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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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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인한 아픔과 혼란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제발 빨리 진정되길 빌고 또 빌지만, 그 위세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도 요즘은 동화를 통해 많은 위안을 얻고 있는데, 유은실의 「멀쩡한 이유정」도 그중 하나다.
길치인 유정은 4학년인데 아직도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을 잘 못 찾는다. 그래서 동생 유석이 뒤를 은근슬쩍 따라 다닌다. 어느 날 유석은 먼저 집에 가버리고 어쩔 수 없이 혼자 가게 되었는데, 약국까지는 잘 찾아갔으나 거기서부터 길을 잘못 들어 다른 입구로 아파트에 들어선다. 똑같이 생긴 단지를 빙빙 돌다가 점점 겁이 나는 유정이, 그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학습지 선생님을 만난다. 휴우 다행이다. 그런데 선생님이 먼저 입을 연다.
“유정아, 잘됐다. 나 너희 집 좀 데려다 줘.”
“예에?”
“아파트 단지를 10분째 헤매고 있었거든.”(89쪽)
우리 모두는 멀쩡한 사람들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멀쩡하다’란 말의 뜻은 이렇다.
1흠이 없고 아주 온전하다. 2정신이 아주 맑고 또렷하다. 3지저분한 것이 없고 아주 깨끗하다. 4속셈이 있고 아주 약삭빠르다. 5그릇된 짓을 하는 태도가 예사롭거나 뻔뻔하다. 동화 속의 유정과 선생님은 보통 시민으로서 풀이2에 해당하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유정이는 재개발 구역이 된 옛 동네에선 그렇지 않았다. 담벼락의 낙서나 마당에 심은 나무들이 조금씩 달랐기 때문에 집을 향해 걸어가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욕망을 한껏 충족시킨다는 대도시, 신도시의 획일적인 모습 속에서 유정이의 집찾기는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길찾는 방법을 잃어버린 것이다. 요즘 아이들이 잃어버린 것은 길만이 아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연필을 비롯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찾을 생각조차 안 하고, 필요할 때마다 새로 사버린다. 무엇을 잊어도 마찬가지. 아쉬움은 없고 그냥 다른 것으로 대체하고 마는데, 심지어 친구 관계까지 그런 것 같다. 그런데 동화에선 선생님도 길을 모른다. 현대를 살아가는 누구나 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모두가 헤매고 있는 것이다.
지금 회자되는 신천지의 구성원 중 60%가 청년이라고 한다. 미래가 보이지 않음에 절망하여 신천지를 찾아간 것인데, 가족이나 학업, 직장보다 ‘말세와 영생’이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144,000’이란 숫자 안에 들기만 하면 구원이 되어 특권(왕같은 제사장)을 누리며 육신 영생할 수 있다고 했으니, 이 얼마나 달콤한 일인가. 그렇지만 사탕으로 유혹하는 종교는 없다. 그것은 종교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만 해도 갇혀있는 좁은 사고를 벗어나기 위해 깨달음의 긴 여정에 나서길 강조하고 있으며, 기독교 역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나아가 원수마저도 사랑하라고 했으니 이 얼마나 어려운 길을 제시하고 있음인가. 무릇 종교란 이타적이고 겸손한 자세로 일상을 실천해 나가는 일이지 결코 환상적인 이미지로 포장된 무엇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젊은이들이 그곳으로 몰려갔다는 것은 대체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 그건 우리 사회가 그들의 손을 잡는 데 실패했다는 방증이다. 젊은이들에게 제대로 생각할 여유도 주지 않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할 공간도 제공하지 않은 채 버려두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길이 아닌 길을 가고 있었는데 어찌 그들만이 바른 길을 가길 바랄 수 있단 말인가.
다행인지는 모르나 코로나19로 인해 우리는 자신을 깊이있게 들여다 볼 기회를 맞이한 듯하다. 많은 것을 희생한 대가이다. 재난의 광풍이 어느 정도 수습이 된다면 우리는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바이러스 한 방에 이렇게 쉽게 무너진 이유는 무엇인지, 왜 젊은이들이 환상을 찾아 떠났는지에 대해, 다시는 이러한 재앙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말이다.
어린 유정이들의 상처를 보듬어주어야 자라면서 달콤한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힘든 이들에 게 무관심했음과 지독한 편견을 지니고 살고 있었음을, 기복을 신앙으로 알고 나의 이익만을 위해 눈을 희번덕거렸음을 뉘우침으로 고백해야 한다. 우리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자라는 세대는 요행을 행복으로 여기고, 뜬금없는 구원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것이다. 우리에게는 늘 두 갈래 길이 놓여있다. 때가 되면 과거의 잘못을 어김없이 반복하는 길과 지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길.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내심 불안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섬뜩함에 사로잡힐 때가 더 많았다. 증오에 가까운 독설과 저주에 휩싸인, 자신의 진영 외는 존재 가치가 없어 사라져야 한다는 극한의 논리들이 코로나19의 정보 사이사이로 흘러넘칠 때는 절망감이 앞섰다. 위기의 순간에도 이러한 감정이 분출될라치면 그 지향점은 무엇이던가. 신종 바이러스 출현으로도 종식되지 않는 이 지독한 혐오는 그칠 줄 모른다. 이 모든 것들은 기본적인 소통까지도 막아버리는 단절장치일 뿐인데도 하루가 다르게 골은 깊어지기만 한다.
끝없이 반복될 바이러스의 재앙 앞에서 우리는 인간임을 공감하고 겸허해져야 한다. 그리고 ‘인간의 욕망이 저지른 과오’ 앞에서 스스로를 탓해야 하고, 자라는 세대에게 ‘밑도 끝도 없는 증오’를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머잖아 닥칠 신종 바이러스와 거짓 구원의 잘못된 만남은 언제든 우릴 나락으로 떨어뜨릴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저자소개>
선주문학회 회원・공감독서활동가. 대구교육청 1인1책쓰기 지도교사・중앙일보 NIE 연구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