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모 사곡동에 관한 글을 몇 회 썼더니 뜻밖에 초등학교 동기인 홍윤보에게서 카톡이 왔다. 어린 시절의 아득한 추억 한 자락과 그 시절 같이 찍은 사진 한 장, 친절하게도 전화번호까지 적어 놓았다. 어찌 반갑지 않으랴. 그리하여 우리는 상모동의 한적한 막걸리 집에 마주 앉게 되었다. 자연스레 어린 시절의 옛 이야기가 줄을 이었고, 초등 동창들의 안부와 근황이 화제에 올랐다. 윤보와는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으로 몇 년을 함께 살았다. 두 집 사이에는 둘만 아는 비밀통로가 있어서 언제든지 자유롭게 서로의 집을 오갈 수 있었다.
그러다 사진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 갔고, 1960년대 사진을 찍어준 이팔봉 선배는 뜻밖에도 윤보의 외삼촌이었다. 당시 사진관은 읍내로 나가야 역전 근처에 겨우 하나 있을 정도로 드물었다. 그런데 상모, 사곡, 임은, 광평의 사진이란 사진은 거의 전부라 할만큼 이팔봉 선배가 찍은 것이 많다. 나와 여동생, 어머니까지 꼬마 시절의 내가 들어있는 사진은 전부 이팔봉 선배의 솜씨다. 선배께서는 그 시절에 자신의 사진기로 사진을 찍었고, 집안에 암실을 만들어 직접 인화까지 하였으니 사실상 직업적인 사진사라 할 수 있겠다. 이런 정도였으니 선배는 바로 구미의 사진 일세대이기도 한 참으로 보석처럼 귀한 구미 근대의 개척자이다.
윤보의 말을 들어보니 선배께서는 1937년 생이고 아직도 대구에 살아계신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래 전에 개혁 개방 직후부터 중국과 소련을 드나들면서 한소친선을 위해 노력하신다는 신문기사를 읽은 기억이 떠올랐다.
1937년생을 비롯한 1930년대의 인물들은 1960년대부터 2000년까지 약관이라 할 수 있는 30대와 40대에 구미를 선도한 세대들이다. 문대식, 신광도, 전병억, 이용원 이런 분들이 바로 비슷한 연배들이다. 사곡 상모 임은으로 옮겨오면 허호, 정영진 선배가 있다.
1930년대 초년과 청소년 시기는 가난으로 점철된 실로 끔찍하고 잔인한 세월이었다. 그들은 일제강점기의 마지막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고, 1945년의 해방을 맞았다. 감격의 순간도 잠깐 곧 1950년부터 3년을 전쟁으로 지새야 했다. 1960년의 4.19, 1961년의 5.16, 혁명과 보수반동이 교차하는 격동의 시절을 진저리치도록 겪으면서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다.
읍내를 통틀어도 대학생이 몇 안 되는 시절에 대학을 졸업한 세대들이고, 정당으로 치면 구미와 선산에서 공화당의 핵심당직을 맡은 세대들이다. 이들은 구미라는 지역을 기반으로 구미의 여론과 지역정치를 주도하였으며, 경상북도와 대한민국의 지도력으로 성장하였다. 더하여 1970년대부터 수십년간을 통털어 구미의 원로로 오랫 동안 추앙을 받았다.
1947년도에 구미중학교가 개교하고 구미전자공고의 전신인 구미농고가 1954년 개교하였으니, 구미면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던 첫 세대들이다. 이들이야말로 한자와 성리학보다는 근대가 딱 들어맞도록 근대문명과 근대식 학교를 통한 근대식 교육의 첫번째 수혜자들인 것이다. 이들은 본격적으로 미국, 캐나다, 호주, 브라질과 남미로 이민을 떠난 첫 세대들로서 실로 "근대의 총아"라 할 수 있겠다.
사곡동 첫 대학생이 바로 시의회 부의장을 역임한 1938년생이신 정영진 선배이고, 임오동 첫 대학생이 구미시의회 부의장을 역임한 허호 선배다. 이팔봉은 그 시절 대구로 유학가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학비와 식사해결을 위해 사진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사진기술을 익힌 것이다.
둘 사이의 이야기가 이팔봉 선배에 이르니 옆자리의 손님이 슬며시 대화에 합류하였는데, 이팔봉 선배를 너무 잘 아는 이웃 마을의 선배였다. 그날 셋이서 한참 이팔봉 선배의 얘기를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윤보는 그날 자료 하나를 내게 건내었다. 작은 책자 형식이고, 제목은 "사곡간이역 설치에 관한 참고사항" 으로 되어 있는데, 표지를 제외하고 모두 15쪽이다.
1쪽은 사곡간이역 설치까지의 과정을 시간대별로 정리하였다.
2쪽부터는 10쪽까지는 경부선 구미ㅡ약목간 사곡간이역 설치 "진정서"의 복사본이 들어있다.
11쪽부터 15쪽까지는 최근 사곡역의 변화를 사진으로 수록하여 놓았다.
사곡간이역 설치에 관한 참고사항은 다음의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이 별도로 확인된다.
첫째, 구미 약목역 간에는 과거 일제강점기 때에 "사곡운전간이역"이 있었으나 해방 후 철거되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확인되었다. 이 자료가 없었다면 결코 알수 없는 내용이다.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난다. 지금의 상모 보성아파트에서 다송입구에 이르기까지 철도와 나란히 조성된 약 몇 백 미터(m)에 이르는 언덕이 있었다. 지금은 2000년 경에 마무리된 구획정리사업으로 모두 사라지고 마지막 구간만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반대로 철도공사는 많은 토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둘째, 지방물산 출하 부분을 보니 사과 13,400본, 낙화생 (=땅콩) 700석, 고구마 50,000관으로 되어 있다. 구미공단이 조성되기 전이고 농업 중심의 1960년대 초반이었으니 아랫 구미의 주생산물은 사과, 땅콩, 고구마였다. 특히 주목되는 품목은 사과이다. 구미의 사과농사는 코오롱 공장 주변으로 해서 지금의 공단동 일대, 낙계동, 인동으로 이어지는 넓은 들판에 대규모 사과과수원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드물게는 임은동 인근에도 과수원이 있었다. 지산동 앞들, 고아 앞들과 황상동, 선산, 해평 등지에도 사과 과수원이 많았다.
누가 구미에서 처음으로 사과농사를 지었을까. 조사에 따르면 광평동 이재화(李在和) 어른이다. 본관은 벽진. 19세기 말의 인물로서 일제강점기에 면협의회 의원(지금의 시의원)을 역임하였고, 박상희, 신준원, 김우동과 함께 구미소비조합에도 참가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중형인 박상희(朴相熙, 1905~1946)를 재정적으로 적극 도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릴 적에 사과 사러가서 얼굴을 본 기억이 있으며, 초등학교 은사이신 이경옥 선생의 부친이다.
경북의 사과농사는 20세기 초 대구에서 시작되어 왜관을 거쳐 구미로 빠르게 확산되었는데, 구미에서는 1920년대 초에 조선인들 가운데서 선진적인 농민들이 사과농사에 뛰어들었다.
세째, 인근의 37개 마을 지도자들이 사곡역 유치에 이름을 걸었다. 사곡, 상모, 임은, 광평 외에도 오태, 신평, 비산, 송정, 형곡, 신부, 매호, 낙계동, 북삼면, 인동면 주민 대표들이 함께 서명하였다. 모두가 치열하게 시대를 받아들인 근대인들이다.
상모동 대표 김재학 선생, 신부동 대표 박정효 선생은 모두 나의 초등 은사님들이다. 박정효(1934~생존) 선생은 만학으로 대구사범을 졸업하여 초등교사에 임용되었다. 첫 부임이 광평초등학교(당시의 교명은 동부초등학교) 였고, 나는 선생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말하자면 직계 제자에 해당된다.
송정동 대표로 서명한 김시구 선배는 초대 시의원을 역임하였으며, 다송의 이충균 선배도 익숙한 이름이다. 사곡동의 새마을 대표로 서명한 한동학 어른은 어릴 때에 조석으로 만났던 분이다. 지금은 구획정리사업으로 마을 전부가 사라졌다.
마을의 대표들은 대부분 반듯한 한자로 서명했으며, 독특한 서체가 있고 하나같이 달필이다. 이로서 근대식 학교에서 근대식 교육을 받았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근대인들이었다. 1850~1920년대생이 구미시 근대의 1세대라면, 1930년대 부터는 근대의 2세대이며, 1950년대부터는 근대의 3세대이다. 아, 근대식 교육의 위대함이여!!!
넷째, 아름다운 한글로 된 마을 이름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셋덤, 자주, 파계, 미골, 기봉 등의 마을 이름이 바로 그것이다.
사곡간이역 유치운동은 요즘식으로 말하면 주민운동 또는 주민자치운동이다. 자료집 1쪽을 참고하여 사곡간이역 설치과정을 살펴보자.
1961년 6월
사곡간이역 설치 준비모임이 각 동 대표 20여 명으로 시작되었다.
1964년 10월
사곡 간이역 설치 주민연서명 진정을 받아 청와대, 교통부, 철도청, 대전철도국에 전달하였다.
1965년 6월
이팔봉 추진위원장은 철도청장을 면담하였다. 청장은 면담 자리에서 즉시 설비담임관 이한규를 소개하였다. 3일 후에 이한규 설비담임관은 사곡역 설치 장소에 대한 현장조사를 실시하였다.
1965년 7월
철도청으로부터 사곡 간이역 개설인가를 받았다. 허가조건은 오직 하나 모든 주민 자력사업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1965년 9월부터 역세권 주민 연인원 2,000명을 동원하여 우마차와 지게 등으로 흙을 운반, 10여 미터 경사진 곳을 메워 프렛폼을 조성하고 승강장은 세멘트 자재조달을 못하여 잔디를 쌓아서 겨우 만들었다.
1965년 12월 10일
주민 숙원인 사곡 간이역 개설식을 가짐
1965년 12월 10일
상행 첫 완행열차가 주민들과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정차하였다.
이후 상하행 완행열차, 통학 통근열차 정차하다. 대구, 김천, 부산, 서울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음.
1969년 10월 8일
박정희 대통령께서 사곡 간이역 잔디 프렛폼에 대통령 전용 특별동차를 정차시키고 고향 상모동 생가를 방문하였다. 그날 이팔봉은 대통령과 함께 환담을 나누며 생가까지 동행하였다.
무슨 말을 나누었을까. 그날 이팔봉은 "수고했다"는 대통령의 첫말을 기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