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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배의 살며 생각하며(14)]혼자서도 잘 사는 법

경북문화신문 기자 / gminews@hanmail.net입력 : 2025년 07월 22일
이일배 수필가(금오산수필문학회 자문위원)
↑↑ 이일배 수필가(금오산수필문학회 자문위원)
ⓒ 경북문화신문
마을 들머리 숲에는 아름드리 소나무며 참나무 회나무 느티나무 들이 우거져 있고, 그 한가운데쯤에 정월 대보름 새벽이면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당이 있고 그 옆에 상사화밭이 있다. 해마다 유월, 구월이면 마을 사람들 모두 나와 풀베기를 하지만, 풀은 또 어느새 우거진다.

상사화는 모든 것이 아직 얼어 있는 이월 말이면 움트기 시작하여 곧 촉을 내민다. 봄이 오는가 싶으면 난초 같은 긴 잎들을 돋워낸다. 봄 지나 오뉴월에 이르기까지 무럭무럭 자란다. 상사화만 자라는 게 아니다. 주변의 풀들도 상사화보다 더 크게 솟는다.

풀이 상사화가 잠길 만큼 짙어진다. 상사화 잎은 짙어지다가 유월 중순부터는 마르기 시작한다. 칠월 넘어서면 마른 잎은 땅에 붙어버리고 꽃대가 솟아 8월에 이르면 홍자색 아리따운 꽃을 피워낸다. 잎과 꽃이 서로 그리지만 만날 수 없는 슬픈 사랑의 전설이 절정에 이른다.

잎이 마르는 것도 꽃이 피는 것도 저들의 그리움이거늘, 힘껏 자라 맘껏 마르도록 해주어야 한다. 풀이 자욱해지면 낫을 들고 숲으로 간다. 상사화 주위의 풀들을 걷어낸다. 마을 사람들은, 그냥 두면 나중에 풀베기를 다 할 텐데 공연한 짓을 한다고 여기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의 예초기 칼날은 무자비하다. 풀이든 꽃이든 깡그리 베어버린다. 그때 상사화 잎도 무참히 잘려나간다. 뿌리는 다치지 않아 해마다 나긴 하지만, 마를 겨를도 없이 처참히 베어지는 모습이 안타깝다. 내가 주위의 풀들을 좀 쳐놓으면 그래도 많은 잎이 살아남는다.

요즈음 견디기 쉽지 않은 요통을 앓고 있다. 허리를 굽혀 무얼 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가끔씩 술잔을 나누며 많은 얘기로 서로 마음을 나누는 마을 친구가 하나 있다. 예초기가 없는 나는 그 친구에게 내 사정을 말하고 도움을 청했다.
 
그 친구 생각도 마을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 꽃이 뭐라고! 나중에 다 벨 텐데.” 한마디로 잘라버리는 그 말에 무슨 뜻을 더 보태랴. 무언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침 산책길에 낫을 들고 나서 숲으로 갔다. 아픈 허리 부여잡으며 상사화 곁 풀들만 조금 쳐냈다.

어쩌다 보니 권솔들을 만날 수 없거나 만나기 쉽지 않은 곳으로 다 떠나보내고 혼자 살고 있다. 그런 삶 가운데서 그 친구는 큰 위안이었다. 그렇지만, 대작으로 흉금을 터놓는 담소 속에서도 나누어지는 마음과 나누어지지 않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그 꽃이 뭐라고!’라는 말이 나에게는 충격이라는 걸 그는 모를 수도 있다. 그 말은 나를 깊은 외로움의 수렁으로 빠지게 했다. 친구에 대한 의지依支가 무참히 내려앉는 듯한 느낌 때문일 것이다.

혼자 사는 삶에 어찌 외로움이 없으랴. 먹고 입고 자고 하는 모든 것들에서 외로움이 배어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숲으로 강둑으로 걸으며 풀꽃 보며 즐기고, 책 속으로 빠져들어 다른 삶, 남의 삶을 관조하기도 하고, 그 심정들을 모아 글을 쓰기도 한다.
 
그런 것들은 내 외로움을 잘 달래주고, 잘 견디게도 해준다. 그리하여 외로움을 즐길 수 있게도 해준다. 외로움에 즐거움이 들면, 그건 외로움이 아니고 고독일 뿐이다. 외로움은 혼자 있음의 괴로움일 수 있지만, 고독은 혼자 있음의 즐거움이지 않은가.
 
언젠가 내가 쓴 글에서 “고독은 걸림 없이 즐길 수 있지만 외로움을 즐기기는 힘들다. 고독은 스스로 원하여 빠져들 수 있지만, 외로움은 어떤 이가 스스로 원할까. 고독은 혼자 있는 즐거움일 수 있지만, 외로움은 혼자인 것이 괴로움일 수 있다. 고독은 그 안에 머물고 싶을 수 있어도 외로움은 어서 탈출하고 싶다.”(《수필세계》 제77호 「외로움과 고독」, 2023)라 한 적이 있다.

지금도 그 상념은 변함이 없다. 흔히 외로움에서 탈출할 수 있는 구원의 손길을 사람에게로 내밀기 쉽다. 그런 마음이 들 때도 없지 않다. 그래서 그 술친구가 좋고, 사람 만나는 일이 즐겁지 않던가.

쇼펜하우어의 “행복은 얼마나 혼자 있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라는 말이 다시 새겨진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어서 완벽한 사랑도, 이상적인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물론, 나를 대하는 남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남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혼자서라도 잘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남에게 기대는 것은 결국 실망과 상처로 돌아올 뿐이라지만, 어찌 사람을 만나지 않고 살 수 있으랴. 만남을 외로움의 탈출구로 삼을 일이 아니라, 풀꽃을 사랑하듯, 책 속의 삶을 관조하듯 그렇게 만나고 사귈 일이다.
 
외로워서 누구를 애타게 그리는 게 아니라, 고독 속의 아늑한 그리움으로 새길 수 있다면, 혼자서도 잘 살게 해주는 만남이요, 사랑이 되지 않을까. 그것은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 밤은 그윽한 독작으로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고 싶다. 그러다가 키보드를 두드리며 즐거운 그리움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그러한 시간들이 오롯이 나의 것이 되기를 바라며 회심의 잔을 들고 싶다. 올해도 홍자색 상사화가 곱게 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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