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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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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정약용이『열상산수도(冽上山水圖)』에 제시를 쓴 그림이다. 그는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했다. 실용지학(實用之學),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면서 성리학의 공리공담을 배격하고 봉건제도의 각종 폐해를 개혁하려는 진보적인 사회개혁안을 제시했다. 그의 생애는 신유사옥에 따른 유배를 전후로 크게 두 시기로 구분한다.
전기에 해당하는 시기는 주로 관료생활의 시기이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고 이가환(李家煥)과 자신의 매부인 이승훈(李承薰) 등으로부터 이익의 학문을 접했다. 이때부터 이익과 같은 학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그의 제자인 이중환(李重煥)등의 저서를 탐독했다. 문과에 급제한 후 이듬해 검열이 되었으나 공서파의 탄핵을 받아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가 10일 만에 풀려났다. 곧이어 사헌부 지평등을 지내고 경기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승정원 동부승지등이 되었으나 주문모사건에 연루되어 금정찰방(金井察方)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다시 소환되어 승정원 좌부승지, 형조참의 등을 지내며 규장각의 편찬사업에도 참여했다.
후기는 주로 유배생활의 시기이다. 그는 출중한 학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정조가 죽은 후 정권을 장악한 벽파는 남인계의 시파를 제거하기 위해 천주교도들이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끌어들이고 역모를 꾀했다는 죄명을 내세워 신유사옥을 일으켰다. 이때 이가환등과 그리고 형인 정약전(丁若銓)등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장기(長鬐)로 유배되었다. 그해 11월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는데, 그는 이곳에서의 유배기간 동안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그의 학문체계를 완성했다. 강진에서 유배를 마친 후 고향 열수에서 완성한 일부 작품에 열초(洌樵)라는 필명을 쓴다. 이 그림에서는 고향의 산수를 유람하며 세상을 관조하는 그의 여유가 읽힌다. 극도로 절제된 붓놀림으로 연하게 채색했다. 그의 말년에 학문친구였던 홍현주(洪顯周)의 소장품임을 밝히는 도장이 찍혀 있다. 고향의 산수를 즐기며 달관한 삶의 여유를 보낼 때 그린 그림이다.
▶정약용(丁若鏞)의『열상산수도』에 제시(題詩)를 씀
騷騷雲木擺孱顔, 疑有天風到此間, 草岸小亭誰作者, 瀑泉聲出對頭山. 洌樵. 사각사각 구름 낀 숲에 높은 산 열리니, 아마도 바람이 불어 이곳으로 이르게 했겠지. 풀 언덕 작은 정자 누가 지었나, 폭포 샘 소리가 두산에서 들려오네. 열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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