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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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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이 거창의 수승대(搜勝臺)에 시문(詩文)을 쓴 글이다. 그는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로 겸재(謙齋) 정선(鄭敾) ‧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과 더불어 삼재(三齋)의 한 사람으로 불러졌다. 벼슬은 도정(都正)을 지냈으며 두 차례에 걸친 어진제작 거부로 일시 관직을 박탈당하기도 했으나 '기예로서 임금을 섬길 수는 없다.' 는 사대부로서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킨 개결한 선비로 유명하다. 산수 ‧ 산수인물 ‧ 화조 ‧ 서(書)에 뛰어났는데 인물화에서 조선의 인물을 직접 사생하여 그려냈다는 사실정신과 속화 장르를 확연히 양식적으로 확립시켜 다음 세대인 김홍도가 속화의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게 했다는 업적이 주목된다.
그가 안의현감(安義縣監)에 재임하던 시절 거창의 수승대에 여행을 갔을 때 지은 칠언절구(七言絶句)의 시문을 거북바위에 새겨서 남겼다. 시문의 내용은 거북바위 즉, 수승대에 대한 명칭을 역사적으로 기록한 글이다. 그 유래를 삼국시대부터 전해온 수송대(愁送臺)라는 명칭의 변천을 기조로 한 것으로 마지막 구절에서 요수대(樂水臺)를 애송하는 그의 심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가 이 시문을 지은 때는 요수(樂水) 신권(慎權)이 세상을 떠 난지 170년이 되던 해였다. 얼굴도 모르는 신권을 애송하는 시문을 이렇게 남기게 된 것은 이때에 신권의 5세손으로 그보다 2살 아래였던 황고(黃皐) 신수이(愼守彛)와 친교를 맺어 서로 깊게 교감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거창의 명승인 수승대의 거북바위 남쪽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에 새겨진 시문은 장방형의 큰 틀 속에 세로쓰기를 하였으며 마지막에 조영석이 쓴다고 기록하였으므로 바위에 새긴 그의 글씨이다. 한편 그는 53세 되던 1738년(영조 14)에 안의현감으로 취임했으며 5년 후에 현감을 그만두고 1743년(영조 19) 4월에 그 직을 떠나면서 수승대에 마지막 여행을 왔다가 남긴 작품이다.
▶조영석(趙榮祏)이 수승대(搜勝臺)에 시문(詩文)을 씀
羅濟傳名愁送臺, 樂水改名岩龜臺. 退溪錫名搜勝臺, 遺風誦名樂水臺. 癸亥 四月 日 趙榮祏書. 신라와 백제가 전한 이름이 수송대(愁送臺)이고, 요수(樂水) 신권(愼權)선생이 개명한 이름은 암구대(岩龜臺)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이 지은 이름은 수승대(搜勝臺)이고, 오래전부터 불러온 이름은 요수대(樂水臺)이어라. 1743년(영조 19) 4월 일 조영석(趙榮祏)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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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재 조영석의 수승대에 쓴 시문(詩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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