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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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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월 후인 2018년 6월13일에는 새로운 구미시장이 탄생한다. 남유진 현 시장이 3선제한 규정 때문에 더 이상 출마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역 프리미엄이 사라진 가운데 진보와 보수, 개혁보수간의 대결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구미시장선거는 9월 중순 현재까지는 물밑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추석과 함께 10일에 걸쳐 연휴가 이어지는 10월 초순부터는 후보군들이 지상으로 걸어나올 것으로로 전망된다.
그 어느때보다 치열한 접전이 예상된다. 특정 정당의 후보가 되면 당선된다는 방정식이 이번에도 통할지가 관심이다. 달라진 정치상황이 본선전에서 불꽃을 튀게 할 수 있다는 전망이 갈수록 힘을 얻으면서 흥미를 더해주고 있다는 점은 관전포인트가 아닐 수 없다.
구미시민들의 관심 또한 역대 선거에 비해 뜨겁다. 구미공단의 장기침체로 위기에 몰린 지역경기에다 아파트 미분양 대란 신호가 곳곳에서 감지되면서 ‘구미를 일으켜 세울 시장’을 뽑아야 한다는 기대감이 상승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8월20일 현재 경북문화신문이 확인한 출마 결심 인사는 11명으로 ▶김봉재 구미시 새마을회 회장▶김석호 경북경제 연구소장 ▶김철호 형곡새마을 금고 이사장▶박성도 경상북도 도지사 비서실장 ▶박종석 구미아성 요양병원 상임이사▶유능종 법무법인 유능 대표 변호사 ▶이규건 서정대 교수▶이양호 한국 마사회장 ▶채동익 전 구미시 경제통상국장▶한기조 구미.선산 장원방 추진위원장 ▶허복 구미시의회 의원(이상 가나다 순) 등 11명이다.
이들 중 김철호, 채동익, 한기조 출마예상자는 민주당,김봉재, 김석호, 박성도, 이규건, 이양호, 허복 출마예상자는 자유한국당, 유능종 출마예상자는 바른정당 경선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또 박종석 출마예상자는 특정 정당 경선 참여와 무소속 출마를 놓고 고심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김관용 현 지사가 민선 구미시장으로 첫 출전했던 1995년부터 2014년 6월4일 치러진 지방선거에 이르기까지 여섯번에 걸친 구미시장 선거전은 어땠을까.
▶ 민선 구미시장 시대 개막
▷박미진 시장은 마지막 관선 시장, 2개월 최단 임기
1993년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행정의 효율성를 주창하면서 도농통합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여파는 통합 대상지역인 선산군으로 몰아닥쳤다. 선산지역 출신 도의원은 통합 반대에 사활을 걸면서 삭발에 들어갔고, 일부 선산지역 주민들은 역사의 중심인 선산군의 구미시 종속은 용납될 수 없다면서 거세게 반발했다. 하지만 정치적 ▪시대적 기류는 선산군의 구미시 통합으로 이미 기울고 있었다.
통합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던 1994년 1월1일부터 1995년 4월 19일까지 관선 시대의 길을 걸었던 이는 박병련 시장이었다. 혹한이 몰아쳐도 주머니에 손을 넣는 일을 절대 금기사항으로 여길 만큼 자기 관리에 엄격하기로 유명했던 박시장은 부하 공무원들에게도 동일한 잣대를 들이댔다.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구미시청 역사의 잔잔한 일화로 잊혀지지 않고 있다.
뒤를 이은 이가 바로 박미진 시장이었다. 민선시장 선거 열기가 후끈 달아오르던 1995년 4월 20일부터 선거가 종료되던 1995년 6월 30일까지의 2개월 동안 시장직을 수행한 박시장은 새로운 시정방침을 정하지도 않았다. 임기 2개월의 박시장에게는 사실상 민선 시장 선거 업무를 무리없이 완수해야 한다는 책무가 주어져 있었다.
▷김관용 민선 초대시장 취임
구미면이 읍으로, 읍이 구미시로, 구미시가 통합 구미시라는 역사적인 기록을 쓰기까지 관선 시장을 거친 이는 14명이었다. 그 마지막 바통을 이어받은 이가 바로 지금의 경북도지사인 김관용 민선시장이었다.
하지만 민선시장이 되기까지는 겹겹의 능선을 타고넘는 고행의 순간순간 이었다. 고아읍 출신으로서 용산세무서장을 끝으로 새누리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 공천장을 받고 낙향한 당시 김관용 후보는 평생을 구미에서 터전을 일구며 살아온 전병억 당시 자유민주연합 전병억 후보와 일전불사의 투지를 불살라야만 했다.
김윤환, 박세직 국회의원이라는 든든한 후원군이 버티고 있었지만 선거전은 한치 앞을 내다볼수 없을 만큼의 안개 정국이었다. 사실상 일대일 구도였지만, 뒤늦게 뛰어든 무소속 강구휘, 장경환 후보의 파괴력도 만만치 않았다. 당선권에서 이들 후보가 멀어지기는 했지만 을구가 텃밭인 김관용 후보는 같은 을구 출신인 장경환 후보의 선전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었다.
역으로 갑구가 텃밭인 전병억 후보는 같은 갑구 출신의 강구휘 후보의 선전에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마치 미분법을 풀 듯 얽히고 설킨 복잡 다단한 상황의 종료는 김관용 후보에게 승기를 안겨주었다.
개표결과 김관용 후보는 4만 6130표로 4만 4469표를 얻은 전병억 후보를 1천 661표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개표가 진행되던 1995년 6월 27일 늦은 밤에는 희비가 엇갈렸다. 갑구지역 개표가 진행되던 올림픽 기념관에서는 전병억후보 지지자들이 환호성을 울렸다. 개표결과 3만 5296표를 얻은 전병억 후보가 3만 2539표를 얻은 김관용 후보를 2천 757표차로 눌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을구에서는 상황이 역전됐다. 1만 3591표를 얻은 김관용후보가 9천 173표를 얻은 전병억 후보를 4천 418표차로 따돌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갑, 을구 합계결과 김 관용 후보가 1천 661표차로 신승을 거두었다.
이외에도 갑구 출신의 무소속 강구휘 후보는 15.08%인 1만9805표를 얻었고, 을구 출신의 무소속 장경환 후보는 11.73%인 1만 5404표, 무소속 강상수 후보 2천 891표, 무소속 경광수 후보는 2천 584표를 얻었다.
▷무적의 재선, 단독출마한 김관용 후보
초선 임기는 3년이었다. 제2대 구미시장 선거가 1998년 6월4일로 다가오면서 1천6백여차로 분루를 삼킨 전병억 후보의 재도전 의지는 가열되기 시작했다. 1995년 선거의 후유증을 다스리기 위해 붓글씨로 3년의 세월을 억눌러 지냈던 전병억 회장이었지만, 3년의 세월이 흐른 구미시의 정세는 상전벽해돼 있었다.
결국 주변의 간곡한 만류에 힘입어 전병억 회장은 재선 도전 의지를 가슴 깊이 들여놓아야 했고, 선거전은 김관용 후보의 단독 출마로 매듭됐다.
▷ 이강웅 후보와 2파전, 3선 고지 오른 김관용 후보
단독출마로 재선의 벽을 쉽게 무너뜨린 김관용 후보에게 세 번째 선거는 두 번째의 단독 출마를 허용하지 않았다. 한나라당 후보 경선부터 김관용 후보는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감사원 사무관 출신의 이규건후보가 경선도전장을 냈기 때문이었다. 경선초반부터 과연 김관용 후보가 몇 %로 차로 이기느냐는 식의 결론이 예고된 경선이었지만, 40대 초반이라는 패기와 참신함을 앞세운 이규건 후보의 도전장은 만만치 않았다.
박정희 체육관에서 경선결과가 발표되자마자, 체육회 사무실로 달려온 김관용 후보가 ‘몇 %로 차로 이겼는지“를 계산 하는 등 예민한 반응을 보였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김후보가 이러한 반응을 보였던 것은 본선전에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이끌던 한국 미래연합 이강웅 후보가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본선에 오른 한나라당 김관용 후보는 고시동기이면서 친구지간으로 포항 부시장을 지낸 한국미래연합 이강웅 후보, 민노당 황준영 후보등과 3파전의 길을 가야만 했다.
2002년 6월 13일, 결과는 빗나가지 않았다.
김관용 후보는 66.4%인 6만 6059표를 얻으면서 2만 1691표로 21.8%를 얻는데 그친 이 강웅 후보를 여유있게 물리치며 3선 고지에 안착했다. 민노당 황준영 후보는 11.79%인 1만1736표였다.
▷치열했던 4대 민선시장 선거전
제4대 구미시장 선거전가 있던 2006년의 구미정가는 급변기였다. 2005년 10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수도권 규제완화 방침을 천명하고 나선 것이었다. 엘지 기업의 파주 이전설 등으로 곤욕을 치루던 김관용 시장은 좌불안석이었다. 수도권 규제완화는 구미에 치명타로 다가올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챦아도 경상북도 도지사를 겨냥하고 있던 김관용 시장으로선 한나라당 후보 경선에서 정장식 포항시장, 김광원 국회의원이라는 거물의 벽을 넘어야 할 판국이었다.
김관용 당시 시장의 지혜는 남달랐다. 2005년 11월 7일, 시장은 정부와 여당의 수도권 규제 완화 조치에 반발한 구미시민과 도민들을 공단운동장에 집결, 대규모 궐기 대회를 개최하는 대단함을 보였다. 하지만 갈 길은 편치가 않았다.
이처럼 수도권 규제완화 방침 발표로 구미정국이 요동을 치던 2006년 5월 31일의 제4대 구미시장 선거는 과열전으로 치달았다.
남유진 국가청렴위원회 홍보협력국장, 윤영길 구미시의회 의장, 김진태 변호사, 김석호 전 경북도의회 의원, 채동익 구미시 경제통상국장등 5파전으로 전개된 한나라당 후보 경선전은 뜨겁기 그지 없었다.
결국 경선 본선에서 남유진 현 시장은 김석호 전 도의원, 김진태 변호사, 윤영길 의장을 누르고 한나라당 후보에 지명됐다. 후보별 자성론도 적지 않았다. 구미시 역사상 최장수 의장을 지내면서 탄탄한 입지를 다졌던 윤영길 의장은 뒤늦게 경선전에 뛰어들면서 기대이상의 결과물을 도출시키지 못한데 대해 내내 아쉬워 했다. 김성조 당시 국회의원과 김석호 전 도의원은 오랜 기간 동안 다져온 우정에 금이 가기도 했다.
본선 결과는 남유진 후보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안겨주었다. 매일 아침마다 박정희 대통령 생가를 참배할 정도로 박정희 정신을 추앙하던 한나라당 남 후보는 75.89%인 9만8758표를 획득했다. 반면 무소속 채동익 후보 1만5391표(11.82%), 민노당 최근성 후보 1만 3265표(10.19%), 무소속 신수식 후보 2천 719표 등이었다.
▷무경선 한나라당 남유진 후보, 김석호 후보 선전
2010년 6월 27일 실시된 제5대 구미시장 선거에서 남유진 시장은 경선없이 지명을 통해 한나라당 후보의 명찰을 달았다.
하지만 쉽게 한나라당의 명패를 얻었지만 남유진 후보는 갈수록 거세게 추격해 오는 친박연합 김석호 후보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이명박 정부시절, 친이계에 냉정했던 구미의 친박 민심이 선거를 앞두고 급하게 창당한 친박연합에 이유 없는 사랑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친박 정서가 군중 심리를 보이던 시기였다.
그러나 투표결과 승기는 남유진 후보에게 돌아갔다.
개표결과 남유진 후보는 53.09%인 7만 1719표, 친박연합 김석호 후보는 33.51%인 4만 5263표, 무소속 구민회 후보는 13.39%인 1만 8091표를 얻었다.
▷예상을 뒤엎은 50%대 당선, 남유진 시장의 입지 강화
3선을 겨냥한 남유진 시장은 새누리당 경선 당시부터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초선 당시부터 줄기차게 도전장을 내 온 채동익 전 구미시 경제통상국장과 재선 당시 출마를 결심했다가 뜻을 접은 이재웅 전 경상북도 지사 비서실장에 이어 김용창 구미상의 회장이 출사표를 냈기 때문이었다.
경선 시기와 방법도 논쟁거리였다. 여기에다 세월호 참사까지 겹치면서 당초 경선일정이 연기되었는가 하면 여론조사와 대의원 선거 방식으로부터 여론조사 방식으로 경선 방식이 뒤바뀐 경선전은 혼란의 극치였다. 이 과정에서 확인되지 않는 설이 급속하게 확산되면서 정치권은 반목과 갈등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 과정에서 이재웅 후보에 이어 채동욱 후보가 경선에 불참키로 하면서 경선전은 남유진 시장과 김용창 상의회장등 2파전 양상으로 판세가 잡혔다.
하지만 김용창 후보가 8년 시장 관록의 남유진 후보의 벽을 뛰어넘는 다는 것은 한계였다. 여론조사에 의한 경선 결과 남유진 후보 45.3%, 김용창 후보 27.3% 였다.
이어진 본선에서도 곳곳에 암초가 도사리면서 선거전이 긴박하게 돌아갔다. 그 중심에 서 있었던 것이 이재웅 후보와 김석호 후보의 단일화 논의였다. 하지만 새정치 민주연합이 후보를 내고, 단일화 논의가 불발되면서 남 시장의 당선은 미리 예고됐다.
선거 결과 남유진 시장은 40%대 후반에 머물 것이라는 당초 예상을 뒤엎고 전체 투표수 16만 250명 중 과반을 웃도는 52.59%인 8만 2905표를 얻었다.
반면 이재웅 후보는 17.45%인 2만 7250표,김석호 후보 15.91%인 2만 5904표, 구민회 후보 는 14.01%인 2만 2111표를 얻는데 그쳤다.
▶역대 관선 구미시장
작은 시골마을에 불과했던 구미가 전국 최대의 경제도시로 급부상 할 수 있었던 것은 구미출신 박정희 대통령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1969년 전자공업진흥법이 제정되고, 이듬해인 1970년 8월 24일 구미전자공업전문단지 조성이 본격화되면서 지금의 구미시는 선산군 구미읍으로 격상됐다. 이어 8년 후인 1977년 2월 15일 구미시의 전신인 경상북도 구미출장소는 구미읍과 칠곡군 인동면을 끌어안으로 급부상을 했고, 1년 후인 1978년 2월 15일 구미시로 승격이 됐다.
이어 구미시는 17년 후인 1995년 1월 선산군과 통합하며, 전국 최대 규모의 도농복합도시로 거듭 났다. 1978년 구미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2017년 현재까지 구미시정을 이끈 민,관선시장은 남유진 현 시장을 비롯해 16명으로 경북도지사인 김관용 민선시장은 11년을 역임하며 최장수, 박미진 마지막 관선시장은 최단기 2월을 역임했다.
1978년 2월 15일 시 승격과 함께 초대시장으로 취임한 백세현 시장은 6월 동안 역임한 후 수원시장으로 전출을 갔고, 1978년 8월 2일 제2대 시장으로 이규선 시장이 취임했다.
1978년 2월 15일 시 승격과 함께 초대시장으로 취임한 백세현 시장은 6개월을 역임한 후 수원시장으로 전출을 갔고, 78년 8월 2일 제2대 시장으로 이규선 시장이 취임했다.
▷78년 2월 15일부터 78년 8월 1일까지 6개월을 역임한 백세현 초대시장은 새 구미 역사 창조를 기치로 내걸고, 유신총화, 공업화 촉진 등을 시정방침으로 정했다. 공단도시 구미, 10월유신이라는 시대상을 한 눈에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박정희 대통령 서거를 불과 1년여 남겨놓은 시점이었다.
백 시장의 뒤를 이은 ▷이규선 시장은 78년 8월 2일부터 79년 5월 13일까지 9개월을 역임하면서 밝고 건강한 새 구미를 건설하겠다며, 총화단결과 개발촉진을 역설했다.이 시장에 이은 ▷정충검 시장은 79년 5월 14일부터 81년 6월 30일까지 관선시장으로는 비교적 오랜 기간인 2년 2개월을 역임했고, 이 기간 동안 80년대를 선도하는 새 구미 건설을 역설하면서 실천하는 새마을운동을 강조했다. 이 기간 중에 박정희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으니, 정 시장의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정 시장에 이은 ▷이문환 시장은 전두환 군사정권이 득세하던 81년 7월 1일부터 82년 9월17일까지 1년 3개월동안 역임하면서 화합과 참여로 위대한 구미 건설을 역설했다. 수출산업지원과 생활복지 향상에 역점을 두었는데, 역대시장으로는 처음으로 복지문제를 거론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82년 9월 18일부터 83년 12월 26일까지 1년 3개월동안 재임한 신우균 시장은 밝고 푸르고 활기찬 선진도시 건설에 역점을 두면서 수출산업 지원에 행정을 올인 했고, 뒤를 이은 ▷박순태 시장은 83년 12월 27일부터 86년 3월 5일까지, 2년 동안 시장으로 있으면서 봉사행정의 내실화와 수출산업 지원, 도시개발촉진에 역점을 두었다. 이 당시 비로소 오늘의 친절행정서비스의 효시라고 볼 수 있는 봉사행정이 등장했다.
▷88올림픽이 있던 86년 3월 6일부터 88년 6월 10일까지 관선시장으로 가장 긴 2년3개월 동안 자리를 지킨 이상직 시장은 밝고 푸른 도시 건설을 기치로 내걸고, 민의 존중 봉사, 시민복지 증진, 수출산업지원에 역점을 두었다. 구미시가 지금 추진하고 있는 녹색도시, 친절서비스, 복지시책 등의 시초를 이상직 시장 시절에서 읽을 수가 있다.
▷88년 6월 11일부터 90년 7월 4일까지 2년1개월을 역임한 서상은 시장은 자랑스러운 구미를 만들기 위해 문화 창달, 신뢰행정, 균형개발을 역설했다. 역대시장으로는 처음으로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90년 7월 5일부터 91년 7월 15일까지 1년 동안 자리를 지킨 양종석 시장은 모든 시정 역량을 시민이 중심의 사회가 되는데 초점을 맞췄다. 시민을 편하게 하고, 잘살게 하며, 즐겁게 한다는 시정방침이 눈길을 끈다.
▷91년 7월 16일부터 92년 7월 2일까지 1년 동안 역임한 이종주 시장은 활기찬 새 구미 건설을 위해 봉사행정, 도시개발 촉진, 수출산업 지원, 문화 복지 증진에 역점을 두었으며, ▷92년 7월 3일부터 93년 3월 6일까지 8개월 동안 자리를 지킨 김정규 시장은 지방자치시대 개막에 따라 수준 높은 주민자치를 역설했다. 균형있는 도시 개발도 눈길을 끈다.
▷김재학 시장은 93년 3월 7일부터 93년 12월 31일까지 9개월동안 역임하면서 전임시장과 거의 동일한 시정 방침을 지향했다.
뒤를 이은 ▷박병련 시장은 통합 전 시장과 통합 후 시장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94년 1월 1일 통합 전 시장으로 취임한 박 시장은 통합 이후인 95년 1월 1일부터 95년 4월 19일까지 통합전후를 합쳐 1년4개월 동안 재임했다. 부하 공무원을 엄격하게 다루기로 정평이 났던 박 시장은 청렴, 무사, 친절 신뢰, 책임 봉사를 시정방침으로 정했다.
▷95년 4월 20일부터 95년 6월 30일까지 관선시장으로는 최단기간인 2개월동안 재임한 박미진 시장은 새로운 시정방침을 정하지 않은 채 박병련 전임시장의 방침을 그대로 이었다.
70일 후면 민선시대가 열리는 역사적인 시간을 목전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4명의 관선시장 시대를 역사 속으로 흘려보내고 ▷김관용 시장이 95년 7월 1일 민선시대를 처음 열었다. 김 시장은 도지사 출마를 위해 직을 사퇴하기까지 2006년 2월 27일까지 3기 11년 동안 직을 수행하면서 1-3기 때마다 시정역점 사항을 변경했다. 1기 때는 함께 뛰는 시민, 앞서가는 구미를 기치로 내걸고, 정직한 봉사시정, 힘 모아 지역개발, 쾌적한 도시건설, 질 높은 복지문화를, 2대 때는 동일한 슬로건에다 활력 있는 지역경제, 함께하는 복지실현, 인간중심 도시개발, 개성 있는 문화 창출, 생산적인 경영시정에 역점을 두었다.
3대에 들면서 김 시장은 디지털산업에 행정력을 올인 했다. 이를 반증하 듯 슬로건은 젊은 도시, 열린 미래, 디지털 구미였고, 활기찬 경제, 쾌적한 환경, 따뜻한 복지, 멋있는 문화를 위해 매진했다.
▷민선 4기 시장으로 2006년 7월 1일 취임한 후 3선 임기 종료를 목전에 둔 남유진 시장은 위대한 구미, 찬란한 구미를 기치로 내걸고 잘사는 구미, 건강한 도시, 행복한 시민, 어울림 문화에 중점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