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구미출신 운파 최관호 선생
경북문화신문 기자 / gminews@hanmail.net 입력 : 2017년 04월 10일
김종길 구미 선산지역 근현대사 연구모임 대표
운파(雲坡) 최관호(崔觀浩, 1905~1946)선생의 서거 70주년을 맞아 지난 8일 10시 30분 추모제가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쌍암고택 근처에서 운파 최관호 선생 추모사업회와 해평면 노인회, 해평리 노인회, 전주 최씨 인재공파 해평문중이 주최한 가운데 열렸다. ■운파 최관호 선생은?
최관호 선생의 생애에 대한 자료는 지극히 소략하다. 동아일보에 실린 몇 개의 신문기사와 편지 몇 장, 사진 하나, ‘일제하 대구의 언론연구’와 ‘폭풍의 10월’에 그와 관련된 내용이 있을 뿐이다. 이들 자료 외에 족보에 실린 간략한 활동내용과 선생의 서거 후 그를 잘 아는 지인이 작성한 묘비문이 있어, 그의 생애에 대한 개괄적인 모습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최관호의 경력은 주로 묘비문과 다른 자료를 참조하여 작성된 것이다. 관련 자료는 소략하지만 최관호의 삶과 죽음은 다음 몇 가지 측면에서 결코 만만치 않은 무게를 지니고 있다. 1. 운파선생의 언론계 활동 운파 최관호는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이역만리 하얼빈에서 ‘만몽일보(滿蒙日報)’를 발간하면서 신문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람은 대단히 많다. 그러나 사재를 들여 합법신문을 발간하고 그것을 독립운동의 유력한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최관호의 시도는 독창적이고 신선하다. 독립운동 진영에서 많은 신문이 발간되었다. 대부분은 단체의 기관지 성격이었고, 일부는 유력한 재정후원자의 지원을 받아서 신문을 발간하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일부 합법신문은 일제의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최관호 처럼 독립운동에 대한 지향을 분명히 하면서 순전히 개인의 재정으로 신문을 운영한 경우는 매우 특수한 사례에 속하고, 거의 유일하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최관호가 신문에 관심을 가진 시기는 약관 20대 초반으로 보인다. 경술국치 이후 한글로 발간되는 신문은 친일어용신문인 매일신보(每日申報)가 유일하였으나 일본어 신문은 경향 각지에서 발간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20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발간에 이어 1924년에는 시대일보가 창간되었다. 이렇게 한글신문이 발간되자 대구 경북에서도 선구적인 지도자들이 지국을 운영하거나 기자(記者)가 되어 신문경영에 참가하면서, 신문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은 지식사회에 날로 증폭되었다. 이러한 시대의 진전을 보면서 청년 최관호 또한 자연스레 신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결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유림의 영향력이 강해서 ‘완고 영남’이라 불릴 정도로 지극히 보수적인 영남의 벽촌(僻村)인 선산에서 명문의 후예로 태어난 최관호가 젊은 시절에 신문에 지극한 관심을 가지게 된 이면에는 남다른 계기가 있었다. 한창 감수성이 강한 10대 중반, 그는 신문을 매개로 매우 특별한 경험을 하였다. 1919년이 저물어 가는 어느 날, 최관호는 이웃 마을의 친구 김동석(金東碩, 1903~1966)과 함께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3.1운동을 주동하고 피신차 전국을 떠돌던 박서몽(朴曙蒙)과 조우(遭遇)하였다. 세 사람은 꽤 흉금이 통했던 모양으로 박서몽은 몇 달간 장천에 머물다가 떠나갔고, 3.1운동이라는 특별한 시기에 이루어진 짜릿한 만남은 그 후에도 편지를 통하여 계속 이어졌다. 특히 박서몽은 시(詩)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던 모양으로, 1921년 6월부터 7월 사이에 그는 동아일보에 몇 편의 시를 발표했다. 친구의 시를 신문을 통해 읽으면서 최관호는 신문이 지닌 묘한 매력을 느꼈고, 그것은 자연스레 신문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이후 최관호는 1922년 부친의 타계로 3년상을 치르는 동안 신문에 대한 자료와 서적을 구입하고 탐독하면서, 언론인으로서 자신의 미래를 확고하게 설정하였다. 이렇게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고 나자, 최관호의 인식에도 당연히 변화가 일어났다. 1924년 새해 벽두에 신문발간과 언론활동의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두고 고심을 거듭하고 있던 그의 주목을 끄는 사건이 일어났다. 1924년 1월 2일부터 6일까지 동아일보 지면에 자치운동을 주장하는 '민족적 경륜'이라는 사설이 잇달아 실렸다. 조선 최고의 문필가 이광수가 쓴 이 사설은 발표와 동시에 일파만파를 불려 일으켰고, 나라 안은 마치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소란스러워졌다. 사설의 핵심내용이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정치적 결사를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광수의 이러한 주장은 충분한 검토와 준비 끝에 나온 것으로서 당연히 김성수, 송진우, 최린을 비롯한 동아일보 경영진과 천도교 일부세력이 이를 지지하였다. 자치론은 일제의 지배를 인정하는 동시에 독립불능론에 바탕을 둔 주장이었다. 소수의 자산계급에게 권력분점의 이익을 허용하는 대신 다수 민중의 저항을 약화시키려는 일제의 민족분열정책에 부응하는 왜곡된 담론이기도 하였다. 순식간에 나라 안밖으로 비난 여론이 빗발치고 동아일보 불매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깜짝 놀란 동아일보는 이 사설의 집필자인 이광수를 퇴출시키고, 사장 송진우도 책임을 물어 물러나게 하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할 수밖에 없었다. 동아일보 불매운동의 전말을 지켜보면서 최관호는 식민지배를 직접적으로 받고 있는 국내에서 이루어지는 합법신문의 활동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또 얼마나 치명적인 한계를 갖고 있는지를 뼈저리게 절감하였다. 국외로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스믈 스믈 일어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1925년 들어, 그는 비로소 활발한 대외활동을 시작하였다. 그가 언론인으로서의 뚜렷한 목표의식을 갖추는데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왜관의 석우(石友) 채충식(蔡忠植, 1892~1980)을 만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채충식은 대구 출신이었으나, 1923년 왜관으로 옮겨 와서 청년운동에 뛰어들었고, 약목의 신상태(申相泰)와 함께 구미의 청년운동을 직접 지도함으로써 우리 지역과 깊은 관련을 맺은 인물이다. 언론인으로서도 채충식은 경북지역에서 독보적 위치에 있었다. 1923년 채충식은 조선일보 왜관지국장으로 언론활동을 시작하였다. 1926년 6월 칠곡 · 성주 · 선산의 기자들을 중심으로 삼중기우단(三中記友團)을 결성하여 최관호를 언론계에 처음으로 소개하기도 하였다. 1928년 들어, 그는 경북기자대회를 주도하면서 경북지역 청년운동의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그 해 말 중외일보의 발기인으로 창립에 관여하였고, 대구지국의 기자로 활동하는 등 대구와 경북 언론계의 대표격 인물이었다. 채충식의 소개로 알게 된 이육사(李陸史, 1904~1944)와의 교류도 최관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 그는 최관호보다 1년 앞서서 만주와 북경을 다녀온 중국 유경험자였다. 그가 중국 현지에서 가져온 생생한 정보는 최관호가 1927년 말 북경유학과 망명계획을 수립하는데 가장 신뢰할만한 참고자료가 되었으니 두 사람 사이의 인연은 그야말로 각별하였다. 이들 외에도 최관호는 성주의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과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 1947) 같은 걸출한 선배 독립운동가들과 해방 이후까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다. 최관호는 1930년대 중반 이후 대구 출입이 잦았다고 한다. 1935년 심산선생 또한 병 치료 때문에 성주에서 대구 남산동으로 이사하였다. 1930년대 후반에는 일제의 선생에 대한 감시도 다소 느슨해졌으므로 심산 선생과의 교류도 이로부터 더욱 깊어졌다.
2. 운파 선생과 대한광복회의 활동
최관호는 1920년대 초반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배들과의 교류와 지도를 통하여 한편으로는 그들의 활동을 계승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선배들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진로를 개척했다는 점에서도 매우 두드러진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적 인물들의 상당수가 국외로 망명하였다. 국내에 남아 있던 영남의 청년지도자들은 대동청년단으로 결집하였고, 이들 가운데 강경파가 대한광복회 결성을 주도하였으며, 대한광복회의 강경파가 다시 의열단 결성의 주역이 되었다. 국내외를 오가며 국권회복에 절치부심하던 이들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의열투쟁의 횃불을 높이 들었다. 대한광복회와 의열단의 활동은 자신의 생명을 던져 조선독립의 정당성과 아울러 인류평화의 대의를 천명하려는 이른바 의열투쟁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의열투쟁은 식민지 해방을 목표로 피압박 민족의 자결권과 주권을 획득하기 위한 목숨을 건 의로운 투쟁이었다. 이들은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침략의 중심부인 일제의 주요기관이나 핵심인물을 응징대상으로 삼아 때로는 일정한 성과를 내기도 하였으나 개인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뚜렷한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성공보다 실패가 많았고, 충격효과는 컸지만 실제적인 성과는 미미한 수준에 그쳤기 때문이다. 의열단은「조선혁명선언」을 통해 혁명은 민중의 직접적인 봉기에 의해서 가능하고, 의열투쟁은 이를 자극하기 위한 것이라 선언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의열투쟁이 민중의 봉기를 이끌어 내리라는 기대는 너무나 순진한 희망사항이었고, 현실은 전혀 달랐다. 의열단의 방향전환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려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구미 선산을 비롯하여 인근 칠곡 · 성주에는 유독 대한광복회의 성원들이 많은데, 이들이 바로 1920년대 초기의 지역 독립운동을 이끈 주역들이다. 위암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은 대한광복회의 초기의 발기주체였고, 왕산(旺山) 허위(許蔿) 선생의 종질인 허규(許珪, 1884~ 1957), 김정묵(金正默, 1888~1944), 이우필(李愚弼, 1890~?), 신상태(申相泰, 1889~ 1951), 이수택(李壽澤, 1891~1927), 장진홍(張鎭弘, 1895~1930), 이내성(李乃成, 1892~1927) 등이 모두 대한광복회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또한 대한광복회에서 활동하던 이수택은 1920년 의열단의 창립주체로 참여하였고, 김정묵과 이정기(李定基, 1898~ 1951) · 이육사 등이 의열단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해외로 망명하거나 만주와 시베리아를 전전하면서 국외에 독립운동의 기지를 건설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고, 마침내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되자 이를 중심으로 국외와 국내를 연결하여 무장투쟁을 확대하기 위해 분투를 거듭하였다. 1920년대 가열차게 전개된 의열단의 투쟁은 이러한 선배 독립운동가들의 치열한 노력 끝에 얻어진 빛나는 성과물이었다. 또한 이들은 거의가 지역 명문가의 후예로서 대개 사문(師門)으로나 혈연으로 굳게 연결되어 있었고, 따라서 풍찬노숙(風餐露宿)의 삶속에서도 동지의식과 단결력은 매우 굳건하였다. 김정묵, 이우필, 이내성, 이정기, 이육사, 채충식은 1927년 10월에 발생한 장진홍의 대구 조선은행폭탄사건을 중심으로 국내와 해외에서 함께 힘을 모았고, 시인 이육사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관련자들이 옥고를 치렀다. 이육사(李陸史)의 호가 이때 받은 수감번호인 264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화이다. 묘비문에 따르면 최관호는 1919년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식에 눈을 떴고, 1927년 7월 의열단의 창립주체인 이수택 선생의 장의를 경찰이 간섭하자 이에 자극받아 독립운동에의 투신을 결심하였으며, 대구 조선은행 폭탄사건의 주역 장진홍 선생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적시(摘示)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경술국치 이후 독립운동을 준비해 온 선배 운동가들과 일찍부터 일정한 교류를 가졌으며, 그들의 활동과 정신을 계승하였다는 강한 암시를 내포하고 있다. 이수택 선생은 최관호와 가까운 사돈관계로 사장(査丈) 뻘의 집안어른이고, 장진홍 선생은 이웃이나 다름없는 인동면 옥계동이 자택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추론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이수택 선생이 1927년 7월 4일 고문과 혹형의 여파로 쓸쓸한 영면에 들자 밀양과 왜관의 동지들이 연합하여 사회단체장으로 치르고자 결의하였는데, 경찰이 이를 저지하자 일주일 간의 대치 끝에 결국 약간 축소된 형태로 연합장이 치러졌다. 장진홍 선생이 1930년 7월 31일 옥중에서 자결하자 일제 경찰은 운구행렬을 따라 다니며 유족 외의 조문을 철저하게 금지하였다. 8월 2일 선생의 장의가 시작되자 일제의 집요한 감시에도 불구하고, 최관호는 옥계동에서부터 운구행렬을 쫓아 칠곡군 석적면 남율동의 장지까지 따라갔고, 경찰과의 치열한 몸싸움 끝에 그는 가족 외의 유일한 조객으로 문상하였다고 한다. 문상이 끝나자 경찰은 해평의 자택으로 그를 강제 송환하였다고 하는데, 이 또한 묘비문의 내용으로 장진홍 선생의 장자 장형옥(張衡玉)의 증언에 따른 것이다. 이처럼 최관호는 선배 독립운동가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확신과 희망을 계승하였지만 의열투쟁 일변도로 치닫는 선배들의 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할 수는 없었고, 막연하게나마 의열투쟁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선배들과는 상당한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선배들과의 교류와 논의가 거듭될수록 의열투쟁의 한계는 분명하였지만 그를 대체할 새로운 방안이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더 큰 문제점이었다. 독립운동 세력 다수가 주장하는 독립전쟁론이나 무장투쟁론이 있었지만 그로서는 모두 쉽게 동의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최관호가 고심을 거듭하는 중에, 1920년대 중반 이후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의 환경은 크게 변화하였다. 1920년대 들어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자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조직이 활발하게 설립되었고,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려는 다양한 경제투쟁을 전개하였다. 경북에서도 안동의 풍산과 영주의 풍기, 대구 등지에서 소작쟁의가 가열차게 전개되었고, 소규모이지만 도시지역에서 노동쟁의도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백가쟁명(百家爭鳴)식의 다양한 논의가 봇물처럼 쏟아졌다. 1926년 정우회선언과 뒤를 이은 신간회 결성 논의는 최관호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국내의 신간회운동의 진척과 더불어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도 민족유일당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답답하던 그의 가슴으로 한 줄기 상쾌한 바람이 밀어닥쳤고,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밝은 광명을 찾은 듯한 희열에 온 몸과 마음이 전율하였다. 그는 만주로 가서 자유언론의 기치를 올려야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최관호의 삶만큼이나 그의 죽음도 결코 예사롭지가 않다. 최관호는 해방정국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이념 과잉이 빚어낸 야만적 광기에 의해 1946년 10월 17일 삶을 마감한 비극적 인물이다. 해방 이후 무분별하게 전개된 좌우 이념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1887∼1945),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1949),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巖, 1899∼1959) 등 다수의 지도자들이 무고하게 희생되었다. 뿐만 아니라 테러와 폭력, 재판 없는 즉결처분으로 목숨을 잃은 이름 없는 민초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정도이고, 보도연맹 사건이나 거창양민학살처럼 공권력에 의한 집단학살도 상당수에 이르는 실정이다. 이런 일들은 모두가 우리 근현대사의 사이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깊은 상흔(傷痕)들이고 ‘불편한 진실’이다. 최관호의 생애를 제대로 바라보기에는 70년이란 시간은 너무 길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역사의 무대가 아닌 망각의 광장에 그를 내버려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지난 시기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할 때가 되었다. 어둡고 칙칙한 과거일수록 음지에서 양지로 옮겨서 우리의 역사로 보듬어 안을 때 용서와 화해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럴 때만이 남은 유족들의 상처도 아물고, 깊은 곳으로부터의 치유와 더불어 생명의 새 살이 비로소 차오를 것이다. 해원(解寃)이 없는데 어찌 화해와 용서가 있겠는가. 다시 봄이다. 아직도 최관호의 무덤 앞 묘비가 놓일 자리는 허허롭게 비어 있다. 이제는 70년 전에 써 놓은 운파 최관호의 묘비가 세워져야 하지 않겠는가. 유족들과 그를 기리는 모든 사람들이 오랫 동안 품어 온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마음이 언제쯤 해소될 것이냐!!!
3. 운파 선생의 사회활동
1) 청년운동에 뛰어들다. 최관호는 한말의 풍운이 몰아치는 1905년 8월 19일 장천면 상림에서 아버지 최종익(崔鍾翼)과 어머니 한산이씨(韓山李氏)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다. 자(字)는 섭(涉)이고, 운파는 그의 자호(自號)이다. 선산의 명가인 인재(訒齋)선생 최현(崔晛)의 13세 주손(冑孫)인데다 결혼 10년만에 얻은 첫 아들이었니,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와 문중의 큰 기쁨이 되었다. 명문가의 후예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훈도 아래 한학(漢學)을 배우면서 남부러울 것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주최씨의 세거지는 본래 해평면 해평리였으나, 1894년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그곳에 군사기지를 설치함으로 해서 어쩔 수 없이 고아면 연흥(延興)으로 피난했다가 다시 인재(訒齋) 선생의 선영이 있는 장천 상림으로 이거하였던 것이다. 아버지 최종익은 일찍이 장천면장을 역임하였고, 상당한 농지 외에도 넓은 임야를 소유한 대지주였다. 그는 임야개간에 착수하여 축산까지 겸하고 있었는데, 경영능력 또한 뛰어나서 짧은 기간에 큰 부를 축적하였다. 그의 상림 정착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해평 고리(故里)를 떠나갔던 많은 종친들이 상림으로 모여들어 한때 가문의 한 중심처로 되었다. 최관호는 자랄수록 미목(眉目)이 수려해졌고 타고난 영민함까지 더하여 어린 시절에 이미 상당한 성리학적 소양을 갖추게 되었다. 비록 근대학문은 익히지 못했으나 10대 중엽에 독학으로 일본어를 익혔다고 한다.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발발하였다. 수백만의 조선인들은 조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정치적 행동에 기꺼이 몸을 던졌다. 구미와 선산지역에서는 3월 12일~14일에 일어난 인동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3월 26일 구미장터, 4월 3일 해평, 4월 8일 임은동, 4월 12일 선산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한해가 저물어 가는 어느 날, 오산학교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전국을 떠돌며 피신하고 있는 박서몽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최관호는 이웃 마을의 친구 김동석과 함께 이 청년을 보호하였다. 박서몽은 두 사람의 지원을 받으며 상당기간 장천에서 머물다가 사태가 유야무야되자 학교로 돌아갔다. 박서몽과 만나면서 최관호는 비로소 민족의식에 눈을 떠게 되었다고 하니, 3.1운동과 1919년은 그의 삶의 큰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박서몽은 1921년 6월부터 7월 사이에 동아일보에 여러 편의 시를 발표한 문학청년으로 투철한 민족의식의 소유자로 여겨진다. 장천을 떠난 이후에도 연락은 계속되었겠지만 더 이상의 구체적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1922년 6월 아버지 최종익이 타계하였다. 최관호는 당연히 유가의 전통에 따라 3년상을 치르면서 자식으로서의 도리에 전념하였다. 그가 3년상을 치르는 동안에도 근대의 새로운 풍조는 수구적인 선산으로 밀려 와서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1922년 12월 조선청년연합회는 경상남북도 순회강연회를 조직하였는데, 12월 6일 경북 김천을 시작으로 1923년 1월 2일 선산에서도 강연회가 열렸다. 그보다 앞서 7월 25일 선산청년회 후원으로 조선고학생 갈돕회 남선(南鮮) 순회극단 일행이 선산에 와서 공연을 펼치기도 하였다. 1923년 선산청년회는 조선물산장려회 조직과 더불어 금주단연운동을 전개하였고, 9월 들어서는 선산공립보통학교 내에 노동야학회를 개설하였으며, 마침 전국을 강타한 수해(水害)와 동경(東京)대지진 구제극단을 조직하여 9월 20일부터 군내 9면을 순회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 들어 선산청년회는 초기의 활력을 잃고 점차 유명무실한 상태로 퇴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선산청년회는 전국적 분위기에 휩쓸려 급조된 조직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완고할만큼 수구(守舊)적인 지역풍토는 이 정도의 조직조차 보듬을 역량과 여건이 못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청년회의 지도력들은 일제에 타협적이고 유화적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민족운동으로 발전하는데 근본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1924년 청년단체의 전국적 대중조직으로 조선청년총동맹(靑總)이 결성되었다. 청총의 주도로전국 각지의 군에는 청년동맹, 면에는 지부, 리에는 반의 이름으로 청년단체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국적 흐름에 조응하기에는 선산의 청년운동은 너무나 세력이 취약하였다. 7월 들어 부친에 대한 3년상을 마친 최관호는 비로소 공개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가끔씩은 구미로 나가서 박상희 · 김상호 등과 어울렸고, 가까운 곳에 있는 산동면 적림동의 박관영(朴觀永) · 성수동의 황진박(黃鎭璞, 1888~1942)과 자주 만나면서 독립방략에 대하여 논의를 이어갔다. 자신의 진로를 두고 진지한 모색을 거듭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성수동의 황진박은 격렬한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1910년 조선이 일본에 합병되자 책장을 박차고 일어나 약장사로 변장하여 뜻있는 동지를 찾아 각처를 두루 다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경하였으나 평화적 시위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음을 확인하고 실의 귀향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장진홍 · 이내성 · 박관영 등 동지들과 손잡고서, 지금과 같은 구국운동 방법으로 한계가 있으니 다 같이 결사대원이 되어 직접행동으로 옮기자고 맹세하였다. 1920년대 초 구미 선산지역의 독립운동 주체는 단연 이들이었다. 황진박은 장진홍의 대구 조선은행폭탄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었고, 해방 직전까지 연금과 투옥을 거듭하다가 1942년 해방을 보지 못한 채 사망하였다. 2) 구산구락부 창립과 신간회 선산지회 결성
1925년 최관호의 나이 어느 새 약관 21세에 접어들었다.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교우관계를 넓혀갔다. 왜관에서 활동하고 있던 강고한 지사(志士) 채충식의 소개로 이육사(李陸史)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채충식을 존경했던 육사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왜관을 자주 방문했다고 한다. 최관호가 언론인으로서의 입지를 굳히는데 있어서 채충식은 영향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이해 말, 최관호는 박상희 · 김상호 등과 함께 구산구락부(龜山俱樂部)를 창립하였다. 구산구락부는 선산청년회의 일제에 타협적인 유약한 태도를 비판하면서 ‘민족운동으로서의 청년운동’을 추진하려는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동아일보 1925년 5월 12일 지면에 ‘선산통탄생’이란 필명으로 “기(起)하자 선산(善山)아”라는 기고문이 실려 있는데, 구산구락부의 성격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 아! 선산사회는 과연 어떠한 상태에 있느냐. 물론 문화의 발전과 생활의 과정이 남에게 낙오되어 있음은 새삼스럽게 부언할 필요도 없다. 너무나 완고적이며, 너무나 퇴락(頹落)적이며 무활기하여 공익적 방면으로는 수면적 상태에 있고 이기심에 취하여 있다. 그리고 참으로 몽롱하고 모든 것이 침체된 이 선산에 일할 만한 인격자가 없나니. 무슨 회(선산청년회 : 필자 주)니 무슨 단(慈藝團 : 필자 주)이니 하여도 하나 완전히 진행되는 것 없고 용두사미가 되어 유야무야 중에 매장되어 버리고 그 어느 구석에서 은사(隱士)생활을 하는 지 존재를 볼 수 없다.
◇ 보라! 열혈이 약동하는 청년도 꽤 있고, 자산가도 상당히 있다. 그러나 의용과 봉공(奉公)적 희생정신은 약에 쓸 것도 없다. 자! 위선(爲先) 청년회의 과거의 역사를 징(徵)하여 보자. 자! 단체와 공익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남이 한다하여 풍성작루(風聲鵲淚, 바람소리에 까치가 우는)의 격으로 합시다 하고 창립 당시에는 고원(高遠)한 대계(大計)나 수립하는 듯이 제법 떠들더니 벌써 전성시대가 지났는지 깨끗한 언행주의로 화한 자까지 꼴도 볼 수 없으며, 총회까지도 반수 이상의 출석이 없어서 유회(流會)한 적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아니 하였으니 이러고도 청년의 사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있다 할 수 있으며, 허위의 가면을 쓴 청년으로 조직된 청년회라 아니 할 수 있는가? 유명무실이 아닌가?
◇ 아! 선산이여, 너의 전도는 과연 불쌍하다. 선산 인사여, 너의 지위는 과연 낙오자이다. 실로 선산사회에는 난만(爛熳)한 봄꽃도 흥취가 없으며, 양명(陽明)한 가을달도 한숨을 더할 뿐이다. 청년 제군아! 부호 제씨여! 기하라 動하라! 경제불황으로 기근에 방황하는 이때에 심안(心安)하게 홍등음주 중에서 담소하는 자가 되지 말고 봉공도덕성과 견인불발(堅忍不拔)의 기백으로 단결 하에서 모든 썩은 것을 파괴하고 건설하자!
◇ 부호 제씨여! 일생의 정력을 낭비하여 금력을 소모하여 허례허식에 분망치 말고 그 정력과 금력을 민족을 위하여 바치고 사회를 위하여 쓰라! 그리하여 책임을 다하는 동시에 사회에 유력한 제반기관을 시설하여 현대문화생활에 응함이 있으라. 이것이 곧 영광이며, 공동의 행복을 증진함이다.(선산통탄생)
이 무렵 구산구락부(龜山俱樂部) 외에도 1926년 2월 백정(白丁)들의 조직인 구미형평(衡平)본사, 이어서 구미노동자친목회도 결성되었는데, 이들 조직들은 구산구락부의 지원 아래 결성되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확인된 구산구락부 관계자들은 최관호, 김상호, 박상희, 이종하(李鍾夏, 1907~1932), 김정술(金正述, 1907~1964), 윤재우 등인데, 이로 볼 때 이 조직은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니었으며 20여 명 이내의 단촐한 모임으로 추정된다. 1927년 5월 16일부터 3일 동안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에 박상희는 구산구락부를 대표하여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1926년 6월 27일 최관호는 채충식(蔡忠植)의 주도로 개최된 삼중기자단(三中記者團) 창립대회에 참여하였다. 이날 왜관에 모인 선산과 칠곡, 성주의 기자들은 10명 내외로 보인다. 칠곡의 채충식, 허홍제(許弘濟), 성주(星州)의 도문환(都文煥), 마승락(馬承洛), 차명동(車命東), 선산의 최관호, 박상희(朴相熙) 등이 참석자의 면면이다. 채충식 외 5인이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날 회의에서는 다음 사항이 결의 되었다. 一. 언론 양성 신장에 관한 건 一. 최대기사에 관한 건 一. 노동교육 보급에 관한 건 一. 기자 채용에 관한 건
1927년 10월 11일 신간회 선산지회 결성에 참여하였다. 최관호는 1927년 들어, 장천 상림에서 해평의 옛 마을로 이사를 하고, 조용히 가산을 정리하면서 북경대학 유학을 준비하였다. 중국의 북경을 두 차례나 다녀온 육사(陸史)와 깊이 상의한 결론이었다. 만약 여건이 허락된다면 북경대학에 입학하여 근대식 학문을 배울 심산이었겠지만 이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려는 빌미에 불과하였고, 사실상의 망명계획이었다. 따라서 최관호는 1927년 지역에서 논의되고 있는 신간회 선산지회의 건설에는 재정지원을 하거나 거의 비공개에 가까운 수준에서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민족 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제휴하여 창립한 민족운동단체이다. 이상재(李商在) · 한용운(韓龍雲) · 신채호(申采浩) · 조병옥(趙炳玉) · 김병로(金炳魯) 등 34명이 발기했다. 우리지역의 장길상(張吉相, 1874~ 1936)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것은 다소 생경스럽다. 정강정책(政綱政策)은 ① 조선민족의 정치적 · 경제적 해방의 실현, ② 전민족의 현실적 공동이익을 위하여 투쟁함, ③ 모든 기회주의 부인 등이었다. 1928년 말 지회 수 143개, 회원 수 2만 명에 달하는 전국적 조직으로 성장했으며, 1931년 5월에는 회원이 49,000명에 이르렀다. 회원 중 농민의 숫자가 가장 많아, 농민이 2만여 명으로 전체 회원의 54%를 차지했다. 신간회 선산지회는 1927년 10월 11일 구미역전 원평동에서 창립대회를 개최하였다. 대회는 오후 2시에 개회할 예정이었으나 엄중한 선산경찰의 간섭으로 정각에 개최하지 못했다. 자동차로 시내에 ‘삐라’를 뿌리고 대회선전을 하려 했으나 ‘삐라’만 뿌렸다. ‘식민지를 타도하자’ 등의 글이 실린 집회도구는 모두 압수되고 정각보다 늦은 오후 3시 30분에 개회선언을 하였다. 회장으로 선임된 이재기(李再基, 1880~1950)는 1917년부터 1919년까지 구미면장을 역임하였으며, 부회장으로 선임된 김탁용(金卓容, 1885~1967)은 이재기의 후임으로 1920년부터 1925년까지 구미면장을 역임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지역에 오랜 연고를 가진 명문(名門)출신으로 당시 유림의 대표적 인물이다. 1927년 10월 18일, 신간회 선산지회가 창립된지 일주일 후 장진홍 선생의 대구 조선은행폭탄 의거가 발생하였다.
3)운파 선생의 북경에서의 활동
1927년 12월, 최관호는 몇 몇 친구의 환송을 받으며 은밀하게 망명의 장도에 올랐다. 이때 최관호는 동경과 나가사키를 거쳐 중국의 상해로 갔으며, 상해에서 만주 봉천을 경유하여 북경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망명경로를 택한 것은 일본과 중국의 근대문물을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고, 또한 상해 방문을 통하여 임시정부의 실상을 파악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망명의 최종목표는 만주지역이나 북경에 독자적인 독립운동의 기지를 구축하려는데 있었다. 이러한 계획이 차질 없이 진행될 것을 전제로 최관호는 1910년 경술국치 후 일찍이 중국으로 망명한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1878~1937) ·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 등 영남지역의 선배운동가들과 힘을 합쳐 독립운동의 지평을 확대하는 한편 만주에서의 독립운동과 국내를 연계하려는 나름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중국에 도착한 최관호는 국내에서 육사와 의논하며 세운 계획대로 만주 봉천에서 원호동 출신의 김정묵을 만났다. 하얼빈에 도착해서는 뒷날을 위하여 그곳의 상황을 세밀히 살핀 후 북경으로 향했다.
1928년 햇볕이 따사로운 어느 봄날 최관호는 무사히 북경에 도착하였다. 이때 중국은 장개석 군에 의하여 북벌의 마지막 단계를 경과하고 있었기 주전장(主戰場)인 북경은 남북군의 쟁투로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이어서 도저히 공부할 분위기가 못되었다. 북경대학에 입학하여 몇 달간 수학하다가 그는 결국 북경을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최관호는 궁여지책으로 소련으로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그는 하얼빈을 거쳐 멀리 모스코바까지 여행했다고 하는데, 이때 소련은 1924년 레닌 사망 이후 그가 추진했던 신경제(新經濟)의 마지막 단계를 경과하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 오늘의 우리로서는 결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1929년 초 소련 여행에서 돌아온 최관호는 최종적으로 하얼빈 정착을 결심하였다. 당시 하얼빈 동북쪽 35Km 되는 지점에 위치한 취원창(聚源昶)에는 경북에서 망명한 김동삼(金東三) · 이상룡(李相龍)의 자녀들을 비롯한 그의 일가들과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집결해 있었다. 그들은 경제적 자립과 독립운동을 병행하자는 목표를 설정하고, 수년 전부터 이곳에 정착하여 수전(水田)농사를 위한 농장개발에 주력하고 있었다. 최관호는 이곳에서 신문을 발간하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준비에 착수하였다. 먼저 그는 취원창의 선배운동가들을 방문하고 그들로부터 조언을 듣고 협력을 요청하였다. 이들의 도움으로 최관호는 비교적 빠른 시간에 신문 발간을 이룰 수 있었다. 신문의 제호는 만몽일보(滿蒙日報)이고, 그가 사장을 맡았다. 이용상(李容祥) · 홍성숙(洪性淑) · 이몽현(李蒙鉉) · 심도성(沈圖成) 등이 기자와 편집을 맡았다. 1930년 7월, 최관호는 만주 하얼빈에서 조용히 해평 고향으로 돌아왔다. 평소 존경해 마지않던 장진홍 선생의 사형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장진홍 선생은 7월 20일 고등법원(현재의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고, 7월 31일 옥중에서 자결하였다. 최관호는 선생의 운구행렬을 따라 옥계동에서 석적면 남율동 장지(葬地)까지 동행하였다. 장지에 도착한 그는 경찰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심한 몸싸움 끝에 선생의 장례에 참석하여 문상하였다. 유족 외에는 그가 유일한 조객이었는데, 문상을 마친 그는 다시 경찰의 손에 끌려 본가로 강제 송환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장진홍 선생의 장자 장형옥(張衡玉)의 증언으로 70년 전의 묘비문에 또렷이 기록되어 있다. 1930년 8월 중순, 다시 하얼빈에 돌아온 최관호는 장진홍 선생이 이룬 폭탄사건의 의미를 재해석한 “민족이여, 각성하라”는 사설을 만몽일보에 실었다. 당시 일제는 만주에 대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시기였다. 최관호는 이러한 만주의 현실을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중 · 한 양국과 국민들이 힘을 합쳐 일제에 대한 공동전선을 구축하자고 호소하였다.
9월 경 최관호와 동지들은 결국 이 기사 때문에 일본경찰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당연히 한국으로 강제 송환되겠지만 그들의 앞에는 여러 차례의 고문과 혹형을 견뎌야 하는 실로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최초로 하얼빈에서의 기본조사와 봉천에서의 본격적인 수사를 견뎌야 한다. 두 차례의 수사는 야만적일 정도로 혹독하다. 마지막으로 국경도시인 단동에서 하루 밤을 보낸 후 비로소 신의주경찰서에 도착한 날은 1930년 12월 25일이었다. 신의주경찰서에 도착했다고 해서 평안이 보장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혹독한 고문이 기다리는 곳이 바로 신의주경찰서이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국내로 송환되는 경우는 대개 중국과의 관련이 부인되고 일본 측이 판단할 때 일본의 조선통치에 심각한 위해를 가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될 때 취해지는 조치이다. 중국 측에서 보면 일종의 징벌적 국외추방이다. 중국의 사회제도에 위험한 인물은 3년 동안 중국에서 추방되는 것이 관례였다. 중국과의 관련이 있다고 판단될 경우 재판관할권은 당연히 중국정부에 귀속된다. 대부분의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이 이러한 기준에 따라 국내로 송환되었다.]
위의 보도에 따르면 당시 최관호 거주지는 하얼빈의 소련(蘇聯)조계에 해당된다. 당시 하얼빈은 19개국의 영사관이 개설된 국제적인 도시였고, 그 중에서도 중국 · 소련 · 일본의 이해관계가 가장 첨예하게 부딪히는 지역이었다. 하얼빈은 청일전쟁 이후 중·러밀약에 따라 러시아에 통치권이 이양되었으며, 이에 따라 중국정부는 1926년에야 공산화된 소련으로부터 하얼빈시 통치권을 넘겨 받았다. 최관호가 구속된 1930년에 재판관할권은 당연히 중국정부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조계에 있는 제3국인을 구속할 경우라면 중국정부라도 소련 측의 양해 없이는 불가능한 조치에 해당된다. 따라서 최관호의 경우는 일본 측이 오래 동안 주시한 요주의 인물이었고, 중국 측을 통하여 상당한 교섭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 또한 소련과 복잡한 교섭을 거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소련은 당시 공산국가였으나 아시아 각 국에서 전개되는 민족해방운동에 우호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일본 측이 최관호의 신병을 인도받기 위하여 얼마나 집요하게 노력했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931년 5월 16일 신간회가 해산되었다. 신간회 선산지회, 칠곡지회, 김천지회를 대표하여 마지막 대의원회의에 참석한 신상태(申相泰)는 해소반대의 입장을 피력하였다. 대구와 밀양이 이러한 입장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다수의 사회주의 진영 대의원들에 의하여 신간회는 결국 해소되고 말았다.
1931년 7월 19일 최관호가 옥고의 여진에서 벗어나자 선산, 칠곡, 성주의 기자들이 그를 위로할겸 앞으로의 연계를 회복하자는 의미에서 삼중기자단 활동을 재개하려 하자 일제는 이를 금지하였다.
4) 선산 · 해평 지역의 수리조합 반대운동을 항일의식 고취
1931년 9월, 해평수리조합 반대운동의 선봉에 서다. 만주에서 돌아온 최관호가 마주친 가장 다급한 과제는 일제에 의해 수년 전부터 진행되어 온 해평수리조합 설립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는가 였다. 신간회 본부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는 수리조합반대운동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고, 각 지회 또한 지회의 역량을 다하여 그 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신간회 선산지회는 설립 초기부터 금오산 수리조합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선산지회는 선산군 및 구미면 당국과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다. 금오산 수리조합문제가 지역현안으로 떠오른 1928년 당시 구미면장 김승동(金升東, 1878~1965)은 다분히 친일적 성향의 인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신간회선산지회와 선산청년동맹에서 면장 불신임안을 경상북도 당국에 진정하는 등 문제는 확산일로에 있었다.
수리시설은 벼농사에 의존하는 조선농업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회간접자본이다. 그러므로 그 시설비는 전액 국고로서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일제는 1926년 제정한 <조선토지개량사업보조규칙>에 따라 공사비의 15∼30%를 보조하였으며, 나머지 70∼85%는 농민의 기채(起債)로서 장기저리조건에 의한 연부상환을 실시하였다. 게다가 수세와 조합비는 지나치게 과다하게 책정되었고, 이자는 7.4%의 고리(高利)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제의 수리조합사업은 1921년부터 전국 각 지역에서 농민들의 격렬한 반대운동에 직면하였다. 더구나 일제의 예상과는 달리 1928년부터 진행된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미가(米價)마저 폭락하자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이처럼 산미증식계획의 실패는 조선농촌의 심각한 위기로 곧바로 연결되었다. 1927년부터 조선 전역에서는 삶이 거덜난 농민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 만주로 이민길을 떠나는 현상이 해마다 증가되었다. 떠나지 않은 농민들의 삶도 결코 녹록치 않았다. 1932년 조선총독부의 통계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48.3%의 농가가 절량농가였고, 그 가운데서 소작농이 많은 남한지방의 절량농가는 55.5%였다고 한다. 이처럼 수리조합사업은 1930년대 들어 조선농촌경제의 한 암(癌)이 되어가고 따라서 조선농촌의 한 중대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하여 수리조합을 중지하거나 대개혁하라고 요구하였다. 가까운 칠곡군의 약목에서도 1925년부터 수리조합반대운동을 전개하여 수년 동안 끈질기게 투쟁하였으나 결국 1934년 조합은 설립되고 말았다. 그러던 중 오랫동안 계획에만 머물던 해평수리조합 문제도 1931년 9월 들어 설계서까지 확정되면서 마침내 움직일 수 없는 현안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해평수리조합문제는 당장 해평의 전주최씨 문중의 최대의 난제로 대두되었다. 몽리구역 내 토지의 상당수가 전주최씨 가문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해평의 지주들은 자연스럽게 문중의 종손인 최관호 주변으로 모여들었고, 그를 중심으로 대응방안이 논의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1931년 9월 6일, 선산군수 유시태(柳時台)가 군청 직원 세 사람과 경찰서장까지 대동하고 해평리로 출장 와서 관계지주들을 소집하였다. 일종의 무력시위인 셈이다. 군수는 설계서를 반포하고 근간의 수리조합은 과거의 물가(物價)가 높을 때에 설치된 수리조합과는 다르다고 강변하였으나 지주들의 반대의지를 꺽지 못하고 장시간 권유하다가 당일 모임은 아무런 성과 없이 폐회되고 말았다.
당시 최관호는 전주최씨 문중의 토지를 대표한 대리지주의 신분이었다. 그만큼 문중의 기대를 받고 있었고, 그런만큼 문중의 미래도 그의 손에 맡겨진 셈이었다. 해평수조 문제에 대한 최관호의 입장은 분명하였다. 그를 찾아 온 동아일보 기자에게 해평수조(水組) 문제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설계서를 보면 1단보(=300평) 당 4원에서 5원 돈이나 되니 1단보에 대하여 이만한 수확이 더 될는지도 의문이고, 우선 세금도 못 내어 죽을 애를 쓰는 이 불경기시대에 더구나 수세까지 내게 되면 1년도 부지를 못하고 종말에는 소소한 토지는 모두 조합 소유가 될 듯 합니다.” 다소 과장되기는 해도 이는 당시 일제가 추진하는 수리조합사업의 실상을 제대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산산군 당국은 해평수리조합 사업을 계속 밀여붙였다. 선산군에서는 추진위원 4~5명을 정하고 추진위원장으로는 당시 해평면의 대지주인 渡邊準藏을 선임하였다. 이로써 해평수조는 관제조합이 되었다. 해평수조의 반대운동은 더욱 거세게 진행되었다. 그러던 중 12월 중 돌연 추진위원장 渡邊準藏이 창립위원의 명의(名義)와 창립동의서의 무효를 주장하는 내용증명서를 도 당국에 제출하고, 같은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해평수조 설립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성명서 내용은 생략)
이로써 일제가 강행하려는 해평수조는 좌절되었고, 창림지는 해방 후에 준공되었다. 한편 당시 일제 당국이 추진하려는 해평수립수리조합의 몽리면적은 156정보 였다. 그 외에도 일제는 선산군 각 지역에 수리조합설립을 계획하고 있었다. 금오산 수리조합 400정보, 선산수리조합 391정보, 장천수리조합 200정보 등이었는데, 일제는 만난을 배제하고 설립하겠다고 공언하였다. 그러나 이들 수리조합도 대개 1945년 해방이후에 성립되었으니 해평수리조합 반대운동은 지역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음에 틀림없다. 1931년 가을 들어, 최관호는 이육사와 이선장(李善長)이 주도한 보도협조망에 참여하였다. 보도협조망에 참여한 기자들은 대개 각지의 신간지회에서 간부로 활동한 인물들이었다. 이로서 경북의 언론인들은 신간회 해산으로 무너진 조직적 연계를 회복하게 되었다.
1931년 11월 1일 해평소비조합 감사에 선임 1930년대 농촌의 사정은 비참하였다. 농민의 거의 절반이 절량농가였고, 그 가운데서 소작농이 많은 남한지방의 절량농가는 55.5%였다고 한다. 이런 답답한 현실은 개선하기 위하여 경북의 각 지역에서 농민운동과 사회운동을 추진하던 세력들은 소비조합운동을 하나의 유력한 대안으로 검토하고 이를 적극 추진하였다. 경북에서는 1920년대 초 고령(高靈)과 청도(淸道)의 청년단체들이 선진적으로 소비조합운동을 실천하였다. 1920년대 말 김천은 소비조합운동에 있어서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선산군에서는 구미에 소비조합이 제일 먼저 생겼고, 장천에서는 김동석(金東碩)이 소비조합 결성을 주도하였다. 해평에서는 최관호가 귀국하기 전부터 소비조합이 이미 결성되어 있었고, 그는 추가로 감사에 선임되어 비로소 소비조합에 참가하였다. 1932년 5월 초, 최관호의 고향 자택으로 두 사람의 옛 친구들이 방문하였다. 한 사람은 제천 출신의 여성 홍성숙(洪性淑)으로 만몽일보의 동지였고, 최의준(崔義俊)은 원산 출신의 친구였다. 4일 경찰은 아무런 이유 없이 최관호를 비롯한 3명을 피검하였다가 별다른 혐의를 찾지 못하자 결국은 석방하였다.
5) 동아일보 선산지국 기자 취임과 건국동맹 참여
1934년 6월 7일, 최관호는 동아일보 선산지국 기자로 취임하였다.
1935년 4월 20일, 만몽일보(滿蒙日報)의 옛 동지들이 오랜만에 인천의 월미도에서 해우하였다. 최관호는 박상희와 함께 이 모임에 참석하였다. 이 사실은 조갑제(趙甲濟)의 취재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먼저 조갑제의 기록을 살펴보자. “취재도중 입수한 사진이 있다. 1935년 4월 20일 인천 월미도에서 찍은 것이다. 박상희가 맨 앞줄에 나오는 이 사진 속의 한 인물이 들고 있는 깃발에는 '만몽일보사'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1933년 8월 25일 일제는 ‘국책적 견지에서’ 한글신문인 만몽일보(사장 이경재)를 신경(新京, 지금의 중국 장춘)에서 창간했다. 박상희가 만주국 유일의 한글 친일신문이던 만몽일보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주 활동무대였던 경북에서 인천까지 올라와 함께 기념촬영한 점이나 그가 중앙에 앉은 모습을 보아도 이 신문사 기자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조갑제가 입수한 사진과 동일한 사진이 최관호의 유품으로 남아 있다. 최관호가 창간한 만몽일보는 이름만 같을 뿐 친일신문 만몽일보와는 명백히 다르다. 우선 발간년도와 장소가 틀린다. 최관호의 만몽일보는 1929년 하얼빈에서 창간되었고, 후자는 1933년 만주국 장춘에서 발간되었다. 월미도의 모임은 1929년부터 1930년 폐간하기 까지 어려운 조건 속에서 신문발간을 위해 노력하다가 1930년의 필화(筆禍)로 국내로 송환되면서 고난을 함께한 동지들과, 요행히 화를 면하고 도피해야 했던 기자와 사원들에게 대표인 최관호가 위로를 겸해 휴식의 자리를 마련한 것으로 보여진다. 오랫만에 해후한 1929년 만몽일보의 동지들은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마음껏 기세를 올리며 모처럼 즐거운 한때를 보낸 후 각자의 현장으로 돌아갔다.
1936년 이후, 최관호는 대구로의 출입이 잦았다고 한다. 그는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대구의 남산동으로 이사한 심산 김창숙 선생을 만나거나, 육사와 이선장을 만난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선산약주(주)의 이사로 참여하였고, 1939년 들어 해평탁주의 대표로 취임하는 등 경제활동에 힘을 쏟기도 하였다.
1944년 말부터 건국동맹 경북지부가 조직에 착수하였다. 12월에 육사의 외숙되는 허규(許珪, 1884 ~ 1957)가 대구로 와서 육사(陸史)가 북경으로 떠나면서 한 말을 전하였는데, 건국동맹 관련하여 경북 쪽 일은 이선장(李善長)이 맡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이선장은 심산 김창숙(金昌淑) 선생을 책임자로 추대하고, 경북에서의 건국동맹 조직에 착수하였다. 최관호는 이선장으로부터 그 간의 전말을 전해 듣고, 건국동맹에 참여하였다.
1945년 8월 7일, 심산 김창숙 선생이 건국동맹 관련으로 성주에서 연행되어 왜관경찰서에 수감되었다. 같은 날 관련자들이 조금씩 시차가 있기는 하였으나 모두 연행되어 왜관경찰서에 수감되었다. 최관호도 이 날 해평에서 연행되어 왜관경찰서에 수감되었는데, 같이 수감된 사람들은 박관영, 장적우(張的宇, 1902~), 장하명(張何鳴), 문상직(文相直, 1892~), 정세호 등이었다. 성주의 도병철(都炳喆, 1903~1945)은 잡혀 오던 길에 낙동강 다리 아래로 뛰어 내려 도피하려다가 익사하고 말았다. 이 때 최관호는 거동이 불편한 심산선생을 출옥하는 날까지 업어 모셨다고 한다. 8월 15일, 어떤 한인(韓人) 경관이 “오늘 돌연히 정전(停戰)되었다는 소문이 있다”는 말을 전하자 심산선생은 일본이 패망한 것을 예단했다고 한다. 수감된 사람들은 하루를 더 옥중에서 보내고 8월 16일 오후 8시에야 전원 석방되었다. 최관호가 석방되어 돌아오자 해평의 주민들은 강창나루까지 가서 환영하였고, 연도에도 환호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는 말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1945년 8월 17일 이후
이 시기에 최관호가 어떤 정치적 행보를 하였는지 지금의 우리로서는 판단할 수 있는 증언이나 자료가 거의 없다. 다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건국동맹 관련자로서 건국동맹의 방침과 지역내 여러 동지들과 논의하면서 동일한 행보를 했을 것이라는 사실과 불안한 지역내 치안유지를 위한 기본적인 조치를 취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9월 들어, 선산군의 면(面) 단위에 치안유지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신간회 선산지회의 회장을 역임한 이재기(李再基)가 남긴 현산수발(玄山溲渤)을 보면 그가 9월 구미면 치안유지위원장에 당선되었다고 명기(明記)되어 있다. 건국동맹은 해방과 동시에 건국준비위원회로 전환하였다. 구미에서는 8월 16일 건국준비위원회 구미지부가 설립되었다. 8월 말이 되자 건준 지부는 전국에 145 개에 이르렀다. 건준 중앙은 이러한 조직세를 바탕으로 미군이 진주하기 이틀 전인 9월 6일 전격적으로 인민공화국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우익세력이 참석을 거부함으로써 이후 좌우분열의 단초가 된 점은 오늘날의 입장에서 볼 때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1945년 12월, 모스코바에서 미, 영, 소 3국 외상이 모여 한반도의 신탁통치안을 결의하였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코바 3상회의의 내용이 동아일보 보도를 통하여 처음으로 국내에 알려졌다. 동아일보의 보도는 즉각적으로 광범위한 반대운동을 촉발시켰다. 1945년 12월 28일 김구와 임시정부가 중심이 되어 각계 대표자들의 회합이 열리고 이튿날에는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로써 본격적인 반탁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1946년 1월, 대구 경북의 신탁통치 반대운동도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신탁통치 문제는 단연 화제의 중심이었고, 좌우의 모든 단체가 반탁으로 결집하였다. 혹독한 식민지배를 막 벗어난 상황에서 또 다시 신탁통치를 받는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독립운동으로 고초를 겪은 인사들 뿐만아니라 광범위한 대중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이에 따라 대구 경북에서는 좌우를 망라한 반탁투위가 구성되었고, 2일 오후 대구역전에서 반탁시민대회가 열렸다.
그러나 1946년 1월 초부터 조선공산당은 신탁통치 반대에서 갑자기 신탁통치 지지로 전환하였다. 이로써 좌우익 간에 모처럼 형성되었던 통일전선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러는 가운데 1월 12일 오후 서울의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로부터 7명의 설전대(舌戰隊, 유세단)가 대구에 왔다. 이들은 대구의 우익인사들과 공동으로 5개 팀을 구성하여 14일부터 20일까지 도내의 각 군부를 돌며 반탁 열기를 고조시키려 노력하였다. 선산에도 설전대가 방문하였다. 그러나 이로부터 좌우는 반탁과 친탁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각 군의 반탁 열기도 시들해졌다. 이 무렵 최관호는 실망스럽게 진행되는 정국에 대한 좌절과 안타까움으로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우려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1946년 2월, 최관호는 해평면 2대 의용소방대장에 취임하였다.
1946년 5월 6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휴회에 접어들면서부터 정국은 최관호의 기대를 근본적으로 배반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6월 2일, 이승만은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즉시 수립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당연히 한민당을 제외한 모든 정치세력은 이승만의 발언을 비난했다. 9월에 접어들자 그가 크게 기대를 걸었던 좌우합작은 좌우 양쪽의 반발에 부딪혀 사실상 폐기되었다.
1946년 9월, 이 무렵 도시서민들과 노동자들을 괴롭히는 가장 큰 문제는 식량난과 살인적인 물가고였다. 식량사정이 악화되자 미군정은 미곡수집령을 발표하고 46년 2월부터 쌀을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대지주들과 악덕상인들은 높은 물가고를 악용하여 양곡을 매점매석하였고, 일본으로의 밀수출은 이러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식량부족으로 인한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식량난이 호전되지 않자 미군정은 하곡까지 수집하였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도 없었던 일로 당연히 농민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9월 말에 접어들자 쌀값은 한 말에 1,500원으로 치솟아 전년도에 비해 10배 이상 폭등했다. 공급부족에다 쌀값 폭등까지 겹쳐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고,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다. 생사의 갈림길에 선 시민들은 연일 도청과 부청으로 모여들어 식량배급을 요구하는 기아(飢餓) 시위에 나섰다.
이처럼 민생파탄이 극에 달한 9월 23일 부산의 철도노동자 7,000여 명이 일으킨 파업을 시작으로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조직노동자들이 파업대열에 합류하여 이른바 총파업국면으로 치달렸다. 9월 25일 이후 대구에서도 철도 · 체신 · 언론계와 더불어 40여 공장이 파업에 합류하여 파업대열이 형성되자, 대구의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27일 오후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약칭 ‘대구투위’)라는 간판을 정식으로 내걸었다. 이처럼 기아시위와 파업의 대오가 강화되는 가운데 30일에는 각 학교에서 가을운동회를 마친 대구의 중고등학생들이 시위대열에 합류했다.
운명의 10월 1일 오후 흉흉한 분위기 속에 대치하던 시위대열과 경찰이 마침내 충돌하였고, 경찰의 대응사격으로 노동자 한 명이 사망하였다. 2일 오전 대학생들이 중심이 된 시위대는 전날 사망한 노동자의 시체를 앞세우고 대구경찰서까지 가두시위에 들어갔다. 오전 10시 반, 대구경찰서 앞의 시위군중은 일만 오천명으로 늘어났다. 낮 12시쯤 연좌해 있던 학생과 청년 수백 명이 경찰서로 진입해 유치장을 부수고 그 안에 수감되어 있던 100여 명을 석방했다. 이들은 무기고를 파괴하고 경찰무기를 모두 탈취했다. 군중의 험악한 기세에 놀란 20~30명의 경찰관은 경찰서 서쪽 담을 넘어 도망쳤다. 이후의 상황은 극단으로 치달렸고 혼란스런 몇 시간이 흘러갔다. 오후 5시 미군정은 결국 계엄령을 선포했다. 10명 이상의 집회와 회의가 금지되고, 오후 7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지 야간통행도 금지됐다.
10월 3일 포츠 계엄사령관은 최문식, 이재복, 손기채 등 대구의 좌익요인들을 내세워 선무(宣撫)방송을 하는 한편 이날 포고령 2호와 3호를 연달아 발표했다. 계엄포고령 2, 3호는 폭도들에게 무기반환, 피랍자 석방, 약탈중지 등을 명한 것으로, 위반하면 군대동원도 불사하겠다는 위협을 담고 있었다. 이때쯤 대구 시내에서는 대대적인 검거선풍으로 유혈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됐지만, 3일 이후부터는 점차 대구부를 벗어나 인근 읍면으로 번졌다.
1946년 10월 3일, 경북에서 가장 피해가 심했던 지역은 달성, 영천, 왜관 지역이다. 이들 지역은 모두 대구로부터 내려온 지원인력의 선동으로 초기 상황이 진행되었다. 달성에서는 경찰관 사망 6명, 중상 17명에 달했다. 또 경관사택을 비롯하여 파괴된 가옥이 107호, 총 피해액은 약 1,500만원에 이르렀다. (대구시보, 46.11.1)영천에서는 군수를 비롯하여 19명의 면직원과 관공리, 15명의 경찰이 살해되었다. 경찰서와 우체국은 전소(全燒)되었고, 경찰 무기고 · 신한공사 · 법원 · 그리고 100여 채의 건물을 포함한 다수의 공공기관과 가옥을 불태웠다. 왜관에서는 경찰서장이 잔혹하게 살해되었다. 성주에서는 경찰들이 화형 직전에 응원경찰대가 들이닥쳐 다행히 화를 면했다.
선산군에서의 상황은 이들 지역과 매우 달랐다. 대구에서 온 선동자들은 없었고, 오로지 군민들이 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는 구미면에서 시작되었고, 군중을 이끈 사람은 박상희(朴相熙)였다.
경찰측 발표는 다음과 같다. 10월 3일, 시위군중 2,000명은 선산경찰서로 들이닥쳐 오전 10시 무렵 서(暑)를 접수하였다. 이들은 간판을 부순 뒤 대신 선산인민위원회 보안서라는 간판을 내걸고, 서장에게 전 기능을 인민위원회로 이양하라고 요구하였다. 서장이 이에 굴복하자 서장과 경관 16명을 유치장에 감금했다. 이어서 20여 명의 우익정당 요인들을 구속하고, 경찰서 내에 총무 · 수사 등의 부서를 정하여 인사까지 결정하였으며, 인민재판을 개시하였다고 한다. 기세가 오른 군중들은 군내 우익요인들의 집을 다수 파괴하였다. 박상희는 경찰서 점령 직후 일부 과격분자들이 감금된 경찰관과 우익인사를 즉결처분하자고 주장하였으나 그는 이를 적극 만류하였고, 이로 인해 구미와 선산에서는 평화적으로 모든 사태가 종결되었다고 한다. 10월 3일, 해평에서도 약간의 소요가 발생하였다. 구미와 선산에서의 소식에 고무된 군중들 가운데 일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에 친일활동을 한 사람들과 면내 유지들, 관공리, 특히 경찰이나 경찰 가족들에 대하여 폭력적으로 응징하려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최관호는 이러한 돌발상황이 일어나자 흥분한 군중들을 상대로 시종일관 설득하여 해평면 뿐만아니라 인근 면에 이르기까지 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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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문화신문 기자 / gminews@hanmail.net  입력 : 2017년 04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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