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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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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산업과 굴뚝없는 산업을 조화시키는 것이 구미 미래의 먹거리가 될 수 있다는 여론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국 산업화의 현장인 구미에는 여타 지자체들이 부러워하는 문화유산이 광범위하게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들어 후삼국 통일의 현장인 지산앞들인 발갱이들 일대를 대상으로 한 후삼국 통일문화제를 구미시의 대표축제로 태생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미, 삼국통일의 현장인 논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향토축제인 60년 전통의 백제문화제 일원으로 참여해 황산벌 전투를 재현하면서 관광가치를 재고시키고 있다.
따라서 936년, 발갱이들이 후삼국 통일의 현장이 되기까지 2년 동안 왕건이 견훤(아들 신검)과 대적하기 위해 전열을 정비했던 해평면 냉산(태조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선산읍 생곡리 앞 낙동강 연안부터 고아읍 관심리, 괴평리의 앞들과 지산동 앞들을 대상으로 후삼국 통일의 길을 스토리텔링화 한 가운데 만들고, 후삼국 통일의 현장을 재현하는 내용의 후삼국 통일문화제를 탄생시킬 경우 막대한 부가가치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여론이다.특히 낙동강변을 대상으로 시가 추진하고 있는 <낙동강 7景6樂 리버사이드 프로젝트>와 접목할 경우 효과의 극대화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호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관광산업은 대기업 하나를 유치하는 것 이상의 부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외국의 도시들은 보여주고 있다. 실례로 괴테의 도시 프랑크 푸르트는 괴테의 생가 문화를 포장해 관광산업을 발전시켜 나가면서 한 도시가 먹고사는 먹거리를 창출하고 있다. 또 문화 유산이 전무하다시피한 미국 뉴욕은 로마나 파리처럼 역사적 유적으로 유명한 도시도 아니고, 스위스처럼 빼어난 자연환경으로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곳도 아니지만 없는 문화유산을 개발하고 이를 포장해 상품화 함으로써 4000만명의 내국인과 1000만명 이상의 외국인이 찾는 세계적 관광지로 명성을 높이고 있다.
한편 뜻있는 시민들은 문화예술과 명칭을 문화 관광과로 개칭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예술은 문화의 하위 개념이다. 과를 신설할 당시부터 문화과라고 했어야 옳다.따라서 차제에 문화 관광과로 명칭을 바꾸고, 부서안에 가칭, 후삼국 통일 문화제 T/F을 구성, 운영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렇다면 936년 후삼국 통일을 이루기까지 선산읍 낙동강변과 고아읍, 지산동 앞들에서는 어떤 전투가 전개되었을까.
지산동 앞들은 발갱이들이라고 불린다. 이 명칭의 시초는 발검(拔劍)들이다. 칼집에서 칼을 뽑았다는 의미가 바로 발검이다. 고서에 따르면 935년 지금의 선산읍 생곡리 앞 낙동강 연안에 있던 견훤을 무찌른 왕건은 마지막까지 항전하는 견훤의 아들 신검을 쫓기 시작했고, 이듬해인 936년 지산동 앞들에서 신검을 격퇴시켰다.
칼집에서 칼을 뽑은 (발검 拔劍) 왕건이 신검을 격퇴시킨 지산동 앞들인 발갱이들은 바로 후삼국 통일의 현장인 것이다.
▶후삼국 전투
918년 궁예를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고 권력을 쥔 왕건은 927년,견훤과의 팔공산 동오수 전투 (桐藪동수전쟁)에서 대패한 후 선산지역으로 후퇴해야 했다.
전열을 가다듬은 것은 8년 후인 935년이었다. 왕건은 그동안 지금의 선산인 당시 일선군 냉산(태조산)에 숭신산성 (崇信山城)을 쌓고, 그 아래의 낙산동 일대에 군창( 軍倉)을 일곱 개나 지어 군량을 비축하는 등 장기전을 마무리했다. 낙산동 일대를 칠창리(七倉里)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전열을 가다듬은 왕건은 그해 선산읍 생곡리 앞〔지금의 일선교 근처, 속칭 어성정 禦城亭〕 태조방천으로 불리는 낙동강 연안에서 견훤과 후삼국 통일을 위한 싸움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935년 선산 전투는 8년전 분루를 삼켜야 했던 팔공산 동오수 전투의 악몽을 말끔히 씻어낼 수 있었다. 선산에서 대승을 한 왕건은 이듬해인 936년 여세를 몰아 견훤의 아들 신검과 고아읍 관심리 앞들에서 제1차 결전에 들어갔다. 당시 왕건이 신검을 막기 위해 주둔한 관심(官心)평야는 어검(禦劒)평야, 지금은 어갱이들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아울러 괴평동 앞뜰에 진을 쳤던 신검의 진지를 왕건이 점령한 후부터 이곳은 점검(占劒)평야 즉 점갱이들이라고 불렸다.
어검들 전투에서 패배한 신검은 936년 인접해 있는 지산동 앞들과 사기점(신평2동)으로 피신했고, 이곳에 미리 도착해 진을 치고 있던 왕건은 신검을 사로잡고 그를 굴복시켰다. 결국 이곳은 당시 칼집에서 칼을 뽑고 신검을 격퇴시켰다는 의미에서 발검(拔劍)들이라고 했고, 이후 발갱이들로 불리기에 이르렀다.
우와 대박!!! 이런 역사적인 훌륭한 문화유산이 있는데 왜 방치해 뒀을까요? 다른 시군은 택도 아닌것도 부각해서 먹을거리 찾느라 난리도 아닌데~~ 모두 뜨내기들이라고 자부심도 없는줄 아남유~~ㅌㅌ
11/28 09:27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