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 기고

이일배의 살며 생각하며(17)]풀숲길이 좋다

경북문화신문 기자 / gminews@hanmail.net입력 : 2025년 10월 14일
이일배 수필가(금오산수필문학회 자문위원)
↑↑ 이일배 수필가(금오산수필문학회 자문위원)
ⓒ 경북문화신문
오늘도 아침 산책길을 걷는다. 두렁길 지나 마을 숲에 이르러 깊은숨 들이쉬며 체조하고 강둑길에 오른다. 강둑길을 걸으며 물도 보고 풀꽃도 보다가 그 길이 끝나면 산을 파헤쳐 길을 낸 곳을 오르고 내려 골짜기로 든다. 나의 산책은 변함없지만, 걷는 길이 많이 변했다.
 
지난날의 강둑길이 그립다. 산이 막아서는 길 끝까지가 풀숲 길이었다. 그 길을 걷다 보면 풀잎에 맺힌 이슬에 바짓가랑이가 젖기도 하고, 도깨비바늘을 비롯한 풀씨들이 달라붙고, 칡이며 환삼덩굴이 발목을 걸어 성가시게도 했다. 그래도 그 길이 좋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걸 귀찮게 여겨 관에다 진정했다. 어느 날 갖가지 장비를 동원하여 풀숲을 걷어내고 회반죽을 들이부었다. 바짓가랑이도 안 적시고, 덩굴이 발목을 잡지도 않는 길이 되었다. 그 길로 차며 경운기가 다녔다. 심장 한쪽을 가르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어느 날 굴착기가 올라가 강둑 끝자락 산을 허물었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맥없이 쓰러졌다. 비탈 한 자락을 평지로 만들기도 하고, 비탈을 가로질러 골짜기로 드는 길을 내기도 했다. 산주는 산림을 ‘경영’할 것이라 했다. 산림 경영은 베고 파헤치기부터 해야 하는 건가.

골짜기 길은 우거진 풀숲 사이로 사람 하나 다닐 만한 오솔길이 나 있었다. 그 골짜기 깊숙한 곳에 누가 벌통 여러 개를 갖다 놓고 조그만 집도 몇 채 지었다. 집은 개집이었다. 그 후로 아침마다 트럭이 지나다니더니 두 줄기 바퀴 길이 났다.

그래도 풀은 산다. 틈만 있으면 나고 산다. 콘크리트 틈서리에서도 벽돌 사이에서도 풀이 사는 걸 보지 않는가. 농부가 두렁풀을 아무리 치고 베어도 풀은 지치지 않고 산다. 어느 시인이 “퍼렇게 벼린 낫이여, 풀은 이기지 못하느니 / 낫은 매번 이기고, 이겨서 자꾸 지고 / 언제나 풀은 지면서 이기기 때문이다.”(민병도, 「낫은 풀을 이지 못한다」)라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 풀들이 꽃을 피운다.

온 강둑길이 회반죽으로 덮여도 풀은 길섶을 뚫어냈다. 길 가장자리에 철이면 철마다 다른 풀들이 우거지고, 그 풀들은 색색의 철꽃을 피워낸다. 봄까치꽃, 현호색, 냉이꽃, 애기똥풀, 메꽃이며 나팔꽃, 개망초, 지칭개, 구기자, 무릇, 박주가리, 갈퀴나물, 나도송이, 둥근잎유홍초, 쑥부쟁이, 구절초……. 철을 연달아 피고 지기를 그치지 않는다.
 
산주가 ‘경영’을 쉬어가려는지, 뜻을 접었는지 한 해를 돌보지 않는 사이에 나무를 쓰러트리고 비탈을 가로질러 낸 길은 어느새 무성한 풀숲 길이 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흙길 돌길에 온갖 풀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 쑥쑥 돋아났다. 그 풀들이 취나물, 물레나물, 등골나물, 짚신나물……, 갖은 나물 꽃들을 피워내기도 했다.
 
그 경영의 길을 오르고 내려 골짜기로 든다. 바퀴 길이 두 줄기로 철길처럼 나란히 굽이를 돈다. 바퀴 자리만 비워주고는 물봉선이며 여뀌, 사광이아재비, 고마리 들이 피울 꽃들을 피워낸다. 복판에는 차가 지나도 다치지 않을 질경이가 나지막이 앉아 잎을 흔들고 있다.

하늘 맑은 아침, 윤슬이 반짝이는 강물과 함께 강둑길을 걷는다. 길가에 늘어선 벚나무를 마구 기어오르던 칡넝쿨도 기가 꺾인 듯 잎을 늘어뜨리고, 샛노란 얼굴로 아침 길을 열어주던 달맞이꽃도 지고, 조금만 나팔을 귀엽게 벌린 다홍빛 둥근잎유홍초가 아침 인사를 한다.
 
쑥대 사이로 비수리가 수줍은 듯 조그만 꽃들을 벌이고, 잔잔하게 핀 노란 산국이 바람에 하늘거린다. 하얀 미국쑥부쟁이가 저도 있다며 꽃잎을 흔든다. 비록 길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을지라도 쉼 없이 피고 진다. 그 풀이 반겨주는 아침 길이 고즈넉하다.

강 건너 길 벚나무 단풍이 얼굴을 비추고 있는 강물을 보며 산 부수어 길을 낸 ‘경영’ 길을 오른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제집인 듯 자리 잡고 있는 풀꽃들이 어여쁘다. 철 늦은 개망초며 개쑥부쟁이가 아침 빛을 받아 반짝인다. 제멋대로 나 있는 진득찰이며 도깨비바늘들이 저들에도 꽃이 있다는 듯 바짓가랑이를 잡는다.
 
골짜기 길로 내린다. 트럭이 아침 일을 위해 골짜기로 든다. 차 아래 깔리는 질경이는 잠시 몸을 수그리는 듯하지만 지나자 다시 활개를 편다. 길섶에는 진분홍빛 물봉선 축제판이라도 벌이는 듯 흐드러지게 피었다. 줄기에 가시는 달았지만, 사광이아재비 작은 꽃이 연지 찍은 듯 볼이 붉다.
 
골짜기를 돌아 나오며 돌아보고 또 돌아본다. 어느 자리 어떤 자리를 마다치 않고 저리 꽃을 피워내는 것들은 무슨 심사를 두고 있을까. 어떤 세상이든 가리지 않고, 어떤 자리든 탓하지 않고 그저 태어나 제 피울 꽃을 열심히 피우다가 제철이 지나가면 아쉬움 두지 않고 떠나는 저 꽃들은 어떤 속내를 간직하고 있을까.
 
이슬 머금은 아침 풀이 바짓가랑이를 적실지라도, 풀씨가 바늘이 되어 찔러올지라도, 덩굴풀이 발목을 감아 젖힐지라도, 무얼 탓하지도 바라지도 않고 세상을 꽃 피우다 가는 저 꽃 세상이 좋다. 그 풀숲 길이 좋다.


경북문화신문 기자 / gminews@hanmail.net입력 : 2025년 10월 14일
- Copyrights ⓒ경북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스토리네이버블로그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개인정보 유출, 권리침해, 욕설 및 특정지역 정치적 견해를 비하하는 내용을 게시할 경우 이용약관 및 관련 법률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가장 많이 본 뉴스
구자근 의원, 구미 AI 팩토리 3개 과제 선정…국비 220억원 확보..
구미참여연대, 구미시 공무원 업무추진비 공개 사이트 ‘맛있구미’ 개설..
구미시의회, `박정희 대통령 생가 재단 설립 조례안` 원안 가결..
한나절 산책(29)]천생산성 둘레길을 걷다..
김천김밥축제, 올해는 의전·개막식·바가지·줄서기 없앴다!..
경북 중등교사 임용 원서접수 마감… 공립 6.57대 1·사립 6.58대 1..
구미대 천무, 아시아 치어리딩 선수권대회 은메달 획득..
상주시, 주민참여예산위...시민제안 85건 검토..
세계인의 라면 대결, 구미서 펼쳐진다..
구미 발전 위한 `원팀` 가동...구미시·의회 정책간담회 개최..
최신댓글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기사내용의 접수 일정 오타있습니다
미술에 문외한이지만, 선생님의 그림에서 여름의 역동성이 느껴집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몰랐던 것 배우게 되네요. 멋진 조상의 유산 배우고 갑니다.^^
라면 먹으러 축제에 가야겠군요. 타지 방문객 통계도 한 명 더 올리고. ^^
벚꽃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장미처럼 유명하지 않아도, 낮은 곳에서 저마다 작은 결실 피워내는 식물들의 위대함을 느낍니다. 냉이꽃처럼...
선산봉황시장의 2층은 현재 어떻게 되었을까요? 좋은 결과를 지속적으로 내고 있을까요? 궁금합니다.
음악으로 보자면 어설픈 공연자 2백만원씩 5명 보다는 유명한 1명이 공연의 질을 더 높일 수 있죠. 그런데 스티븐 해링턴? 누가 아시나요? 그냥 행사 추진자가 좋아하는 사람 아닌가? 지역 예술가들을 우대하되 기준을 객관화해서 정치인이나 지방권력자 친분으로만 하지 말고요.
지역의 예술가들이 함께하고 성장할 수 있는 정책 집행이 아쉽군요. 음악이건 미술이건... 너무 외국 유명인에게 기대는 것은 좀... ㅠ.
건강하셔서 좋은 글 많이 주시기 바랍니다.
오피니언
<바람처럼 스쳐가는 가을>가을은 사라졌을까그저..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 순(脣), 망할 망.. 
구미 시민들이 400여 미터의 산성 둘레길을 .. 
'오늘은 어딜 향해 볼까?' 일과를 마친 광.. 
여론의 광장
경북도, ‘촬영은 경북에서!’...로케이션 명소 홍보..  
김정미 구미시의원, 선기동 도축장 이전 계획 수립 촉구..  
구미시, 노동시장 20~30대 부족, 외지 통근은 늘어..  
sns 뉴스
제호 : 경북문화신문 / 주소: 경북 구미시 지산1길 54(지산동 594-2) 2층 / 대표전화 : 054-456-0018 / 팩스 : 054-456-9550
등록번호 : 경북,다01325 / 등록일 : 2006년 6월 30일 / 발행·편집인 : 안정분 / 청소년보호책임자 : 안정분 / mail : gminews@daum.net
경북문화신문 모든 콘텐츠(기사, 사진, 영상)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며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Copyright ⓒ 경북문화신문 All Rights Reserved.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천요강을 준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