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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재원
마을 매니저·구미시생활공감정책참여단대표·선주문학회 회장 |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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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을 하고 사회봉사의 첫발을 디뎠을 때, 나의 미래는 온통 분홍빛 일색으로 무엇이든 새로운 성취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남을 알아주지 않아도 나의 봉사활동을 모두가 알아줄 것처럼, 그게 아니라면 내가 일을 한 만큼 남도 나를 인정해 주리라 생각했다. 재직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학생과 가족을 대상으로 공감독서회를 조직하였고, 일반인 대상의 몇몇 독서회에도 가입하였다. 학생진로 체험 봉사니 어르신 대상 급식 봉사에 참여하고, 정책제안 모임에 나가 활발하게 발표하고 온라인 활동도 하였다. 그러다가 주민자치의 일환으로 마을 가꾸기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런 일들을 3년, 길게는 5~6년 동안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사회활동에서 난관에 부딪힐 때 사람들은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나 역시 일보다 사람이 먼저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잘 마무리되어 가던 일이 한 사람의 비협조로 인해 원점으로 되돌아간다든지 서로의 생각 차이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일을 종결할 수밖에 없었던 일들이 그러한 예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관계를 논하기 전에 내면의 공허함을 발견할 때가 더 많다. 지향점을 급하게 설정했다든지 미처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생기는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비교적 계획이 잘된 일을 해나가면서도 다짐한 것이 흔들리고 후회스런 마음이 들 때면 철학의 빈곤에 허덕이곤 한다. 그래서 내면을 충일하게 할 글들을 찾아 읽으면서 헛헛함을 달래기 위해 노력한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자유는 공론영역에 들어서야 비로소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내 이야기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같고 다름을 인식하고 내가 누구인지 남과 어떻게 다른지 알아야 비로소 공적 삶의 의미가 있다고 했다. 누구나 자기의 고유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자유이며, 자유공동체는 다양한 관점 속에서 실현된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자신의 관점을 이치에 맞거나 합리적 형태로 표출하는 게 아니라 감정이나 기분에 치우쳐 표현하는 수가 많다. 옳고 그른 판단의 문제도 결국 감정에 기울어져 사적 공간 속에서 해결되곤 한다. 더구나 모든 것이 경제적 동기에 지배받는 오늘날엔 오로지 경제적 이득에만 목표를 두고 행동하기 때문에 자신의 관점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가 없다. 즉 개인의 자유는 보장되지 않으며, 오직 경제적 규칙에만 순응하는 꼴이다.
더군다나 경제적인 이익만 앞세우는 개개인은 낱낱이 분해되어 각자 이기적인 타산을 하는 바람에 이들을 공통적으로 묶어 줄 방법이 없다. 같은 공간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경쟁이나 비교우위가 바탕이 된 만남은 애초 신뢰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익을 떠난 관계 맺기는 피상적일 수밖에 없어 인간관계를 맺기도 유지하기도 힘들다. 철저히 시장 논리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우위에 따라 정체성이 결정될 뿐이다. 너도나도 ‘가진 것’을 중심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데 집중하다 보니 불평등은 일상이 되고, 사회적 관계는 빈곤할 수밖에 없다. 대량생산과 소비를 확대 재생산하는 구조에서 인간 역시 인격과는 무관한 소비자로만 존재하니, 오죽하면 인간도 사물이 되어버렸다고 할까.
마을 일을 열심히 해온 내 모습을 생각해 본다. 아모르 문디(Amor mundi; 세계 사랑)는 아렌트 철학의 핵심인데, ‘세계’는 세상이고 우주, 공적 영역이며, 공동체이다. 나도 여태 마을이란 공동체를 사랑해 온 것 같은데, 유감스럽게도 사랑의 정확하고 정밀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흔히 얘기하는 100세 시대 인생 계획이니, 사익을 초월한 보다 높은 차원의 공동체적 가치 실현이나 다수의 이익 추구 등의 거창한 의미가 아님은 분명하다. 아모르 문디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휘가 주는 감미로움에 솔깃하여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조바심치고 있었던 건 아닌가 모르겠다. 내가 세운 계획을 주민들도 좋아해 주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당신들을 위해 밤낮으로 노력하고 있으니, 때가 되면 나를 향해 환호의 손길을 보내야 한다는 당위를 품고 있었는지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헌신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은 사랑을 구걸하는 일이나 진배없다. 사랑은 아낌이요, 아낌은 상대의 수고로움을 온통 내가 겪는 것이다. 힘들다고 책임을 전가한다든지 얼마나 힘든지 네가 해보라고 던지는 것도 마찬가지로 사랑을 애걸하는 행위이다. 마을이란 공적 영역에서 서로가 나란히 한 걸음씩 나가기보다 그럴듯한 미래상을 제시하면서 은근히 변화를 조장해온 것은 세계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 혐오에 가까움을 왜 몰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