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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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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산업이 하나의 대기업을 유치하는 것 이상의 부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외국의 도시들은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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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랑 장택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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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로 프랑크 푸르트는 괴테의 생가를 토대로 관광산업의 붐을 일으키면서 한 도시가 먹고사는 먹거리를 창출하고 있다. 또 문화유산이 전무하다시피 한 미국 뉴욕은 로마나 파리처럼 역사적으로 유명한 도시도 아니고, 스위스처럼 빼어난 자연환경으로 관광객을 끌어들일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곳이 아니지만 문화유산을 개발하고, 이를 포장해 상품화함으로써 4천만명의 내국인과 1천만명 이상의 외국인이 찾는 세계적 관광지로 명성을 높이고 있다.
최근들어 전국의 지자체들도 이러한 세계적인 추세에 부응, 관광산업을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 주목하면서 다양한 역사유물을 활용한 부가가치 창출에 올인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 여파가 구미로 밀려들고 있다.
이를 계기로 공단도시이면서 역사인물, 문화유산의 집성지로서의 풍부한 조건을 두루 갖춘 구미를 굴뚝산업과 굴뚝없는 산업을 상호 조화시킴으로써 미래 먹거리를 창출토록 해야 한다는 여론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일단, 구미시의 대응은 긍정적이다. 문화예술담당관실을 문화관광과로 명칭을 바꾸는 등 관광산업에 행정력의 무게를 두겠다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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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뒤질 것이 없는 역사인물의 삼각벨트
- 창랑 장택상 고택(생가) 구미시가 매입 나서야
구미시 상모사곡동, 임오동 지역은 역사 인물의 삼각벨트를 형성하고 있는 곳이다. 상모사곡동에는 근대산업화의 상징인 박정희 대통령 생가가 있고, 인접한 임오동에는 광복운동의 상징인 왕산 허위선생 기념관이 있으며, 또 이곳에는 근대한국정치의 상징인 창랑 장택상 고택(생가)이 있다.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상징적인 ‘역사인물 삼각벨트’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관광산업으로 융합 발전시킬 경우 막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 생가와 왕산 허위 선생과 관련된 사업은 구미시 차원에서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는 반면 초대 외무부 장관이면서 총리인 창랑 장택상은 아웃서이더에 놓여 있는 실정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이 때문에 개인 소유로 돼 있는 창랑의 고택(생가)을 시가 매입해 역사인물의 삼각벨트로 활용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더군다나 창랑의 고택은 역사적 상징성에다 건축된지 90여년이 된 한옥형 고택이라는 점 때문에 더 큰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전국의 각 지자체가 고택을 보수해 ‘한옥 상품화’에 올인하고 있다는 시류에 비추어도 더 이상 간과해선 안될 과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7대 의회들어 의원들이 장택상 고택(생가)을 매입, 시차원에서 관리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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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여정의 창랑 장택상 고택(생가)
1997년 4월21일자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20년 전(2016년 기준 40년 전)창랑의 아들이 당시 1천만원이 채 안되는 값으로 처분한 고택은 몇 사람의 손을 거쳐 1987년부터는 남화사로 바뀌었고, 사찰측은 1990년 중반 새절을 지어 떠날 계획으로 집을 내놓았다.
1995년, 94년전(2016년 기준) 전통한옥으로 지어진 고택을 10억원에 팔기로 하자, 미국에 있는 딸이 이 집을 찾아 다시 사들이려다 돈이 안돼 눈물만 떨구고 돌아섰다. 이후 고택은 개인에게 넘겨졌고, 그 개인으로부터 다시 고택을 매입한 또 다른 개인은 현재 음식점업을 하고 있다.
업주 A씨는 “구미시가 매입하겠다면 흔쾌히 응할 의사가 있다”면서 “유서깊은 역사의 현장과 고택을 구미시 차원에서 보존해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으로 계승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창랑 고택, 역사가옥 프로젝트로도 적격
전국 지자체는 역사 한옥 프로젝트 추진을 통한 관광산업에 올인하고 있다. 서울시는 역사가옥 프로젝트를, 대구시는 한옥을 활용한 골목투어, 경북은 경북형 한옥 시범 건립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서울시는 도심지에 흩어져 있는 가옥을 개발해 거점별 관광메카로 삼는다는 계획을 수립한 이후 1930년대 과도기의 한옥 면모를 갖추었으나 방치되어 온 홍건익 가옥, 이태준 고택, 3.1운동을 첫 외신 보도한 미국인 기자 엘버트 테일러가 살았던 딜쿠샤, 배렴가옥 등도 복원해 일반에게 개방한다는 계획이다.
도심의 노후 한옥들의 새로운 변신을 목표로 한옥 지원사업에 나선 대구시는 또 한옥 관광형 골목투어가 인기를 끌자, 고택 복원과 함께 한옥을 신축, 개축할 경우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에 뒤질세라 경북도 역시 한옥 시범 건립사업 추진과 함께 문화재 가치가 있고, 건립된 지 70년 이상된 고택에 대해 예산을 들여 세계적인 숙박 브랜드로 만들 계획이다.
각 지자체는 역사적으로 가치가 높은 고택 매입에도 나서고 있다. 서울시는 1930년대 과도기의 면모를 볼 수 있는 보기드문 관광자원이었으나 방치되어 온 홍건익 가옥을 매입, 복원해 일반인에게 개방할 예정으로 있으며, 2016년 홍성군은 고택 활용의 극대화를 위해 홍성 엄찬 고택을 매입했다. 또 아산시는 후손의 빚으로 금융권에 저당이 잡혀 경매가 진행 중인 아산 외암리 민속마을의 건재고택 매입을 추진 중에 있다.
대구시와 이상화 기념사업회는 이상화 시인이 말년에 머물던 중구의 단층 목조건물 두채를 매입, 보수와 함께 내부 전시물 설치를 완료하고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있고,부여군은 조선시대 4명의 왕비를 배출한 여홍민씨 집안의 조선후기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인 백제관을 매입한데 이어 보수를 마치고, 한옥 생활 체험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처럼 각 지자체는 고택을 매입, 보수한 후 각종 체험공간과 전시관을 조성해 당시의 역사를 후손과 관광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행정력을 올인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의 흔적도 남아 있는 90년 역사의 창랑고택
이런 점에 비추어 건축된 지 90년 된 창랑 장택상 고택(생가)을 구미시가 매입하고 여기에다 역사적 향기를 입힐 경우 부가가치를 제고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창랑 고택은 김영삼 대통령의 흔적이 살아 있다는 또 다른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어 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1947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한 김 대통령은 당시 정부수립 전국 웅변대회에서 2등을 했다. 웅변에 감탄한 장택상은 김대통령을 측근으로 삼고, 그 무렵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 운동을 위해 임오동으로 함께 내려왔다.
1997년 4월 21일자 중앙일보는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 장택상 비서로 정치에 입문한 김영삼 대통령이 선거시절에 고택을 자주 드나들었다. 부근에 살고 있는 창랑의 조카 며느리 이원규(당시 81세)할머니는 ‘김대통령이 비서로 일할 때는 내가 와이셔츠도 다려주고, 음식도 해 주었다’며 ‘ 그 인연으로 지금도 대통령과 스스럼없이 전화를 한다’고 말했다. ‘한보사건이 터진 이후 ' 우째 정치를 그리 하노'하고 물었더니'미안합니더…'란 말뿐입디다.’는 것이 李씨의 전언이다.”
이후 6.25전쟁 당시 학도 의용군으로 북무한 김영삼 대통령은 1951년 장택상 국무총리의 인사담당 비서로 일했고, 1953년 9월, 창랑이 국무총리를 사퇴하자, 김 대통령은 자신의 고향 거제에서 자유당 후보로 나서 당선됐다. 25세의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후에도 창랑과 인연의 끊을 놓지 않은 김대통령은 임오동 고택을 종종 드나들었다고 한다.
▷창랑 장택상은 누구인가?
옛날부터 인물이 많기로 유명한 구미(선산)에는 현대에 들어서도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물론이요, 김윤환, 박세직 전의원도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창랑 장택상(1893년-1969년) 전 국무총리도 구미가 탄생시킨 출중한 인물에 속한다.
이승만 정권 당시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 총리의 고향이 바로 구미시 오태동이요, 오태동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을 낳은 상모동과 이웃해 있다.
창랑의 부친인 인동 장씨의 장승원(1852년-1917년)은 당시 3대부자로 구미로 편입되기 이전인 칠곡의 갑부로 유명했다. 그 갑부의 흔적이 지금도 생가의 형태를 통해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창랑은 박정희 대통령과 이웃이면서도 서로 다른 길을 갔다. 영국 에든버러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해 정구회 회장으로 있다가 광복을 맞자, 수도경찰청장과 제1관구 경찰청장에 취임했다. 이어 1948년 정부수립과 동시에 초대 외무부 장관에 취임했으며, 1950년 고향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그해 민의원 부의장에 선출됐다. 1952년에는 국무총리에 기용됐다. 이후 1958년 제4대에 이어 1960년 제5대 민의원에 당선됐으나, 5.16으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다. 이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창당한 공화당 후보와 6대선거에서 겨뤘으나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창랑은 공화당과 늘 대립각을 세워온 신민당 고문을 지내기도 했다. 정치의 격동기 속에서 신민당 고문을 지내게 된 이유도 김영삼 전대통령의 영향이 컸다.
1969년 세상을 떠난 창랑이 다시 세상에 회자된 것은 2006년 KBS가 드라마 <서울 1945>를 방영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아이는 99%, 엄마의 노력으로 완성된다”는 책으로 잘 알려진 창랑의 셋째딸인 장병혜 박사가 “아버지를 여운형 암살사건의 배후인 것처럼 묘사해 명예를 훼손했다.”며 KBS를 상대로 1억여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던 것.
결국 기각되기는 했지만 이 과정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을 통해 “사형당할 김대중 전대통령을 자신의 아버지가 살렸다.”고 말해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