에 힘을 쏟아라!”고 했다. 인재 경영을 잘하면 지금 가지고 있는 곳간에 쌓아놓은 것의 백배 천배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쓰는 것을 보면 그 지도자의 능력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출신지역에 따라 인재를 가려 쓰거나 혹은 학교 선후배의 정에 끌려 쓰다보면 인재 발탁의 폭은 더욱 좁아 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적 인연으로 얽힌 조직을 놓고 역량 발휘를 기대하기란 쉽지가 않다.
중국 진(秦)나라의 열린 인사 정책의 사례는 인재등용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의미 깊게 타일러 주고 있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데 최대의 공을 쌓은 이는 바로 이사(李斯)였다. 하지만 진나라를 망하게 하는데 가장 큰 원인이 된 이도 이사였다.
중국 초나라 사람으로 한비자(韓非子)와 함께 순자(荀子)에게 학문을 배운 대학자이며 정치가였던 이사는 진나라의 최대 실력자인 여불위 의 식객으로 있으면서 재능을 인정받아 왕의 시종으로 천거돼 결국 승상의 지위까지 올라갔다.
이 무렵 정국(鄭國)이라는 한(韓)나라 사람이 진나라로 와서 진왕에게 병력과 물류의 이동을 원활히 하기위해 운하를 건설할 것을 제의했다. 진나라 왕은 쾌히 이를 승낙했고, 곧이어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정국이 제의한 관개용수로 공사의 이면에는 그만한 저의(底意)가 깔려 있었다. 운하 공사에 대규모 인력과 비용을 소모시키면 국력을 약해 질 터이고, 힘이 약해진 진나라는 다른 나라를 침략할 힘을 상실 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진나라 왕은 국내에서 벼슬을 하는 타국 출신 모두를 첩자로 몰아 부친 후 추방을 하려고 했다. 물론 초나라 출신 이사도 추방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그러자 추방을 모면하기 위해 “간축객사(諫逐客辭)”라는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당시 이사가 상소한 상소문의 일부가 눈길을 끈다.
“높은 태산이긴 하지만 한 줌의 흙마저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저런 높이를 보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큰 강이나 바다는 아무리 작은 시냇물일지언정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만한 수량을 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나라에 와서 벼슬을 하는 타국인들을 추방하는 것은 도적에게 군사를 빌려주고 도둑에게 식량을 보내는 것과 같다.”
진나라를 위해 몰려든 인재를 추방하지 말라는 내용의 상소문을 읽고 감명을 받은 진나라 왕은 타국에서 온 빈객을 내쫒으라는 명령을 거두어 들였다.
강대해 지기 이전의 진나라는 중국 서북쪽 변방에 위치한 아주 작고 궁벽한 나라였다. 중원의 나라들이 오랑캐 나라로 깔보았을 정도 이였으니 말이다.
이처럼 미약한 진나라가 전국시대 말기에 이르러 강대국으로 군립 할 수 있었던 것은 개방적인 인재 등용에 있었다. 출신 성분을 가리지 않고 훌륭한 인재를 받아들여 중용한 열린 인사 정책을 펼치자, 전국의 재사(才士)들이 진나라로 몰려들었고 결국 천하를 통일하는 바탕이 되었다.
삼성과 LG를 비롯한 대기업에서는 디자인이나 홍보. 영업 분야 등 특정한 분야를 보강하기 위해 외국인의 영입을 주저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우수 인재에 대한 욕심은 오늘날 세계 1등 기업으로 우뚝 서게 하는 원천이 되기도 했다. 기업 뿐 만아니라 스포츠에서도 우수한 선수와 지도자 발탁은 일반화 되어있다.
잠시 진나라의 운하건설에 얽힌 역사 속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하자, 2100년 전 정국의 운하 건설 계획은 지금도 그 유용성을 놓고 논쟁을 벌이지만 그 당시는 상당히 파격적인 발상 이었다. 그 때는 모든 물류 이동이 육로였기 때문에 수로를 이용한 운하 계획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비록 운하건설이 진나라 국력을 바닥내기 위한 책략이었지만 운하의 이로움을 인정한 진왕은 정국을 사면하고 10년 동안 운하 건설에 전력한 나머지 대역사를 완성하기에 이르게 된다.
이 당시 완성된 운하는 서쪽의 경수(涇水)에서 동쪽의 낙수(洛水)에 이르는 300리 가 되었고, 그 이름을“정국 거(鄭國渠)”라 칭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진나라를 위해 찾아온 인재를 내치지 말라고 상소 했던 이사였지만, 자신과 동문수학 했던 당대 최대의 책사 한비자(韓非子)가 진나라에 오자, 자신의 지위가 흔들릴 것을 우려한 이사는 한비자를 간첩으로 몰아 죽였고, 제자백가의 서적과 유생들을 생매장 시킨 “분서갱유(焚書坑儒)”에 앞 장 서기까지 했다.
더군다나 진나라 승상으로 더 올라갈 곳이 없던 이사는 진시황이 순행 중 마차 안에서 갑자기 죽자, 환관 ‘조고’와 짜고 황제를 바꿔치기 하여 권세를 이어가고자 했다. 하지만 결국 이사는 조고에 꾐에 빠져 후손들과 함께 사지가 찢어지는 거열형을 당하면서 멸문 했다.
참으로 바쁘게 사시는 분이네요. 늘 칼럼을 읽다보면 얻는게 많은데 언제 공부하시고, 현장 나가시고, 술마시고 하시는지, 참으로 바쁜 삶이시네요, 존경하오
03/10 15:54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