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경북문화신문 |
|
1961년 5월 16일 새벽, 고요한 적막을 깨고 총성이 울렸다. 그것은 나락으로 떨어져 있는 대한민국에 새로운 희망의 시대를 예고하는 총성이었다. 40대의 젊은 군인 박정희, 그는 구국에 찬 혁명공약을 발표했다. 혁명공약 4번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고 발표했다. 절망과 기아선상은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문구이다. 절망은 어찌할 수 없고 희망이 없는 것이며, 기아선상은 먹을 것이 모자라 굶주림이 계속된다는 말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인도 다음으로 2번째로 가난한 나라로서 희망이 없고 절망적이었으며 한 끼의 때(식사)를 걱정하는 절박한 현실이었다. 그 때 혁명의장 박정희는 가난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 경제개발 뿐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경제개발을 하기 위해서는 자본과 기술, 자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지만 우리에게는 3가지 중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오직 있는 것은 할 일없이 놀고 있는 실업자 즉, 풍부한 인력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1962년 1월 13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박정희 의장은 경제개발을 하기 위해서 차관을 빌리려고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선진국에 손을 내밀었지만 선진국은 냉담했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자원도 없고 신용도 없는 나라에 뭘 믿고 돈을 빌려 주겠나! 돌이켜보면 그 당시 선진국의 거절은 당연한 것이었다. 1963년 독일에 광부를 보내고 천신만고 끝에 우리나라 최초로 1964년 10월, 독일에서 3,750만$ 차관을 빌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참으로 암담한 그 때 박정희 대통령에게 하늘이 준 기회가 왔다. 그건 다름 아닌 월남정부와 미국 존슨대통령의 월남파병 요청이었다. 1차로 의무병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 등 비전투요원을 파병하였다.
그 이후 월남전이 더욱 확전되어 많은 병력이 필요하였으나 미국 본토에서는 미국 국민들의 반전 여론으로 인해 더 이상 전투부대를 월남에 보내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 전개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전방에 배치되어 있던 미군 2개 사단을 철수시켜 월남으로 보내는 것을 검토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만약 전방에 배치되어 있는 미군 2개 사단이 빠지면 호시탐탐 우리나라를 노리고 있던 북한이 제2의 6.25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보기가 어려웠던 상황이었으며, 또한 6.25 전쟁 때 수천만$의 전비를 쓰고 수십 만 명의 전·사상자를 감수하면서까지 우리를 도와준 혈맹 미국의 요청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결국 파병이 우리의 국가안보에 직결되어 있고, 국익을 위하며 우리나라가 도약할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이 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고심 끝에 파병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였고, 국회는 파병동의안을 가결시켜 1964년 7월에 비전투부대를 파병하고 이어서 1965년부터 청룡, 맹호, 백마 등 전투부대를 차례로 파병하였다. 그리고 십자성 부대, 비둘기 부대 등 8개 부대가 이역만리 열대우림의 월남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월남참전은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8년 8개월 동안 325,517명의 한국군이 정부의 명령에 의해 목숨을 걸고 파병되어 전사·사망 5,099명, 부상 12,352명, 고엽제 휴유(의)증환자 10만 여명이 발생하는 등 우리 군의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한국 현대사에 지대한 공헌과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 첫째로, 월남파병은 경제개발의 확실한 자금을 대는 역할을 하였다. 파병당시 1964년 말 통계에 보면, 우리나라 총 외환 보유고가 1억2천만$, 총 수출액 9천7백만$, 국민1인당 GNP가 100$이었는데 월남 전쟁으로 인하여 국내로 유입된 달러가 자그마치 67억2천9백만$이었다(공식적인 것만). 1965년 당시 36년 동안 일본에게 압박·착취를 당한 보상으로 무상 3억$, 재정차관 2억$, 상업차관 3억$ 총 8억$를 여러 해에 걸쳐 유·무상으로 받는데 그쳤으며, 파병기간(1968. 2. 1 - 1970. 7. 7) 중 2년 5개월 만에 건설한 경부고속도로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428km에 이르며 1km당 당시 평균 공사비가 1억원 소요되어 총 428억원이 소요되었다. 참고로, 그 당시의 환율이 1$당 290원이었으니 총 1억4천7백만$가 소요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월남 전쟁으로 인하여 들여온 67억$(차관, 국군현대화 무상지원금 포함)는 경부고속도로를 45개나 만들 수 있는 가히 천문학적인 수치였다. 따라서 이 엄청난 금액은 국가의 경제 발전을 확실히 견인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둘째, 파병의 댓가로 미국이 무상으로 지원해 준 15억$상당의 무기와 장비는 한국군이 현대화된 국군으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되었고, 북한에 절대 열세였던 국방력을 북한과 대등한 관계로 끌어 올리며 강력한 국군으로 변모시켰다. 그 결과, 전쟁억지력을 발휘하고 북한의 남침야욕을 분쇄시키어 한국군의 국방력 강화와 국가안보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었다.
셋째, 월남파병은 6.25전쟁 때 도와준 21개국의 자유우방국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었고 그 결과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쌓게 되어 믿음직한 자유우방국가로서 자리매김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의 외교적인 위상이 절대적으로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넷째, 우리나라 최초로 해외(월남)에 우리나라의 건설, 운송, 용역 등 79개의 기업과 7만 여명의 기술자들이 월남파병의 댓가로 진출하여 많은 외화를 획득하고, 해외 진출에 반드시 필요한 실적과 경험을 쌓아, 월남을 철수하는 1973년에는 중동으로 진출하는 결정적인 브릿지 역할을 하였다. 다시 말해 건설사들의 중동진출은 월남참전이 없었다면 감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1960년대에「월남전쟁 특수」를 통해 경제적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여 경제개발 5개년 계획 1,2차를 성공하였고, 1970년대에는「중동 건설특수」를 통하여 경제개발 3,4차 계획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한국경제 개발의 신화를 창조하며 농업국가에서 중화학공업 국가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되었고, 또한 굶주림과 절망에서 허덕이던 국민들에게 우리도 ‘하면 된다’는 긍지와 자신감을 심어주게 되었다. 결국 오늘 날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부상하는 초석이 되었던 것은 월남참전 용사들의 호국정신과 숭고한 희생의 댓가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돌이켜 보면 박정희 대통령의 19여년 통치기간 동안의 업적으로, 경제발전과 국가안보의 성공한 대통령으로서 역사에 길이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월남참전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박정희 대통령과 월남참전은 불가분의 관계이며 5.16혁명공약 4번째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국민을 구해낸다」를 확실히 지키고, 조국의 근대화에 찬란한 금자탑을 세우는 위대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길이 남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월남참전자들의 숭고한 희생과 애국 충정의 호국정신은 온 국민이 존경하고 찬양하여 역사에 기록되고 영원희 보존되어야 할 것이며, 늦었지만 정부와 국회는 지금부터라도 월남참전자들의 희생과 공헌에 합당한 특별보상법을 만들어 정부가 앞장서 명예롭게 예우해 주어야 할 것이다.
형평에 맞는 공평한 보훈정책이 바로 국가의 정체성을 바로 잡는 것이며, 이 시대의 정치 지도자들이 하여야 할 덕목이며 시대적 사명이라 할 것이다.
이제 다시 한 번 국민 모두가 애국심으로 뭉쳐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노력하여 역동적인 코리아로 도약하여 어느 나라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강력한 대한민국 풍요로운 선진 1등 복지국가로 거듭나기를 33만 월남참전자와 200만 가족 모두는 두 손 모아 염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