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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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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정당정치 최종 목표는 정권을 잡는 것이다. 정권을 잡아 책임정치를 하고, 국민의 심판을 받는 것이다. 보수와 진보와 같은 이념을 중심으로 모인 정당은 서로 갈등하고 반목하기도 하지만 선의의 경쟁을 통해 발전적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총선이 예고편이라면 대선은 완결편이다. 정당 간 집권을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정당의 원조로 조선시대 붕당(朋黨)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붕당을 조선을 망하게 하는 원인으로 호도한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 되기도 했지만 그 출발은 작은 일로부터였다. 선조 7년(1574) 이조전랑 오건이 자리를 옮기면서 후임으로 김효원을 추천하였다. 이때 정3품이며 인순왕후의 동생이기도 한 이조참의 심의겸이 반대를 했다.
이조 전랑의 자리는 정5품의 위치에 있지만 당시 문무 내 외관을 천거. 전형을 하는 임무를 가지며 조정에서 문무 내 외관을 임명 시 이조전랑의 동의를 필요로 하는 등 그 권한이 막강했다. 요즘으로 치면 중앙부처 인사담당 사무관 정도에 해당한다. 전랑에 오른 김효원이 다른 자리로 가게 되자 심의겸은 은근히 자신의 동생인 심충겸을 추천을 하였으나 김효원은 외척은 배제해야 한다며 다른 사람을 지목했다.
이 일로 두 사람이 좋지 않은 감정이 생기면서 대립하게 되었다. 김효원은 현재 충무로 부근의 건천 동에 살았기 때문에 이를 지지하는 무리를 동인이라 하였고, 심의겸은 정릉에 살았기에 서인이라 불렀다. 동인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제자가 많았으므로 명분과 절의를 중시하는 학연 적 성격이 짙었다. 서인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흔의 제자가 중심을 이룬 노련하고 원숙한 정치인이 주류를 이루었다. 동인은 그 후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졌다. 서인은 인조반정을 기점으로 공을 세워 득세를 하다가 숙종 때 송시열의 중심의 노론과 남구만 중심의 소론으로 갈라서게 된다. 이 후 조선은 노론 천국이 된다.
사림정치의 부산물인 당쟁은 혈연과 지연 그리고 학연을 중심으로 존재했다. 유교적인 전통이 강했던 조선 사회 특성상 혈연에 따른 분파는 불가피 했던 것이다. 초기의 당파는 정책과 이념을 중심으로 시비를 가리는 긍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숙종 이후 노론이 집권하면서 이기적인 정치 집단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상대 세력을 무조건 척결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수많은 사화가 발생하는 비극을 잉태했으며 결국 당파는 정치적 몰락의 길로 갔고 급기야 망국의 원인이 되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역사를 보면 1623년에 서인의 주도로 일으킨 인조반정은 당쟁사의 큰 획을 긋는 사건이다. 반정의 중심인물들은 당시 국제 정세 흐름을 망각한 체 숭명(崇明)주의로 회귀했다. 당시 신흥국 청나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자 병자년에 청나라의 침입으로 삼전도의 치욕을 부른다.
그리고 여러 사상 중 하나인 주자학을 유일사상으로 만들면서 정작 명나라에서 유행했던 양명학은 이단으로 몰아 버렸다. 또한 신분제를 더욱 강화시키면서, 수많은 천주교 교도들을 도살했다. 왕권을 약화시켜 노론 집단의 기득권 유지의 도구로 이용한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후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역사학자 이덕일의 저서에 따르면 대한제국 멸망에 노론은 집단적으로 매국에 나섰다고 주장했다. 1910년 8월22일 한일합방이 이루어지면서 조선총독부는 매국 친일파들에게 공. 후. 백. 자. 남작의 작위를 수여하고 은사금을 지급했다. 이 명단에 따르면 76명의 수작 자를 분석하면 후작 직을 받은 7명 중 대원군의 조카 이재완을 비롯한 왕실인사가 3명이고, 순종 비 윤씨의 친정아버지인 윤택영, 철종의 사위인 박영효 그리고 노론의 영수 이완용이다. 당파를 알 수 있는 64명 중 북인이 2명, 소론이 6명, 나머지 56명이 노론이다. 대한제국이 망한 원인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대체로 일제의 군사적 위협과 세계정세를 읽지 못한 집권층의 무능 그리고 집권 노론의 매국 당론이 더해 멸망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다.
매국에 앞장 선 대부분 노론일색인 권력자들은 일본 강점기에도 노론 이데올로기와 식민주의 학문 체계가 그대로 이어졌고 해방 이 된 후에도 한 번도 해체과정을 밟지 않고 학문 권력을 쥐고 있다. 그 들의 제자들이 대한민국 학계의 주류를 이루며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만 급급해 했지 일제의 잔재를 터는 것에는 소극적이었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 후 조선의 정체성을 허물기 위해 조선어와 조선사를 말살하는 정책을 펴면서 한글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1912년에 만든 “언문철자표기법”은 조선어를 절름발이로 만들어 버렸다. 대표적인 사례가 두음법칙이다. ‘ㄹ’과 ‘ㄴ'이 어두에 오면 ’ㅇ‘으로 발음하게 한 것이다. 이는 일본인 특유의 혀 짧은 발음체계에 맞추다보니 훈민정음을 스스로 왜곡시켜 버린 것이다. ’라디오‘와 ’리듬’ 같이 외래어에는 적용치 않으면서 유독 이 문제는 방치하고 있다. 북한은 해방 후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면서 두음법칙을 폐기했다. 두음법칙은 한글의 효용성과 어휘개발 폭을 좁힐 뿐 아니라 일제가 만든 철자표기법을 깊은 고민을 하지 않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2007년 성씨의 표기는 두음법칙에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대법원 호적예규가 있어 유 씨에서 류 씨로 일부가 제자리 찾기도 했지만 전면적 재검토가 필요하다.
당쟁이 한국 민의 분열적인 민족성 때문이라는 일제 식민사관에 대한 비판이 없지 않으나 현대 정당정치의 원조 격으로 긍정적인 정치 현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한편 남인이 주류를 이루는 영남은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조정에 정3품 이상관료가 극히 드물었다고 한다. 혹자는 “박정희 대통령의 5.16에 이르기 전까지 300년을 서러운 남인의 시절 이었다”고 까지 한다. 그 한을 풀어 준 것이 5.16이라고 주장하는 인사도 있다. 하지만 현대사에 와서 영호남으로 갈라져 지역적 반목에 수도권과 비수도권이 더해져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 이념적 대결구도 그리고 최근에는 세대 간 갈등으로 좀처럼 풀리지 않는 난제이다. 심지어 같은 당 안에서도 ‘친이’ ‘친박’으로 또는 구 당파 신 당파로 나누어지는 등 붕당은 지금도 끝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