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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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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차 3▪1절을 맞아 구미시 동락공원에서 한국 독립운동의 거두 창여 장진홍 선생의 추념행사가 진행됐다.
창여의 높은 뜻을 기리는 추념행사에는 유족으로 장상철 손자를 비롯 김중권 구미부시장, 강동지역 인동▪양포▪진미동 동장과 윤종호 구미시의회 산업건설 위원장, 각 기관 및 단체장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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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념식은 장상철 손자, 김중권 부시장, 윤종호 산업건설위원장 및 각 기관 단체장의 헌화에 이어 추념식 순으로 진행됐다.
한편 장 선생은 1927년 8월 폭탄 2개를 시험용으로 제작, 칠곡과 선산 경계에 있는 봉화산에서 성능실험을 하고 1927년 10월 거사용 폭탄 4개와 자살용 폭탄1개를 제조, 경북도청, 경북경찰부, 조선은행 대구지점, 신산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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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 부시장, 우 장상철 손자(유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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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10월 18일 오전 9시경 대구 덕흥여관에서 폭탄에 점화 후 포장을 해 여관 종업원인 박노선에게 목표지점 4개 처에 송달을 부탁했다.같은 날 오전 11시 50분경 폭발, 은행원과 일제 경찰 등 5명이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며, 은행창문 70여 짝이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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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의사는 이후 선산군 해평면으로 피신하여 안동과 영천에서 재차 거사를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1929년 2월 13일 체포된 그는 조선인 경관들에게 “조선민족의 피를 받은 자로서 일제 경찰의 주구가 되어 동족의 해방운동을 이다지도 방해하는 악질 조선인 경관의 죄상이야말로 나의 죽은 혼이라도 용서할 수 없다”고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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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반년 만에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고, 결국 사형이 확정되었다. 1930년 그는 11시경 자결했다. 정부는 1962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서 일주 총괄취재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