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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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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초의(草衣)스님이 김정희에게『제주화북진도』를 그려주며 화제(畵題)를 쓴 그림이다. 그는 조선 후기 승려로, 일지암(一枝庵)에서 40여 년 동안 홀로 지관(止觀)에 전념하면서 불이선(不二禪)의 오의(奧義)를 찾아 정진하였으며, 그가 절친했던 김정희를 위로하기 위해 1843년에 제주도 유배지에서 6개월 동안 머물렀다. 훗날 그는 김정희의 죽음을 애도하여 완당김공제문을 지었다. 수행과 학문, 예술을 두루 섭렵했던 대선사이다.
이 그림은 김정희가 김홍근(金弘根)의 탄핵으로 이미 돌아가신 부친 김노경(金魯敬)의 벼슬이 모두 삭탈되는 참화를 입었다. 그는 예산으로 몸을 피했지만 한양으로 끌려 와 추국을 당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정희를 도운 이는 조인영(趙寅永)이다. 그는 김정희의 무고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려 김정희의 목숨을 구했지만 제주도로 위리안치되는 횡액을 막을 수는 없었다. 유배 길에 오른 김정희를 그가 일지암에 도착한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초췌하고 참담한 몰골로 일지암을 찾았던 그를 따뜻하게 맞았던 초의는 일지암에서 산차(山茶)를 앞에 두고 펼쳤던 이들의 충심어린 담론(談論)은 필부(匹夫)의 망언(妄言)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다음날 완도의 이진나루에서 김정희와 전별할 때 초의는 성심어린 기원을 담아 그린 것으로, 초의의 상상에서 나온 작품이다.
▶김정희에게『제주화북진도』를 그려주며 화제를 씀
1840년 9월 20일 막 해가 저문 후에, 김정희가 일지암의 내 처소에 들러 머무르셨다. 공은 9월 2일 한성을 떠나 늦게 해남에 도착하셨는데, 앞서서 공은 영어(囹圄)의 몸으로, 죄 없이 태장을 맞아 몸에 참혹한 형을 입어 안색이 초췌하였다. 이런 중에 '제주 화북진에 정배한다.' 는 명을 받아서, 길을 나선 틈에 잠깐 일지암에 도착한 것이다. 평시에 공은 나와 더불어 신의가 중후하여 서로 사모하고 경애하는 도리를 잊지 않았는데, 갑자기 지나는 길에 머물게 되니, 불행 중에 다행한 일이다. 산차(山茶)를 들며 밤이 새도록 세상 돌아가는 형세와 달마대사의 관심론(觀心論)과 혈맥론(血脈論)을 담론함에 앞뒤로 모든 뜻을 통달하여 빠짐없이 금방금방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몸에 형벌의 상처를 입었으나 매번 임금 은혜의 지중함을 칭송하고 백성들이 처하고 있는 괴로움을 자신의 괴로움인 양, 중히 여기니 참으로 군자라고 할 만하다. 하늘은 어찌하여 군자를 보호하지 않고, 땅은 어찌하여 크나큰 선비의 뜻을 길러주지 않아, 이처럼 곤경에 떨어지게 하여 기회를 빼앗아 버리는가. 탄식하고 또 탄식할만한 일이로다. 이튿날 공은 적소로 떠남에 공의 원망스러운 귀양살이에 눈물 흘리며, 비로소 제주화북진도 한 폭을 그려 나의 충정을 표하는 바이다. 1840년 9월 23일 초의 의순(草衣意恂)은 낙관(落款)하지 않고 합장(合掌)하고서 그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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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의의『제주화북진도(濟州華北津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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