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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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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면 즐거운 추석 명절이다. 그간 객지에 흩어져 있던 가족 친지가 한자리에 모여 조상에게 다례(茶禮)를 올리며 사후(死後)의 효 행사를 실시한다. 그리고 덕담을 들으며 가족끼리 정담을 나누고 즐거운 추석절을 보내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를 낳아서 길러 주신 부모님의 은덕에 대한 자식의 도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된다. 이것이 우리 전래의 효 문화다.
그리하여 부모님을 근심 걱정이 없이 마음 편히 모시는 것이 첫째의 효로 이를 양지의 효(養志孝)라 했다. 둘째는 부모님의 노후에는 항시 침식과 건강을 돌보며 편안하게 모시는 것을 반포지효(反哺之孝)요 양구체(養口體)의 효라 했다. 다음은 입신양명(立身揚名)으로 이름을 높이 사서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으로 살아생전 효를 다해야 한다. 그리고 사후에는 돌아가신 기일(忌日)을 잊지 않고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전통 효를 이어왔다. 이것이 우리의 미풍양속인 전래의 효 문화다.
그러나 이제 현대 문명 속에 효 문화가 급속도로 변하고 있음이 실감나게 느껴진다.
나이 많아 거동이 불편하고 의식이 분명치 않거나 돌보기가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가족을 양로원이나 시설 보호소로 거소를 옮겨간다. 이를 두고 위탁 효 또는 현대판 효라고 하지 않겠나?
시설에 위탁 보호된 그들이 다가오는 추석 명절 때는 더욱 가족이 그립고,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오직 죽음만을 기다려야 하는 공포의 삶을, 우리는 주관적인 입장에서 한번쯤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누구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늙고 병들고 종국에는 이승을 마감해야 한다. 이것이 생로병사(生老病死) 자연의 순리다. 누구나 이 자연의 순리를 거역할 수 없고 또한 세태의 변화에 순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만은 오늘날 현대판 효는 인생무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한다.
오늘도 죽음만을 기다릴 저 시설에 수용되어 있을 그들이 모두 누구의 부모 형제들이며 그들만의 일일까를 생각하면 착찹한 마음을 가눌 바가 없다. 그러나 세태의 변화를 매양 서러워할 수만은 없기에 긍정적인 사고로 받아들여야 함이 옳지 않겠나 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사회의 효 문화가 극히 퇴락하고 있는 현실에 안타까운 생각을 더욱 금할 수 가 없다. 부모 유산에 눈이 먼 후손들 골육상잔이나 법적 다툼, 심지어 부모를 살해하는 망나니 같은 행동들은 우리 사회의 공분을 더욱 불러일으키고 있다.
얼마 전 정치권에서 불효 방지입법을 서둔다는 이야기며 도 어느 기관 단체에서는 효도 계약서를 작성케 한다는 소식은 우리 사회의 효 문화 현주소를 알게 하는 대목이었다. 우리의 효 문화가 어떻게 하여 여기까지 왔을까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하는 대목이다.
효는 윤리 도덕의 불문율이다. 오죽하면 법률로까지 다루어야 할 세태까지 왔을까 하는 생각에 더욱 우리를 황당하게 한다.
시중에 효 문화에 대한 많은 책자가 발행되고 있다.
옛말에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요, 백견이 불여일행(百見不如一行)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좋은 가르침의 말이라 해도 실천이 없으면 모두가 공허한 연불에 지나지 않는다. 효의 실천은 누구에게 강요보다는 스스로가 실천하고, 타의 모범적인 실천이 있을 때 올바른 효 문화가 정착되리라 생각 한다. 우리 모두 즐거운 추석 명절에 조상에 대한 다례를 올리면서 시설의 현대판 효 문화를 다시 한 번쯤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자식된 우리 모두 풍수지탄(風樹之嘆)의 고사를 한번쯤 새겨 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