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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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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참화의 아픔과 극도의 가난을 탈피하기 위해 1969년 3월 구미국가 산업 1공단을 착공했고, 1973년 10월, 조성된 320만평에는 187개의 기업이 입주, 가동에 들어갔다.
전자 60%, 섬유 30%, 기타는 10%였다. 전자 부문은 아날로그 흑백 TV 생산을 위한 금성사, 금성통신, 금성전선, 한도공업, 금성정밀, 한국전자, 대한 전선,천일전자를 비롯한 7개의 일본기업이었다.
또 섬유 분야는 (주)코오롱, 윤성방직,동국방직, 동국무역, 한국 합섬, 이화섬유, 제일합섬, 제일모직, 김감 단지, 코오롱 단지, 동국단지 였고, 기타 부분은 한국 농약, 흥명공업, 아리아 악기, 서통, 가나공사, 삼영화학, 정화 금속과 중소하청기업 등이었다.
이처럼 수많은 기업이 입주해 가동에 들어가면서 전국 팔도에서는 잘살아 보겠다는 희망을 안고 소년, 소녀들이 밀물듯이 밀려들었다.
이들의 열정은 대단했다. 생산성 향상과 품질 향상에 앞장선 이들은 수출 납기를 맞추기 위해 12시간, 2교대 근무와 단부제 근무부서 역시 매주 1회 이상 열악한 작업환경에도 불구하고 24시간 철야 근무와 계속 근무를 통해 기업과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공단이 이처럼 발전을 하는데는 소년과 소녀, 서민과 근로자의 눈물겨운 희생이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국가와 기업주가 근로자의 복지 증진과 처우개선에는 인색하면서 오로지 생산성 향상과 수출이라는 미명하에 근로자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잘못된 관행을 개선하기 위해 1970년도, 유신헌법 긴급조치라는 상황을 딛고 노동조합을 결성했고, 1980년도, 신군부의 악명 높은 구보위 하에서도 공단 내 13개 회사를 대상으로 노종조합을 결성한 것은 노동자의 단결된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국 노총 산하 전국의 대부분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지 못하고 관망하고 있을 당시 한국노총 구미시 지역협의회는 근로자의 권익신장과 복지 증진을 위해 잘못된 노사 관계를 바로 잡아 나갔던 것이다.
사무원과 공원의 명칭을 사무직 사원과 기능직 사원으로 호칭을 변경하고, 작업복도 동일한 것으로 착용하게 했다. 사무직, 기능직에 따라 차별 지급해 온 상여금도 동일 지급토록 했으며, 별도로 운영해 온 간부식당, 근로자 식당도 동일한 식당으로 개선했다.
이와함께 퇴근할 때마다 이뤄지던 검신제도도 폐지해 사무직과 동등한 혜택을 받도록 했다. 또 추석, 설, 명절 때에는 고향에 다녀올 수 있도록 열차, 관광버스를 대절, 전국 팔도에 운행하면서 산업전사와 가족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이처럼 근로자 복지가 향상되는 가운데 구미 공단 기업체는 여름 휴가를 위해 회사마다 동해 안쪽이나 부산 해운대, 광안리, 송정, 남해, 상주 해수욕장에 이르기까지 휴양소를 설치해 근로자 및 가족의 복지 증진에 앞장섰다.이에 힘입어 구미공단은 노사가 합심해 우리나라 수출의 12%를 생산하는 위대한 내륙 공단으로 재 탄생했다.
노사는 국가간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원들의 정신적 교육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를 위해 강원도 신림, 경기도 광주, 가나안 농군학교의 교육을 통해 하면 된다는 자신감과 해내고 말겠다는 협동심을 길렀고, 이러한 땀과 눈물은 1977년 제1회 100억불 수출의 날을 기념하는 역사적인 기록을 남기는 힘이 됐다.
신화는 지속됐다. 하지만 노사간 갈등이 점차 해결되면서 국가 산업 발전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는 평화로운 구미공단에 도시 산업 교회가 침투해 공장의 생산을 마비시키려는 잘못된 행동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굴복하지 않았다.
잘못된 행동을 퇴출시킨 노사정은 대립이 아닌 공생공존해야 잘 살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구미의 소년과 소녀들을 위한 청소년 회관 건립과 박재홍 당시 국회의원의 노력에 힘입어 한국 노총 구미지역 협의회 사무실을 건립했다. 박의원의 역할은 이외에도 적지 않았다.
흑백 TV가 포화 상태가 되면서 수출은 물론 국내시장에서 어려움을 겪게 됐고, 흑백 브라운관을 생산하는 한국 전기초자 공장이 문을 닫게 되자, 여의도 한국 유리 본사를 방문해 대책을 요구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를 인지한 관계자들은 박의원을 만나 한국 전기 초자가 소재해 있는 구미공단을 살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주문했다. 이에 힘입어 칼라 TV 방송을, 당초 1984년에서 1981년으로 3년 앞 당기게 됐고, 이러한 정책 변화는 구미공단의 새로운 신성장 동력으로 작용하면서 공단 발전에 막대한 기여를 하게 됐다.
▶제2 공단은 1977년 7월에 착공, 71만 4천평을 조성하면서 1981년 12월에 완료됐다. 이 곳에 첨단 전자부품 생산을 위해 금성 반도체, 금성 실트론, 마이크론, 효성 산업 등 많은 기업들이 입주하면서 공단은 번영과 번창의 길을 걸어갔다.
하지만 근로자를 위한 쉼터 부족과 교육 여건 부족으로 구미공단으로 유입을 거부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직시하고 극복 방안의 일환으로 공립 중고등학교 확충, 사립 고등학교 유치, 서민 근로자를 위한 주공 아파트 유치, 체육 시설 및 도서관 건립을 위해 노사정이 합의 했다. 하지만 기업주는 생산성과 품질향상, 수출 납기에만 신경을 곤두세울 뿐이었다.
아울러 구미시 역시 강건너 불구경 이었다. 이래서는 미래가 없었다. 그래서 금성사 구미공장 지부는 시청 후문 쪽 샛별 아파트 60세대를 건립키로 하고, 노사 합의하에 주택조합을 결성한 후 우수 사원을 선발해 퇴직금, 차입과 주택은행 융자 및 10%의 자기 부담 형태로 내집을 마련할 수 있도록 했다. 1980년대 초, 우리나라 최초로 기적같은 일이 성료된 것이었다.
▶이후 정치사는 가파르게 써 내려갔다. 강압적인 군사 정권에 염증을 느낀 대다수의 국민이 민주화를 외치며 들고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박종철, 이한열 학생의 죽음은 도화선이 됐다. 이를 계기로 체육관 선거를 통해 99% 찬성 대통령이라는 코메디의 역사는 종결됐다.
이어 1987년 6.29 항복을 받아내면서 민주주의 근본 원칙인 국민직접 선거권을 회복했다.
하지만 최근들어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내세운 불만세력이 전국에 걸쳐 질서를 파괴하고, 산업을 마비시키는 등 데모가 연일 발생하면서 구미공단은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래서는 안된다.
새로운 산업사회 모델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노사정이 적극적인 대처로 공단의 평화를 회복해야 한다. 이것이 구미공단이 번영으로 가는 길이다.
박종철? 이한열? 지금 있었음 빨갱이라고욕했겠지. 어디서 열사이름을 팔아먹고 있나 충견노조가.
09/04 18:30 삭제
국회의원한테빌붙어회관지은걸자랑이라고말하고있다
09/04 15:53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