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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광화(hikari1029@naver.com) |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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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만해도 병원에 가 봐야겠다.”
휴일이 주는 달콤한 휴식을 깨는 갑작스런 엄마 전화에 심장이 먼저 덜컥 내려앉았다.
“또 왜?”
화들짝 놀라서 소리 지르는 내 말에 엄마는 망설이듯 머뭇머뭇 대답하신다.
“어제 너희 아버지 산소에 가서 잡초 뽑다가 풀에 걸려 넘어졌는데, 갈비뼈가 너무 아프다.”
급하게 달려간 병원 응급실에서 X-ray를 찍으니 갈비뼈 3개가 하얗게 금이 간 것이 내 눈에도 확실하게 보였다. 몇 해 전에는 아버지 산소에 가셨다가 츠츠가무시병으로 온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으셨는데, 혼자 지내실만하다 싶으니 또 산소를 찾으셨다가 이런 사달을 일으킨 것이다. 엄마에게 화가 날 법도 하지만 어떻게 전화를 받자마자 “어쩌다가요?” “많이 다쳤어요?” “움직일 수는 있어요?”도 아니고 “또 왜?”라니. 그런 말이 나온 것은 엄마에 대한 걱정에 앞서 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가서 해야 할 여러 가지 복잡한 절차에 대한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또 이렇게 갑작스러운 일이 생기면 그나마 제일 가까운 내가 달려가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에서 나온 말이라고 해도 “또 왜?”라고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어린 시절, 유난히 뽀얀 피부를 가진 엄마가 예쁜 원피스 차림으로 학부모 대표로 학교에 오시는 날에는 내 어깨가 저절로 으쓱해졌다. 소풍날이면 선생님 도시락을 꽃밭처럼 싸 주시는 엄마로 인해 학년 선생님들의 귀여움은 내 몫으로 돌아왔었다. 부잣집 고명딸로 자라 붓글씨, 한자도 잘 쓰시고 노래와 춤도 잘하시는 엄마를 주변 친척들은 공주님이라고 불렀고 그런 엄마가 나는 참 좋았다.
공주 같은 엄마가, 늦은 나이에 첫 딸을 낳은 나의 산후조리를 위해 월요일이면 2시간의 시외버스와 1시간 이상의 시내버스를 타고 우리 집에 오셨다가 금요일이면 돌아가는 수고를 자청하셨다. 남편이 모시러 가고 오고 하겠다고 해도 바쁜 사람 여럿 움직일 필요 없다고 하셨다. 주말이면 집에서 아버지가 일주일 동안 드실 식사 준비와 밀린 일을 하시고, 월요일이면 나한테 오는 날이 두 달 가까이 계속되었다.
기상관측 사상 역대 최고로 더웠다는 1994년 7, 8월에 에어컨도 없던 아파트에서 엄마는 힘들다는 소리 한번 안 하시고 막내딸을 위한 미역국을 끓이셨다. 소고기미역국은 느끼하다고 투정하면 대합을 넣은 시원한 미역국을, 그것도 싫다 하면 황태 넣은 미역국을, 산후 회복에 좋다고 전복 미역국에 또 틈틈이 호박즙, 잉어즙으로 원기를 돋우어 주는 음식들을 끊임없이 해내셨다.
그 와중에 외손녀는 한낮 기온이 최고로 올라가는 2시쯤이면 악을 쓰고 울었다. 그러면 엄마는 땀 뻘뻘 흘려가면서 목욕시키고 선풍기 바람은 아기에게 해롭다고 부채질로 더위를 식혀주었다. 말간 얼굴로 우유를 먹고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잠든 외손녀를 대견한 듯이 바라보는 엄마의 수고를 그때는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몸이 약해 약을 달고 사시던 엄마가 그 먼 길을 어떻게 오고 가셨는지 물어보지도, 걱정도 하지 않았던 철부지 딸이 그때의 엄마는 서운하지 않았을까?
복잡한 입원 수속 끝에 진통제 주사를 맞고 침대에 누우시자 긴장이 풀리고 통증이 가라앉아서인지 바로 잠이 드셨다.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내며 주무시는 엄마의 얼굴을 가만히 손으로 쓰다듬어 본다. 주름진 엄마의 얼굴에 미안한 내 마음이 겹쳐지면서 콧날이 시큰해지고 눈이 시려왔다. “엄마.” 혼잣말처럼 조용히 불렀는데 들으신 것처럼 눈을 뜨셨다.
“아직도 아파?” “이젠 괜찮다. 바쁠 텐데 또 힘들게 만들었네.” “힘들기는……, 그런데 엄마, 나현이 낳고 나 몸조리할 때 그렇게 더운 날 그 먼 길을 어떻게 오갔어?” “야가 30년이나 지난 일을 새삼스럽기는……. 세상 엄마들한테 물어봐라. 그 길이 힘들다고 생각하는 엄마는 아무도 없을 끼다.” “그때 아버지는 혼자 어떻게 지내셨을까?” “아버지는 너 기다린다고 빨리 가라고 했지, 불평 한 번 안 하셨다.” “그때, 엄마한테도 아버지한테도 고맙다, 미안하다. 말 한 번 하지 않았던 나한테 섭섭하지 않았어?” “자식들한테 서운한 마음 갖는 부모는 없다. 너희들한테 짐 안 되고, 뭐든지 해주고 싶은데, 나이가 드니 자꾸 애만 먹이네.” “엄마랑 아버지 덕분에 우리 2남 3녀가 다 잘 사는데 해준 것이 왜 없어?” 당신이 아픈 것보다 자식들한테 짐이 되는 상황을 걱정하는 엄마의 화수분 같은 사랑에 자꾸 목이 메어왔다.
몇 달의 투병 생활이 끝나고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자 엄마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아버지 산소에 가는 것이었다. 아무리 말려도 어차피 가실 걸 알기에 이제 엄마한테 가면 아버지 산소길에 운동 겸 산책 겸 동행하기로 했다. 봄이면 매화꽃이, 여름이면 백일홍이, 가을이면 노랗게 물드는 은행나무가 아버지인 듯 반기는 산소에서 이순耳順이 지나는 나이에 비로소 깨닫는다. 나의 인생에서 가장 큰 선물은 부모님의 사랑이었고, 당신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는 걸.
아버지 생전에 못 해서 죄송한 말, 머뭇거리는 동안 엄마에게도 영영 놓쳐 버리게 될 수도 있는 말을 이제는 틈만 나면 자주 쓰기로 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이제는 안 하고 오면 전화로도 하게 되는 말,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김광화(hikari102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