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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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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영국의 역대 왕 중 대영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 이어 영국인들로부터 신뢰와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재임 60년을 맞는 여왕의 존재가 영국인들의 자존심일 정도이니 말이다.
우리에게도 여인천하의 바람이 불고 있다. 최근 들어 통합민주당의 대표로 선출된 한명숙 전 총리는 박근혜 새 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과 함께 한국 정당사를 새롭게 쓰고 있다. 일찍이 박순천 여사가 야당 당수로 선출된 적은 있지만 여성이 여야 대표를 모두 관장하는 역사는 없었다. 한국 역사상 최초로 개막된 여인천하시대, 향후 전개될 상황이 여간 궁금하기 짝이 없다.
역사를 거슬러 가면 우리 민족을 지킨 특출한 여성으로는 선덕여왕을 비롯한 신라의 여왕과 왕후 들 그리고 유관순을 비롯한 훌륭한 여성들이 있었다. 하지만 역사상 가장 존경을 받는 여성이 있었으니, 그분이 바로 신사임당(申師任堂)이다.
우리나라 조선조 최고의 현모양처 상으로 손꼽히는 신사임당 의 본명은 신인선(申仁善 1504-1551)이며, 사임당은 당호이다. 조선 중기 대학자이며 경세가인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은 당시 시대가 요구하는 유교적인 여성상과 생활을 개척한 여성이었다. 교양과 학문을 바탕으로 시. 서. 화에 특출한 재능을 가져 많은 사람들을 놀라 게 했던 그 분의 “초충도”는 매우 유명 했다.
신사임당을 더욱 유명하게 한 것은 율곡을 비롯한 4남 3여를 훌륭히 키워냈기 때문이었다. 부덕과 재능을 갖추고 남다른 교육열로 율곡에게 직접 글을 가르쳤던 신사임당은 율곡 에게는 자애로운 어머니이면서 엄격한 스승이기도 했다.
율곡 이이가 누구였던가, 그는 13세에 진사시에 급제한 후 9번이나 장원급제를 누리는 수재였다. 16세에 어머니를 여윈 후 잠시 방황한 나머지 금강산에 있는 불가에 몸을 담기도 했지만 이 후 공부에 매진해 “주기설”을 주장한 그는 조선조 퇴계 이황과 더불어 문묘에 배향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의 학문만큼 경세에도 탁월한 식견을 가져 “성학집요(聖學輯要)”저서를 냈고, “10만 양병 설”을 주장하는 등 시대를 앞서가는 정치가로서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신사임당이 조선 시대 부덕의 상징으로 존경받게 된 것은 사후 100년 뒤 송시열이 “천지의 기운이 응축된 힘으로 율곡을 낳았다.”라며 사임당의 작품을 극찬하면서였다.
오늘날 통용되는 5천원과 5만 원 권 지폐에 모자가 나란히 얼굴을 올리는 영광을 누리는 것 은 그 어디 가문에도 없을 것이다.
만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여성들 뒤에는 조용히 그들을 뒷바라지하는 남편들이 있다. 우리들은 그들의 외조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부군은 필립 마운트 베트(Philip mount batter)이다. 그리스 왕족 출신으로 “에딘버러 公” 작위를 받았다.
올해 91세로 여왕의 부군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비록 여왕의 남편이지만 왕위계승권도 없고 또한 신하의 신분이기에 늘 여왕의 한 발 뒤에서 묵묵히 외조를 해왔다. 그런 그를 영 국민 들은 매우 존경하고 있다.
한명숙 대표 남편은 성공회대 NGO 대학원 객원교수 박성준씨 이다. 결혼하던 해 통일 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13년의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아름다운가게 공동대표 등 시민단체 활동을 하면서 평택 미군기지 반대 운동에 앞 장 서기도 했다. “친북좌파”로 불리기도 하는 등 논란이 있지만 한 대표의 사상적 동지로 외조를 하고 있다.
신사임당은 19세에 덕수 이 씨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했다. 결혼하자마자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사임당은 3년 상을 친정에서 치뤘다. 그 이후 시집의 선조 때부터 터전인 파주의 율곡 리 에 거주하다가 38세에 시집 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서울의 수진방(壽進坊)으로 옮겼다.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를 한 후 이해 여름 남편이 수운판관(水運判官)이 되어 아들과 함께 평안도 지방 순시 중병으로 사망했다.
사임당이 당시 유교적 분위기 속에서 여성으로서 시. 서. 화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덕수 이 씨 시집의 분위기도 한 몫 했다. 그는 시집을 온 이래 20년간을 강릉에 있는 오죽헌 친정에 머 물렀다.
조선시대 여자가 출가를 하면 오직 시집만을 위하도록 요구한 유교적인 규범에 의해 완고하고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유교사회의 전형적인 남성우위의 허세를 부리는 남편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남편 이원수는 오히려 아내의 자질을 인정해 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우 리 는 도량 넓은 사나이였다. 신사임당의 명성은 유연한 사고를 지닌 남편의 배려에 힘입었다고 볼 수 있다.
어느 시대이건 간에 훌륭한 여성들 뒤에는 묵묵히 외조 하는 남편들의 응원이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늘 그늘에서 조용히 뒷바라지 한 공통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