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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서울 생활을 하면서도 고향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고향에 대한 여러가지 관심 중에서 一善郡의 一善은 어떠한 뜻을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본 일이 있다. 그러나 골똘하게 생각만 하고 정리해 본 일은 없다. 그러다 재경구미시향우회가 향우회70년사를 만들면서 一善이라는 신라 때 지명이 어떠한 뜻을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一善郡이 善字를 母字로 하여 嵩善郡 善州(和義) 善山郡으로 변한다. 이렇게 변한 지명이 어떠한 뜻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편집자 주>
지명의 의미
어느 지역이든지 그 지역의 특성은 지명의 의미를 알면 알 수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대략은 지역의 특성을 지명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지명은 대략 그 지역의 지형이 주는 의미를 보고 지명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지형은 그 지역의 특성을 누구나 쉽게 유추 할 수 있는 것이라서 지명이 되기 쉽다.
또는 조상들의 생각이나 지역 주민들의 삶을 상징하는 말로 만들어 진 지명도 있다. 혹은 내려오는 설화의 내용이 지명이 되는 수도 있다. 설화는 그 내용의 바른 것과 옳은 것을 추구하는 계도적인 면이나 한이 서린 의미를 부여한 것이 지명이 되는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옛날부터 내려온 전설이 지명으로 만들어 지는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옛날 그 지역 정서의 의미가 지명으로 남아 오면서 우리에게 교훈의 의미로 영향을 주고 있는 것도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하여 지명이 만들어 질 때는 그 지역 주민들의 정서와 함께 하는 의미를 가지고 만들어 진다. 그 지역 정서와 일치하지 않은 지명은 그 지역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지명의 의미를 지명이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몇 가지 방법에 의하여 결정된 지명은 역사 속에서 후세들에게 말로 전하고 전거로 전해지고 있다. 옛날 지명을 적은 문서는 《삼국사기》(1145년 고려 인종 김부식) 《삼국유사》 (1281년 고려 충렬왕 일연)가 가장 오래된 전거인데 여기에서 신라 때의 지명이 만들어 지는 시점을 찾아 볼 수가 있고, 지명이 만들어 지는 정황을 짐작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명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고려 때 전거로서 방대한 《고려사》가 있기는 하나 지리지에 지명이 실려 있는데 역시 여기에도 지명의 의미에 대한 설명은 없다. 조선조로 오면서 기록문화가 발달 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 같은 지리서가 만들어 지기는 했는데 지명의 의미를 알려 주는 기록은 없다.
一善郡의 지명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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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善郡, 一善州, 嵩善郡, 善州(和義), 善山郡, 龜尾市로 一善郡 지명이 변한다. 선산 지역은 신라 이전에는 가야세력권 지역이었다. 가야시대에는 고령가야古寧伽倻(함창) 관할 하에 있었는지 성산가야星山伽耶(성주) 관할 하에 있었는지 분명하지 않고 혹은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는 세력이 이어졌는지는 분명하지는 않으나 그때의 지명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457년 신라 일선군 모례의 집에 불교가 전래 되었다는 《三國史記》 卷第4 新羅本紀 第四 23 法興王 15年 기록을 보면 이미 이전에 신라의 영토가 되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야는 금관가야(김해)가 532년, 대가야(고령)가 562년 신라에 합병되므로 가야가 소멸된다.
一善郡은 신라시대 우리 선산 지역의 지명이다. 어느 시점에서 一善郡으로 지명이 명명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또 일선군이 폐지되는데 어느 시점에 폐하고 사벌주 관할 하에 두었는지도 그 연대도 알 수가 없다. 결국 일선군은 설치한 때와 폐지한 때의 연대를 알 수가 없다,
신라 진평왕 36년(614)에 沙伐州를 폐하고 一善州를 설치한다. 이렇게 되면 沙伐州 지역이 一善州 관할 하에 들어오게 되고 州 명칭이 一善州로 변경된다.
신문왕 7년(687)에 다시 一善州가 沙伐州로 변경 되고 신라 경덕왕 때 까지 沙伐州에 속해있었다. 여기에서 일선군이 사벌주에 예속되면서 이때는 一善縣으로 행정 단위가 격하되었다.
신라 경덕왕16년(757) 때 사벌주 관내 一善縣을 嵩善郡으로 승격하고 지명을 개칭 한다. 이때 沙伐州를 尙州로 고치고 전국적으로 지명을 변경하는 정리를 한다.
그 후 고려 成宗14년(995)에 善州로 승격 개칭하고 147년 동안 지속된다. 별칭으로 和義를 명명한다.
고려 顯宗 9년(1018)에는 尙州牧에 예속 시키고. 仁宗21년(1142)에 一善縣을 둔다. 이때부터 395년 동안 尙州牧 관할 하에 있게 된다. 一善縣은 271년 동안 존속된다.
朝鮮 太宗 13년(1413)에 一善縣을 善山郡으로 변경시킨다. 조선왕조 실록 태종 13년 10월 15일조에 “각 고을의 이름을 고쳤다. 임금이 河崙(領議政)에게 이르기를 “全州를 이제 完山府라 고치고서도 오히려 ‘全羅道’라고 칭하고, 慶州를 이제 鷄林府라고 고치고서도 오히려 ‘慶尙道’라고 칭하니, 고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니 河崙이 말하기를 “유독 이 곳만이 아니라, 東北面·西北面도 또한 이름을 고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옳도다,” 하였다. 드디어 完山을 다시 ‘全州’라고 칭하고, 雞林을 다시 ‘慶州’라고 칭하고 서북면을 ‘平安道’로 하고 동북면을 ‘永吉道’로 하여, 平壤·安州·永興·吉州·를 界首官으로 삼았다. 각도의 單府 고을을 都護府라 고치고, 監務를 縣監으로 고치고, 무릇 郡·縣의 이름 가운데 州 자를 띤 것을 山자, 川 자로 고쳤으니, 寧州를 寧山으로 고치고, 衿州를 衿川으로 고친 것이 그 예이다.”의 기록이 있다.
이렇게 변경된 善山郡 지명은 1994년 선산군 지명이 없어 질 때까지 581년간 사용되었다. 선산군 지명은 581년 동안 불리어졌고 우리들에게는 익숙한 지명이다. 정서상으로 정을 느끼며 가까이 있는 지명이다.
1978년에는 구미읍이 시로 승격되어 선산군에서 분리되고 선산군과 구미시가 갈라진다. 그 후 1995년에 선산군과 구미시가 통합되고 선산군이 구미시 관할로 들어가면서 선산군이 소멸되고 구미시 관할 선산읍으로 행정 단위가 축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