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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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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 A모 인사는 3월14일 오후 기자에게 이런 심경을 털어놓았다.
“오늘, 김천구미 KTX역사에서 가방을 이어 맨 김태환 의원을 보았습니다. 모습이 매우 수척해 보였습니다.”
그날 오후 기자의 메일에는 ‘사랑하는 구미시민 여러분께’드리는 글이 전송돼 있었다.
“시민 여러분의 성원과 지지에 힘입어 분에 넘치게도 세 번이나 국회의원에 당선됐습니다. 여러분의 선택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결과에 승복합니다.
우리 구미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시민이 편안하고 기업하기 좋은 도시가 되어야 합니다. 구미의 재도약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난 12년 동안 김태환을 사랑해주신 구미시민 여러분께 다시한번 고개 숙여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여러분들 모든 가정에 행복이 가득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어쩌면 공인으로서 ‘구미시민들에게 드리는 마지막 말씀’일 수도 있는 글 속에는 12년 세월 동안 정치인으로서 살아온 삶의 흔적이 골골이 맺혀 있었다.
세상사, 마음대로만 되는 일이 있을까.새벽이슬에 핀 꽃도, 가을바람에 담뿍 물이 오른 단풍도 한떨기 바람에 져 내리는 법이다. 이것이 생명의 이치다.
그래서 미련 두고 가는 길이 인생이요, 정치 역경이라고들 하질 않았던가.그러므로 지금 막 피어오른 꽃이 머지않아 시나브로 지듯 정치를 시작하는 순간도 세월의 능선을 굽이치다보면 어느 날 문득 지는 꽃처럼 한때의 추억이 되는 법이다. 그러므로 늘 겸손지덕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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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주 |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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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허주의 정치역경을 물려받은 김태환 의원
짧지 않은 12년 정치사를 지켜 보아온 기자에게 김태환 의원은 때때로 희비가 엇갈리는 감정의 고개를 넘나들게 했다.‘어머니’를 소재로 한 노래를 부르며 유년기로 달려가거나 형 허주를 떠올리는 눈가에는 삭풍에 흔들려온 쓸쓸함이 어렴풋 눈물로 맺혀있곤 했다.
누군가는 ‘성깔있는 정치인’으로 인식되는 김의원이 기자에게 쓸쓸함의 존재로 인식되는 것은 떨쳐낼 수 없는 그만한 추억을 소지하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기자가 김의원의 형, 허주를 만난 것은 16대 총선이 목전에 다다르던 2000년 3월,구미 관광호텔에서였다.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로부터 낙천이라는 청천벽력의 언도를 받은 허주는 이 무렵, 한나라당을 탈당해 이기택, 김광일, 조순, 이수성, 박찬종 전의원등 내로라하는 이들과 함께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당시 김성조 한나라당 후보와 일전불사를 앞두고 있던 터였다.
그날, 구미 관광호텔에서 허주를 만난 기자는 권력의 무상함과 정치세계의 냉정함과 냉혹함을 한 몸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3명의 대통령을 탄생시킨 당대의 권력이자,구미의 자존심이기도 했던 허주의 모습은 흡사 삭풍에 부대끼는 가냘픈 나뭇가지의 모습이었다.구름떼처럼 몰려들던 문전성시의 측근들은 모두 어디로 떠났는지, 당시 호텔에서 허주를 지키던 이는 1명의 보좌관 뿐이었다.허주는 봄햇살을 받아 싹을 풀어올리는 나뭇가지를 붉은 눈시울로 응시하고 있었다.
“ 김군, 세상이 너무 무정하군 글쎄. 사람들이 오질 않아. 돈도 없고, 어떻게 총선을 치러내야 할지 고민일세. 부탁함세. ”
허주와의 만남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로부터 허주의 동생, 김의원을 처음 만난 것은 2003년 가을이었다. 그날, (주)금오피엔비 화학 사장의 직분으로 기자와 만난 김의원은 떨리는 가을잎이 유난히도 짓붉은 금오산을 올려다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며칠 전에 형님(허주)을 뵙고 미국엘 다녀왔습니다. 많이 편챦으신 것 같습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형님으로부터 국회의원을 나가도 좋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승낙을 하고 나서 한국에 있는 많은 정치 지인들에게 직접 전화를 하시면서 동생을 도와 달라고 부탁을 하는 형님 앞에서 저는 깊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당시 형님은 나를 위해 정치를 하지 말고, 나라와 민족, 지역을 위해 정치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천을 받지 못하면 총선에 나서지 말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결국 김의원은 당시 허주를 따르던 박희태 전 의원등의 후원에 힘입어 17대 구미을 총선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했고,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하지만, 2004년 당선증을 받아든 김태환 의원의 심중에는 세상 멀리 빈배로 떠난 형, 허주의 그리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16대 총선에서 패한 허주는 그로부터 2년 후인 2002년, 이회창과 화해를 했지만, 이 총재에겐 대선패배라는 악몽이, 허주에겐 소외 이회창 암이라는 창암(신장암)이 생명을 엄습해 들어오고 있었다. 결국 그 무렵 허주는 쓰라려오는 가슴과 몸을 세월의 벼랑 끝에 싣고 태평양을 건넜고, 2003년 12월, 이역만리 미국 땅에서 세상과 별리해야 했다.
사는 일이란 설상가상, 금상첨화만이 아니었다.
형 허주와의 별리의 아픔을 쓸어안은 김태환 의원의 17대 국회의원 선거 승리는 김대중, 조병옥 가문과 함께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부자(아버지와 두 아들) 3명이 국회의원을 탄생시키는 기록을 남기게 했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 굴곡의 정치사
김태환의원의 초선 4년은 그러나 순탄치가 않았다. 개인적으로도 그랬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정치적인 상황도 그랬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대표의 대표시절, 수석 사무부총장의 직으로 당시 박 근혜 전 대표와 인연을 맺은 김의원은 2007년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과정에서 박 전 대표의 손을 들었고, 그 여파로 한나라당 공천 심사위원회는 2008년 3월. 김의원의 손에 낙천장을 쥐게 했다.
그해 3월초 동병상련의 대구 출신 이해봉의원과 하행선 막 열차에 몸을 싣고 고향 구미로 내려온 김의원에게는 고행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11명의 을지역 시의원 중 5명과 2명의 도의원이 곁을 떠나면서 김 의원에게 남겨진 것은 외로움 뿐이었다.
하지만 민심은 김의원에게 흘러들었다. 전직 의장은 물론 일부 시의원, 지역유지에서부터 논두렁에서 삶을 연명해 나가는 무명의 농민까지 김의원을 지지했다. 이래서 도출된 총선 결과는 ‘무소속 김태환 후보’ 압승이었다.
세상사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행운과 불행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며, 음지와 양지가 별개로 있는 것도 아니다.
2012년 실시된 19대 총선은 18대와 사뭇 달랐다.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이끄는 친박계 주도하의 공천에서 쉽게 공천장을 따낸 김의원은 본선에서 민주노동당 여성후보를 가볍게 누르며 3선의 영예를 안았다.‘
반면 1996년 41세의 나이로 한나라당 공천을 받은 후 허주를 누르면서 등원에 성공, 탄탄대로의 길을 달려온 김성조 의원에게 2012년 19대 국회의원 선거는 비극의 구름떼를 앞세우고 달려들고 있었다. 심학봉 의원과의 경선에서 패배한 김의원은 결국 4선고지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12년 정치 인생 마감하는 김태환의원
김태환 의원 역시 김성조의원과 매한가지로 4선고지 앞에서 등을 돌려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그러나 김의원은 담담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민 여러분의 성원과 지지에 힘입어 분에 넘치게도 세 번이나 국회의원에 당선됐습니다. 여러분의 선택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결과에 승복합니다.”
권력은 영원한 소유물이 될 수 없다. 권력의 주인은 국민이다, 국민으로부터 권력이 잉태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다.김의원은 이러한 현실을 총선 하룻만인 14일, 인정하고 새로운 여생구상에 들어갔다.
총선결과에 승복한 만큼 김의원은 이제 모든 사감을 정리하고, 구미의 새로운 정치역사를 쓰게 될 장석춘 당선자가 구미를 재도약시킬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어야만 한다.
갈등의 골과 회한의 늪을 메꾼 그 광장에서 허심탄회하게 만나야 한다. 그것이 바로 국가와 민족, 국민과 구미시민을 위해 여생을 바친 매암- 허주의 정신을 계승하는 길이며, 한국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정치 명문가문의 마지막 계승자이면서 종결자로서 해야 할 몫이다.
2003년 형,허주가 마지막 남긴 유언을 다시한번 되새김해야 한다.
“나를 위해 정치를 하지 말고, 나라와 민족, 지역을 위한 정치를 해다오.”
恩義廣施(은의광시)요 人生何處不相逢(인생하처 불상봉)이다.
경행록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은혜와 의를 널리 베풀라, 살다보면 언젠가 다시 만나지 않겠는가”
언젠가 만나도 얼싸안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럴러면 태평양도 끌어안을 수 있는 가슴을 지녀야 한다. 이것이 국가와 민족, 지역을 위해 살라던 형, 허주의 유지를 받드는 길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