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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오후, 새누리당 공관위는 상주시▪군위군▪의성군▪청송군 선거구의 후보로 김종태 현 국회의원을 공천했다.특히 김의원은 여론조사 경선에서 의성출신의 친박 핵심 김재원(재선)의원을 누르면서 국민적인 관전포인트의 대상으로 급부상했다.
여론조사 경선 이전만 해도 상주출신 김의원이 친박실세인 김재원 의원을 누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20대 총선을 앞두고 경북지역의 진박 후보들이 파죽지세처럼 상대 후보를 여유있게 물리치면서 새누리당 후보자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13명 정수의 경북 총선에서 김종태 의원은 영양군▪ 영덕군▪ 봉화군▪ 울진군 선거구에서 승리한 비박계 강석호의원에 이은 또 두 번째의 이변을 연출했다.
하지만 김종태 의원의 경선 승리의 이면에는 상주라는 지역적 자존심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적절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선거구 획정의 기준이 되는 인구수 편차를 현행 3대1까지 허용되는 공직선거법이 헌법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 3대1의 인구 편차를 2대1로 조정하라고 권고하자, 상주의 민심이 요동을 쳤다.
헌법재판소의 판결 결과를 적용할 경우 독립선거구 최소 요건의 인구수는 14만명이었다. 인구 10만명을 턱걸이 하는 상주시로서는 인근지역과 합병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결국 이러한 우려는 현실이 됐다. 1948년 제헌의회 이후 19대 총선에 이르기까지 독립선거구를 통해 1-2명의 지역 출신 국회의원을 배출해 온 왕년의 상주시가 인구 14만명에 미달되면서 총선사상 처음으로 인근지역인 군위군, 의성군, 청송군과 통합하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의성출신으로서 친박 핵심실세인 김재원 의원의 존재감은 상주시민들에게 압박감을 가중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자칫하면 헌정사상 최초로 지역 출신 의원을 배출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시민적 우려는 결국 상주민심 결집으로 확장성을 더해갔다.
상주시가 어떤 곳인가.1965년 당시만 해도 26만5천명의 인구를 자랑하던 상주는 도내 최대 규모의 거대 지역으로 자리를 확고히 할 정도였다. 역사적으로도 경주와 상주의 앞자를 따 경상도라는 광역명칭을 정했을 만큼 상주는 1970년 이전까지만 해도 경상북도의 중심지로서 그 명맥을 유지해 왔다.
이처럼 경북 역사의 중심에 서 온 상주시는 3대1의 인구편차를 2대1로 조정한 가운데 선거구를 재조정하라는 헌법 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인근지역과 통합이 불가피한 상황으로 몰려야 했다. 독립선거구의 최소요건인 인구 14만명보다 4만명이 모자라는 인구 10만명의 상주시로서는 최대의 치욕이었다.
이러한 위급 상황이 파고처럼 밀려들자, 상주민심은 인근지역 후보와의 경쟁력 선점을 목표로 단일화 촉구에 나섰다. 불씨를 지핀 것은 시의회였고, 이곳에서 점화된 불씨는 청년회의소, 시민▪종교▪농민단체로 확산돼 나갔다. 이러한 확장성에 힘입어 지난 2월 말에는 결집된 민심이 '상주지역 국회의원 후보 단일화 범시민 추진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결국 결집된 민심의 파괴력이 상주출신 김종태 의원을 응원하면서 의성출신으로서 친박핵심실세인 김재원 의원을 누르고 새누리당 공천을 받는 상주의 대역사로 이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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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출신 역대 국회의원들>
1948년 제1대부터 19대까지 상주가 배출한 국회의원은 한엄회, 전진한,박성우,백남식, 김달호, 김윤하, 김상구,조광희,김정근, 홍정표, 김기영,김천수,김인, 정휘동,김상구, 이재옥,김근수,이상배,성윤환, 김종태 등 20명이다.
제헌의회가 세상에 선을 보인 1948년 제1대부터 1960년 제5대까지는 상주군 갑,을구에 각 1명씩 2명의 국회의원,1963년 6대부터 1971년 8대까지는 1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1973년 제9대부터 1985년 12대까지는 중선거구제를 도입했다. 상주군은 김천시, 금릉군에 포함돼 2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특이한 점은 제12대에는 상주군 출신 2명 모두가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당시 김천시와 금릉군은 국회의원을 배출하지 못했다.
1988년 제13대부터 시군 통합 직전인 1992년 제14대에서는 상주시와 상주군에서 1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다.이어 상주군과 상주시가 통합된 1996년 제15대부터 제19대까지 통합 상주시는 1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해 왔다.
이처럼 상주는 역대 선거에서 1-2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해 왔다. 하지만 인구 급감으로 2016년 20대 총선에서는 군위군▪의성군▪청송군과 통합 선거구에 합류해야만 하는 안타까움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 상주출신을 새누리당 공천 후보로 탄생시켰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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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1948-1950)
상주군 갑과 상주군 을에 걸쳐 한엄회, 전진환 등 2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한암회
대한독립촉성 국민회 소속으로 출마했다.
한국 전쟁 당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갔다는 설도 있다. 한감석으로 개명해 한국에서 살다가 1975년 별세했다.
▷전진한
대한노동 총연맹 소속으로 출마했다.
상주에서 제1대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타지에서 2대,3대, 5대,6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초대 사회부장관을 역임했다.
1965년 민정당 부총재에 올랐으며, 통합야당인 민중당(民衆黨)의 지도위원을 지냈다. 한일회담을 반대해 ‘대일굴욕 외교반대 범국민운동 투쟁위원회’에 참여했다. 1964년 ‘한국민주통일 국민협의회’에 참여하는 등 통일문제에도 관심을 쏟았다. 1967년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기도 했다. 1972년 4월 22일 별세했다. 와세다 대학을 나왔다.
■제2대 (1950-1952)
상주군 갑과 상주군 을에 걸쳐 박성우, 백남식 등 2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박성우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한국 전쟁 당시 납북됐다. 상주공림 농잠학교, 대한 농민회 중앙위원을 지냈으며, 제1대 상주갑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낙선하기도 했다.
▷백남식
국민회로 출마했다.
제1대 국회의원 상주을 선거에서 낙선됐으나, 2대 선거에서 기사회생했다. 중졸로서 금융조합장, 국민회 상주군 지부장을 지냈다. 2대에 이어 3대에도 당선된 재선의원이다. 1964년 별세했다.
■제3대(1954-1958)
상주군 갑과 을에서 김달호, 백남식등 2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다.두명 모두 무소속이었다.
▷김달호
일본 쥬오대학교 법학부를 중퇴했다. 일제 강점기에 서울 고등 검찰청 차장 검사를 역임했다.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1958년 자유당의 북진통일론에 반대하는 평화통일론을 표방했다.자유당정권의 장기 집권욕으로 인해 진보당의 혁신계 인사들이 대거 투옥되었는데, 진보당의 부위원장이었던 그도 체포되었으나 1957년 대법원에서 무죄로 석방됐다.
1961년 5·16이 발발하면서 사회민주주의 인사에 대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자로 간주했던 군사혁명 세력에 의해 군사혁명재판소에 체포돼 15년의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결국, 분단의식이 과잉 내면화된 당시의 한국적 정치상황하에서 그는 사회민주주의의 정치이념을 정착시키지 못하고 정치적 핍박만을 받은 채 정계에서 은퇴했다. 1979년 상주에 안장됐다.
■제4대(1958-1960(
상주군 갑과 을구에서 조광희, 김정근등 2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조광희
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했다.
경기중고, 서울대 농대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교수, 농촌진흥 공사 사장을 역임했다.
▷김정근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4대에 이어 6대에도 당선된 재선의원이다.상주군수 출신이다.
■제5대(1960-1961)
5.16 군사쿠데타로 임기 1년의 국회였다. 상주군 갑과 을구에서 홍정표, 김기영등 2명의 의원을 배출했다.
▷홍정표
변호사 출신이다.
민주당으로 출마, 44세에 국회의원에 당선됐지만, 5.16 군사 쿠데타로 임기는 채 1년도 안됐다.
▷김기영
중학교를 중퇴했다. 무소속이면서 농민출신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그에게 주어진 국회의원 기간은 채 1년도 안됐다. 5.16 군사 쿠데타의 결과였다.
■제6대(1963-1967)
6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상주에서는 1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해야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끄는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김정근은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바 있다.
대구시와 분리되기 이전인 당시 경북도에서는 20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다. 이중 민정당 1명을 제외한 19명이 민주공화당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무소속이 대거 당선된 이전 선거에 비추어 보면 격세지감이었다.
■제7대 (1967-1971)
상주시의 전신인 당시 상주군에서는 1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다.민주공화당이 득세하던 시절이었다.
▷김천수
민주공화당 간판을 들고 출마해 당선됐다.
대구의전을 졸업했다. 재건국민운동 상주군 촉진회장을 지냈다. 당시 공화당의 기세는 대단했다. 역대 선거에서 50%이상을 획득하고 당선된 경우가 없었던 점에 비추어 김 의원이 당시 획득한 56.7%의 득표율은 대단한 것이었다.
■제8대(1971-1972)
7대에 이어 8대에서도 상주군에서 1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김인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해 65.8%를 획득하면서 당선됐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경북도 지사를 지냈다.
■제9대(1973-1979)
9대부터 12대까지는 김천시와 금릉군, 상주군을 포함하는 중선거구제를 통해 2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9대에는 상주출신 무소속 김윤하, 김천출신 민주공화당 백남억이 당선됐다.
▷김윤하
박정희 정권시절 무소속으로 나선 김윤하의 당선은 상주의 자존심이었다. 더군다나 3선의 김천출신으로 공화당 간판을 들고 나온 백남억은 4만1943표를 얻은 반면 무소속으로 상주의 간판을 들고 나온 김윤하는 백남억보다 8천여표가 많은 4만6980표를 얻었다.
■제10대 (1979-1980)
민주화로 가는 길은 가파랐다. 1980년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10대 국회의원들 역시 임기 1년에 만족해야만 했다.
9대와 마찬가지로 김천시, 금릉군, 상주시를 아우르는 중선거구제를 통해 2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이변이었다. 상주와 김천 출신인 정휘동과 박정수가 무소속으로 나섰으나, 둘은 모두 영광의 월계관을 썼다. 하지만 당선 이후 정휘동은 전두환이 이끄는 민정당에 입당했다.
▷정휘동
2012년 별세했다. 상주초교, 대한제국 상업학교, 성균관대 대학원을 수료했다. 재일본 거류민단 경도본부 부단장, 상주문화원장, 상주 남산학원 이사장, 민주정의당 중앙위원회 농림축산분과 위원장, 전현직 국회의원 모임인 민우회 회장을 지냈다.
이 선거에서는 6-9대에 걸쳐 4선을 고수해 온 백남억 후보가 박정수 후보에게 패배했다. 결국 백의원이 지역정치를 떠나면서 , 박정수 의원의 김천 시대를 예고했다.상주출신 김윤하 의원 역시 패배해 상주 정치를 탈바꿈시켰다.
7명의 후보가 나섰다. 무소속 박정수 후보가 4만 3319표(24%), 무소속 정휘동 후보가 4만 2477(23.5%)로 1,2위를 차지하면서 당선됐다.
민주공화당 백남억 후보는 3만 5200표, 무소속 김윤하 후보 3만 2126표, 신민당 이기한 후보는 1만 5113표를 얻었다. 이외에도 민주통일당 임재영, 무소속 이재옥 후보도 선전했다.
■제11대 (1981-1985)
김천시, 금릉군, 상주군을 아우르는 중선거구제에서 2명의 의원을 선출했다.
10대에 출마해 등원한 김천 출신 박정수는 무소속으로 도전에 재선에 성공했다. 반면 무소속으로 국회에 입성한 상주출신 정휘동은 11대에는 민정당의 간판을 들고 나와 재선에 성공했다.
11대 선거에는 7명의 후보가 출마했다. 10대에 이어 무소속으로 출마한 박정수 후보가 4만 9922표(28.2%), 민정당 정휘동 후보가 4만 6093표(26.1%)를 얻으면서 1,2위로 당선됐다. 민주공화당이 사라지고 민정당 시대가 열리는 때였다.
이외에도 민권당 정정문, 민주한국당 한봉수, 무소속 이재옥, 무소속 김종섭, 무소속 김인 후보가 나섰다.
■제12대 (1985-1988)
김천시와 금릉군, 상주군을 아우르는 중선거구제에 의한 국회의원 선거의 마지막이었다.
특히 12대 선거에서는 상주출신인 김상구와 이재옥이 당선됐다. 김천시와 릉군의 자존심을 구긴 사건이었다.
▷김상구
민정당으로 출마해 당선됐다.전두환과 동서 관계다.
상주농잠고,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하나회 회원이었다.1973년 중령으로 예편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일보 미주부지사장과 하와이지사장을 맡기도 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19887년에 국회 교통체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정의당의 공천을 받지 못하자, 무소속으로 출마해 민주자유당 김근수 후보를 앞질러 제14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1992년 민자당에 입당했다.
1996년 1월 12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구속되는 등의 사건이 있자, 신한국당에 더이상 몸담을 수 없다며 탈당을 선언하고 무소속으로 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5공 청산 열풍에 밀려 낙선했다.
▷이재욱
신한당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별세했다. 하바드 대학교를 나온 엘리트였다.
3명의 후보가 나선 선거에서 상주출신으로 전두환 대통령의 동서인 민정당 김상구 후보가 9만 6567표(49.3%), 3수에 도전한 신한민주당 이재옥 후보가 3만 3504표(17%)를 얻어 1,2위로 당선됐다. 무소속을 고집하면서 3선을 겨냥해 온 박정수 후보는 3만 718표를 얻는데 그치면서 쓴잔을 마셔야 했다.
이외에도 국민당 김한선 후보가 2만 3349표를 얻었으며, 민한당 이기한 후보도 선전했다.
■제13대(1988-1992)
상주시와 상주군에서 1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다.
민정당 김근수가 당선됐다.고려대 법대를 졸업했다. 국가안전기획부 제1차장, 국가보훈처장을 지냈다.
■제14대(1992-1996)
상주시와 상주군에서 1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전두환의 동서인 김상구가 12대에 이어 당선됐다.
■제15대(1996- ),제16대(2000-),제17대(2000-2008)
1995년 상주시와 상주군이 합쳐지면서 통합 상주시가 출범했고, 1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다.
신한국당에서 한나라당으로 당명이 바뀌는 정치사의 질곡 속에서 신한국당, 한나라당의 간판을 달고 나온 이상배가 3선의 고지를 점령했다.
▷이상배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행정고시 합격 후 울진군수, 안동시장, 내무부 차관보, 경북도지사, 환경청장, 내무부 차관, 총무처 장관, 서울특별시장을 거친 상주의 인물로 평가된다.
2009년부터 지금까지 제12대 정부공직자 윤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제18대(2008-2012)
상주시에서 1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다.
이상배에 이어 한나라당 공천을 받고 출마한 성윤환이 당선됐다.
한양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한 변호사 출신이다. 2010년 한나라당 인권위원장을 지냈다.
20대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에 공천 신청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제19대(2012-2016)
상주시에서 1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다.
새누리당 간판을 들고 나온 김종태 현 국회의원이 당선됐다. 20대 총선을 앞두고 의성출신의 친박실세인 김재원 의원을 누르고 공천을 받으면서 세간의 화제를 모으고 있다.
▷김종태
수원대학교 박사 출신이다.상주고와 육군3사관학교,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쳤다.
2015년에 새누리당 원내부대표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