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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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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영원한 존재는 없다. 오래 살아야 인생 백년이거늘 권력인들 얼마를 누리겠는가.
4년마다 엇갈리는 희비 속에서 20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결국 새로운 주역들이 부상하면서 제3기 구미 현대정치 시대를 개막했다. 그 중심에 국방부 차관 출신의 백승주 당선인과 한국노총 위원장 출신의 장석춘 당선인이 자리를 잡았다. 농민 가문 출신인 이들이 태생적 본질인 사회적, 경제적 약자를 아우르는 정치력을 발휘할 경우 기존의 정치권과 변별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또 다른 관전포인트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이 바로 3기 구미현대 정치 시대의 특징이면서 장점이다. 반면 국가공단 도시인 구미의 재도약을 위해 ‘주춤 상태’에 놓여 있는 구미공단에 동력을 불어넣는 것은 직면한 최대의 과제이며, 두인사에게 주어진 책무다.
이들 두 초선의원이 중앙무대에서 어떤 묘수를 놓고, 또 얼마나 실효성 있는 정치력 발휘를 통해 구미공단에 힘을 불어넣을 지는 두고두고 지켜보아야 할 관전포인트가 아닐 수 없다. 특히 KTX 접근성 강화를 얼마나 빨리 현실화시킬지는 최대의 관건이다.
제1기 구미현대 정치는 김윤환, 박세직, 박재홍 의원 등 3인 거두정치 체제로 유지돼 왔던 2000년 이전 시기로 본다.
또 제2기 구미현대 정치는 1명이 정수인 2000년 16대 총선을 통해 등장한 김성조 의원, 갑을구가 분구된 가운데 실시한 2004년 17대 총선을 통해 등장한 김태환 의원, 2012년 19대 총선에서 김성조 의원을 누르고 등장한 심학봉 의원 체제로 유지돼 온 2000년 상반기부터 2015년 상반기 까지를 그 기간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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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승주 당선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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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석춘 당선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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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구미정치인들 무엇을 했나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별세하기까지 1,2공단은 준공됐다. 하지만 1979년 반도체와 컴퓨터 등 첨단산업의 지속적인 육성과 늘어나는 공장용지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추가적인 공단의 건설이 불가피 하게 된데 힘입어 1979년 11월,실시계획을 고시했으나 준공된 것은 1995년 9월이었다. 박 대통령의 별세와 이후 진행된 역사의 격변기 속에서도 3공단을 준공시킬 수 있었던 데는 김윤환, 박세직, 박준홍 의원의 노력이 주효했기 때문이었다.
4공단 태생의 발판을 마련한 것 역시 1기 시대의 박세직 의원이었다.
1998 국민회의 정부 당시, 구미는 혼돈이었다. OB 맥주 공장이 광주로 이전되는 것을 시작으로 공동화의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1996년 9월 30일 3공단 조성을 끝으로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던 당시 구미시민들의 절실한 소원은 4공단 조성이었다, 그러나 기존 공단이 공동화되는 상황에서 4공단 조성 착공은 엄두조차 낼수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4공단 조성계획은 잡혀 있었으나, 수자원 공사는 정부차원의 획기적인 재정지원이 없으면, 자력으로 4공단 조성은 엄두조차 낼수 없다고 공언하고 있었다.
이처럼 구미공단 상황이 악화일로로 치달으면서 결국 구미는 <구미경제 살리기 비상대책위>를 구성, 가동시키기에 이르렀다.
이 위기를 극복하는 중심에 박세직 의원이 있었다. 자민련 부총재였던 박 전의원은 당시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김대중 대통령의 핫라인을 구미 4공단 착공에 시의 적절하게 활용했다.
자민련에 입당한 박 의원은 4공단 조성에 정치의 명운을 걸다시피 했다. 특히 박의원은 4공단 착공식 당일 대구에 내려와 있던 김대중 대통령을 구미4공단 착공식에 참석시키는 기지를 발휘했다.
4공단 착공식 당일 김대중 대통령은 대구 행사를 마치고 귀경할 예정이었다.그러나 박 세직 의원은 대통령 비서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종필 총재 핫라인을 활용, 예정에 없던 대통령의 4공단 착공식 참석이라는 역사를 쓴 것이다.
김윤환 의원은 도농 통합에 따른 지역적 이질감을 해소하기 위해 구포-생곡간 강변우회도로를 국가정책의 중장기 계획에 포함시켰고, 바톤을 이어받은 김태환 의원은 이를 단기 계획으로 전환시켰다. 이 결과 강변우회도로는 내년 말 준공된다. 허주는 또 강동방향으로 무게가 쏠린 개발축을 선산, 고아축으로 전환시키는데도 기여했다는 평을 받았다.
구미 5공단을 태생시키는데는 김관용 지사, 남유진 시장, 김태환▪김성조 의원의 노력이 주효했다. 이를 계기로 2008년 3월 경상북도지사의 건의에 따라 그해 4월 타당성 검토 의뢰 후 2009년 9월 산업단지계획 승인이 고시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구미정치가 사상 최대의 부실성적을 낸 것은 2000년대 초반이었다. 엘지 디스플레이 파주 이전을 막지 못했는가 하면 KTX 역사는 물론 혁신도시까지 김천에 내주어야 했다. 심지어 물류센터까지 칠곡에 내 주어야 했다. 구미공단이나 구미로서는 최대의 악재를 불러들인 시기였다.
더군다나 80%의 채무를 떠안고 출범한 원예수출공사는 146억8천만원의 채무에다 매년 수십억원에 이르는 적자를 혈세로 메꾸다가 결국 문을 닫아야 했다.
특히 구미시민들이 해평에 유치를 갈망했던 경북도청 이전의 꿈마저 날려야 했다. 훗날 역사가 어떤 채찍을 내릴지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희비 엇갈린 구미현대 정치사, 거두 정치에 도전한 신예들
2000년 이전의 구미현대 정치사는 김윤환, 박세직, 박재홍 의원의 3인 거두정치 체제로 유지돼 왔다. 13대 총선이 있던 1988년까지 구미는 구미, 선산, 군위, 칠곡을 포함하는 대선거구 체제였다. 따라서 구미단일 정치권을 구성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14대 총선이 실시된 1992년부터 구미는 단일선거구 구도 하에서 순수한 구미 정치인을 배출해왔다.
3인 거두정치에 가장 먼저 도전한 신예정치인은 윤상규 민중당 후보였다. 구미단일 선거구로 14대 총선이 실시된 1992년 30세였던 윤상규 씨는 총 투표자 수 8만 23234표 중 5만 9098표를 획득한 민자당 박세직 후보와 맞서 2만 1974표를 획득하면서 세상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어 1996년 구미, 선산구로 나뉘어 실시된 15대 총선에서도 윤상규씨는 신한국당 박세직 후보에게 재도전을 했다. 하지만 3만415표를 얻은 박 후보에 비해 5천 222표를 얻은 윤상규 씨는 분루를 삼켜야 했고, 정치세계에 대한 관심을 접기 시작했다.
윤상규 씨에 이어 3인 거두정치에 도전한 이가 바로 지금의 형곡새마을 금고 김철호 이사장과 신한국당 김윤환 의원에 맞선 최종두 씨였다.
1996년 15대 구미시 총선에서 41세의 어린 나이로 박세직 의원에 맞선 김철호 이사장은 분루를 삼켰다. 이어 2000년 구미단일 선거구로 치러진 16대 총선에서도 한나라당 김성조, 민국당 김윤환 의원과 맞섰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김 이사장은 정치에 뜻을 접고 형곡새마을 금고 이사장으로서 금융분야에서 성공역사를 쓰고 있다.
정치거목 김윤환의원에게 처음으로 도전장을 낸 이는 바로 최종두 신림종합 건설 명예회장이었다. 1996년 실시한 15대 선거에서 3만7306표를 얻은 신한국당 김윤환 의원과 맞선 최 회장은 자민련 후보로 나서 2만4101표를 획득하면서 화제를 낳기도 했다. 표차는 예상을 뒤엎은 1만 3205표차에 불과했다.
이어 최종두 씨는 2000년 구미단일 선거구로 실시된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김성조, 민국당 김윤환 의원에게 도전장을 냈으나 5만957표를 획득한 한나라당 김성조, 3만 9207표를 획득한 김윤환의원에 이어 세 번째인 1만 3927포를 얻으면서 분루를 삼켰고, 이후 최회장은 애지중지하던 도개학원을 청산하고 구미를 떠나야 했다.
이외에도 구미현대 정치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은 많다. 이강웅 전 포항부시장은 1998년 구미시장 선거에 출마해 낙선했다. 이어 2000년 16대 총선에서도 무소속으로 출했으나 5천 719표를 얻고 낙선한 후 정계를 떠났다.
이규건 전 감사원 과장은 2002년 한나라당 구미시장 공천을 위한 경선에서 김관용 당시 시장에 맞섰으나 낙천한 후 17대 총선이 실시된 2004년 구미을 선거구에서 한나라당 김태환 후보, 열린우리당 추병직 후보와 무소속 후보로 맞섰으나 3천193표를 얻는데 그쳐야 했다. 이후 이 규건씨는 전문분야인 정보사업으로 귀향했다.
▶김성조, 김태환 의원에 도전한 인물들은?
▷김성조 국회의원
김윤환, 박세직, 박재홍 전 국회의원으로 상징되는 구미3인 거두정치를 마감한 최초의 인물은 김성조의원이었다. 2000년 실시된 16대 총선은 구미단일선거구로 실시됐다. 당시 선거에서 박세직의원은 장고 끝에 불출마를 선언했다.
하지만 이회창을 입당시켜 그를 킹으로 만들려던 김윤환 전 의원은 하룻밤 사이에 이뤄진 공천자 지명과정에서 낙천했고, 극렬히 반발하면서 창당한 민국당 후보로 출마했다. 이에 맞선 이가 바로 당시 경북도의회 상임위원장을 맡고 있던 41세의 김성조 국회의원이었다. 정치 혁신을 기치로 내건 당시 이회창 총재의 한나라당 체제 하에서 후보가 된 김성조의원은 김윤환 국회의원과 두차례에 걸쳐 김윤환 의원에게 정치 도전장을 낸 최종두 신림종합 건설 명예회장을 누르면서 당선됐다. 구미현대 정치사가 새로운 길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이후 김의원의 정치사는 탄탄대로였다. 그러나 그에게도 정치세계의 냉혹함은 비켜가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파동으로 한나라당이 위기에 몰렸던 2004년 17대 총선에서 김성조의원은 열린우리당 조현국 후보로부터 강한 도전장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결과는 4만 2550표대 2만 281표였다. 또 당시 김의원은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사촌인 자민련 소속 박준홍 후보로부터도 도전장을 받았으나, 수월하게 극복해나갔다.
18대 총선이 실시된 2008년에는 자신의 위원장으로 있던 한나라당 구미갑 간부출신의 임경만 전시의원으로부터 도전장을 받아야 했다. 특히 당시 김의원은 한나라당 공천과정에서 절친인 현 김석호 현 친박연합 구미갑 당협위원장으로부터도 도전을 받아야 했다.
낙천한 김 석호 위원장은 본선에 출마할 경우 돕겠다는 임경만 전의원과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고 장고 끝에 불출마 결심을 했다.
혁신바람이 주도하던 2000년 이회창 체제의 한나라당 후보로 전격 발탁되면서 중앙정치 무대에 발을 담근 김의원은 2012년, 12년 전과 흡사하게 전개된 19대 총선 혁신바람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김의원의 앞에는 한때 공천권을 행사했던 전인철 전도의원과 절친관계였던 김석호 친박연합 구미갑 당협위원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의원은 또 심학봉 전 지식경제구 국장, 이병길 변호사, 채동익 정수진흥회 중앙회장 등과 함께 새누리당 공천권을 따내기 위해 사활을 걸어야 하는 현실을 맞고 있었다.
결국 김의원은 심학봉의원에게 새누리당 후보직을 내주면서 4선의 꿈을 접어야 했다.
▷김태환 국회의원
16대 총선이 실시된 2000년 형인 김윤환의원의 석패를 지켜보아야 했던 김태환 의원은 구미갑과 을구로 선거구가 분구된 2004년 17대 총선을 통해 중앙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탄핵열풍이 몰아치던 당시 선거에서 초반전에는 열린우리당 추병직 후보에게 밀렸으나 후반부로 가면서 탄력을 얻은 김의원은 3만2804표를 얻으면서 2만4314표를 얻은 추 후보를 여유있게 물리치면서 신승을 거뒀다.당시 당대표였던 박근혜 현 비상대책위원장의 선산장과 인동장 지원유세가 힘을 발휘한 것이 계기가 됐다.아울러 다시 살아난 김윤환 의원에 대한 진한 그리움도 힘을 보탰다.
이후 추 후보는 건설교통부 장관에 발탁됐고, 퇴임 이후 목표대 총장선거에서 당선됐으나 교육부로부터 불허되는 불행을 맞아야 했다.
공천파동이 있던 2008년 18대 선거에서 김의원은 최대의 정치위기를 맞아야 했다. 한나라당 구미갑 후보로 신청했던 이재순 전 구미폴리텍대 대학장을 한나라당 구미을 후보로 전략공천하면서 낙천한 김의원은 친박무소속 후보로 본선에 나서야 했다.게다가 공천권을 행사한 이정임 전 시의원 역시 도전장을 내밀던 때였다.
선거결과는 이변이었다. 3만3125표, 59.8%의 득표율을 보인 김의원은 1만6245표, 29.3%의 득표울에 그친 이재순 후보를 여유있게 따돌리면서 재선 입성에 성공했다.
이재순 후보는 석패 후 2010년 제6대 지방선거에서 동작구청장 한나라당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한나라당에 복당한 김의원의 정치사가 탄탄대로였던 것만은 아니다. 2008년 10월 실시된 구미을구 도의원 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무소속 후보에게 패배한데 이어 2010년 실시된 6대 지방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가 같은 선거구 선거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김의원은 또 2002년 한국미래연합의 구미시지구당 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한나라당에 입당한 김연호 변호사로부터 17대, 18대 총선에 이어 19대에서도 도전을 받았다. 결국 수월하게 공천권을 따낸 김의원은 본선에서 승리하면서 3선의원이 됐다.
하지만 그로부터 4년 후인 2016년 4월 13일 실시된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김의원은 두 번에 걸친 낙천의 분루를 삼키면서 무소속 후보로 나섰으나, 새누리당 장석춘 후보에게 3천3백여표차로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한편 심학봉 의원은 공직선거법 위반이라는 굴레에서 무혐의로 벗어나 구미1공단 혁신, 구미복합역사 정상화, 삼진센츄리 타워 철거, 북구미 IC 설치, KTX 신구미역사 추진등 구미지역 현안해결에 앞장섰으나, 성추문과 뇌물수수 논란에 휩싸이면서 지난 해 10월,국회를 떠나야 했다.
■구미가 배출한 국회의원들은 ?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부터 2016년 4월, 20대 총선이 있기까지 68년 동안 구미가 배출한 국회의원은 총 17명에 이른다.
▷1,2대
육홍균 의원이 탄생됐다. 옥성면 출신의 육의원은 1900년 10월 1일 선산 옥성에서 육병형(陸炳亨)과 예천 임씨의 독자로 태어났다.수원고등 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 대학 문과에 입학했다.
1922년 무정부주의를 표방한 비밀결사 흑우회에 가입해 회지 〈흑우(黑友)와 소작농〉의 발간을 주도했다. 1923년에는 박열, 김중한 등과 함께 불령사를 조직했다가 그 혐의로 체포돼 투옥되기도 했다. 출옥 후 1926년 10월에 흑우회가 흑색청년연맹으로 이름을 바꾼 뒤에도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1927년 고향으로 돌아와 협동조합 ‘우리 살림사’를 조직하고, 이어 옥성 농우회(玉城農友會)를 통해 지역 농민운동을 이끌었다. 1939년 4월 검거돼 다시 1년 3개월간 투옥됐고, 출옥후 중국으로 떠났다가 해방 후 귀국했다. 해방 후 대한독립촉성 국민위원회 선산군지부장에 취임했다. 1983년 7월 5일에 향년 84세로 별세했다.
▷3,4대
김우동 국회의원이 탄생했다. 김 덕 전 안기부장의 선친이다.
4대에서는 민의원으로 김윤환 전의원과 김태환 현 의원의 선친인 김동석 국회의원이 탄생했다.
▷5대
신준원 국회의원이 탄생했다.
▷제6-8대
김봉환 국회의원
▷9대-12대
신현확, 김창환, 김현규, 박재홍 국회의원이 탄생했다. 이 기간 중 김윤환 의원은 10대 유정회, 11대 전국구로 당선됐다.
▷13-14대
박세직, 김윤환 의원, 14대에는 박재홍 의원이 비례로 진출했으며, 15대에서는 역시 박세직, 김윤환 국회의원이 당선됐다.
▷16대
김성조 의원
▷17대-18대
김성조, 김태환 국회의원이 탄생했다.18대에도 김성조,김태환 국회의원이 바톤을 이어갔으다.
▷ 19대
3선의 김태환 의원과 초선의 심학봉 의원이 탄생했다.
▷20대
백승주, 장석춘 당선자가 초선의원으로 명함을 새겼다.
비례대표와 유정회, 지역구를 포함해 김윤환 국회의원은 5선, 박재홍 국회의원은 4선, 김현규 , 김성조, 김태환 국회의원은 3선, 육홍균, 김우동, 신현확, 박세직 국회의원은 2선, 김동석, 신준원,심학봉 국회의원은 1선으로 정치사에 기록을 남겼다.
1978년 구미읍이 구미시로 승격되기 이전까지인 제 9대까지는 선산군 일원에서 국회의원을 배출시켰고, 제10대인 1979년 이후부터는 구미시와 선산군이 각각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1995년 구미시와 선산군 통합 이후인 제15대 총선부터는 구미갑,을 선거구로 분리해 별도로 국회의원을 배출시켰고, 제16대 총선에서는 구미시에서 1명만을 배출해오다 제17대 총선부터는 갑, 을 선거구로 분리해 2명의 국회의원을 배출시키고 있다.
구미가 배출한 13명의 국회의원 중에는 눈길을 끄는 인물과 함께 몇 가지의 관전 포인트가 있다.
제헌의회 육홍균 국회의원은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날렸다. 김동석-김윤환-김태환 국회의원은 부자 3명이 국회의원에 당선된 경우다. 김대중, 조병옥 가문과 더불어 부자 국회의원 3명을 배출한 정치가문으로 평가된다. 조병옥 전 내무장관과 함께 민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발을 들여 놓은 오상재단 이사장이었던 김의원은 일제시절인 1926년 정치안전 유지법 위반으로 3년의 징역형을 살기도 했다. .
김우동 국회의원은 김 덕 전 안기부장의 선친이다. 또 김현규 국회의원은 민국당 최고위원을 지냈고, 박재홍 국회의원은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이며,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의 사촌 처남이다. 신현확 국회의원은 국무총리를 지냈으며, 2007년 타계했다. 킹메이커로 잘 알려진 김윤환 국회의원은 김동석 국회의원의 아들이며, 김태환 국회의원의 친형이다.2003년 타계했다.
박세직 국회의원은 88 올림픽 조직위원장을 지냈고, 재향군인회 회장으로 재직하던 2009년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