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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배의 살며 생각하며(18)]11월의 소리

경북문화신문 기자 / gminews@hanmail.net입력 : 2025년 11월 11일
이일배 수필가(금오산수필문학회 자문위원)
↑↑ 이일배 수필가(금오산수필문학회 자문위원)
ⓒ 경북문화신문
해가 서산 쪽으로 기울 무렵이면 산을 오른다. 무엇보다 중요한 나의 일과다. 그렇게 산을 오르내리는 사이에 가고 오기를 거듭하는 계절을 따라 가을도 어느새 11월을 건너가고 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 부른다고 한다. 모두 다 사라진 것이 아니면 11월엔 무엇이 사라지고 무엇이 남는 걸까.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 있던 나뭇잎들도 다 떨어져 내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는 바람만 스산하게 지나다니고, 초록과 황금 빛깔로 출렁이는 물결을 이루던 들판도 텅 비어 맨살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 계절을 풍요롭게 했던 많은 것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모든 것이 사라져 가는 그 11월에 남은 게 있다. 아주 은풍하게 남은 게 있다. 11월의 산을 올라보라. 지상으로 무연하게 내려앉은 낙엽들이 풍성한 향연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특히 상수리나무며 떡갈나무가 우거진 산을 올라보라. 갖가지 빛깔로, 모양으로, 소리로 연출해 내는 낙엽들의 향연이 온 산을 찬란하게 무늬 짓는다.

낙엽을 밟는다. 그득하게 쌓인 낙엽은 발목부터 부드럽게 잠기게 한다. 사그락, 서그럭, 바스락, 버스럭, 다르락, 더르럭, 가르르, 거르르……. 누구는 그 소리를 ‘날갯소리, 여자의 옷자락 소리’(낙엽, 구르몽)라 했던가. 사람의 언어로는 그려내기 힘든 여러 빛깔의 소리가 난다.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11월만이 낼 수 있는 소리다.
 
그 소리에 발목을 적시며 산을 오른다. 소리가 감미롭고도 경쾌하다. 사랑하는 이의 정겨운 숨소리 같다. 그의 체온이 와 닿는 것 같다. 발걸음이 가볍다. 가풀막을 올라도 숨이 가쁘지 않다. 노래를 부르고 싶다. 시를 외운다.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그대에게 가고 싶다, 안도현) 참 아름다운 그대에게 가고 싶다. 날아갈 것만 같다. ‘그대’를 향한 사랑이란 가풀막의 걸음마저도 이리 가볍게 하는가.

다시 그 낙엽 소리에 발목을 담그며 산을 오른다. 밟히는 소리가 아릿하다. 하고 싶은 말을 차마 풀어내지 못하고 입술을 깨무는 소리 같다. 그대는 지금 어디쯤에 있는가. 그리움의 나직한 비명 같은 소리가 발바닥에 달라붙는다. 발바닥이 울림판이 되어 소리가 온몸으로 퍼져 스며든다. 마침내 몸은 그 소리로 가득 차게 된다.

문득 ‘그립다는 것은 가슴에 이미 상처가 깊어졌다는 뜻’(그립다는 것, 안도현)이라는 시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봉우리가 아득하게 느껴진다. 그리움은 늘 오르던 저 봉우리도 저리 까마득하게 하는가. 저 봉우리를 오르면 상처가 다시 그리움으로 피어날까.
 
11월의 쌓인 낙엽들이 내는 소리는 감미로우면서도 가슴 시리게 하고, 경쾌하면서도 아릿한 아득함에 젖게 한다. 그 소리는 양성모음으로 들리기도 하고 음성모음으로 들리기도 한다. 사랑의 소리는 양성모음이고 그리움의 소리는 음성모음이다. 그 소리들은 교직하면서 또 다른 소리를 빚어내기도 한다.
 
11월은 사랑과 그리움의 소리가 낙엽으로 남은 달이라 할까. 낙엽의 이름과 몸짓을 빌어 사랑과 그리움의 소리를 들려주는 달이라 할까. 그리하여 시인은 11월을 두고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정희성)는 달이라고 했던가. 그 추억은 어디를 맴돌고 있을까.

누가 11월의 나무를 두고,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거나,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황지우, ‘11월의 나무’)고 했던가. 11월의 나무는 그렇게 겸연쩍어하지도 않고, 삶을 가렵게 여겨 털어내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직 따뜻하고 정겨운 소리와 빛깔을 품고 있을 뿐이다. 다시 올 계절의 싱그러운 소리와 빛깔을 준비하고 있을 뿐이다.
 
11월의 비가 내린다. 낙엽을 적신다. 빗물이 낙엽 사이로 스며들 듯 낙엽의 소리도 잦아든다. 11월도 낙엽 사이로 잦아들고 있다. 12월이 올 것이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또 12월을 ‘침묵하는 달 또는 무소유의 달’이라 했다던가. 낙엽이 흙 속으로 들 듯, 11월의 소리도 침묵 속으로 또는 무소유 속으로 든다. 흙 속으로 든 낙엽이 새봄을 예비하듯, 12월의 침묵과 무소유는 새 생명의 외침을, 빛나는 소유를 예비하리라. 그리고 이 계절을 건너면 사랑은 생명의 외침으로, 그리움은 빛나는 소유로 피어나리라.

오늘도 낙엽 쌓인 산을 오른다. 11월이 남긴 것을 밟는다. 사랑과 그리움의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발목을 담근다. 언제나 사랑은 애달프고 그리움은 고단하다. 그래서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낙엽, 구르몽)고 했던가. 애달프고 고단한 영혼의 소리로 우는 것이기에 그 소리가 더욱 아름답고 애잔하게 들리는지도 모른다.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의 낙엽-. 그 낙엽이 들려주는 사랑과 그리움의 소리-. 그 소리 속으로 11월이 흘러가고 있다.


경북문화신문 기자 / gminews@hanmail.net입력 : 2025년 1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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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기사내용의 접수 일정 오타있습니다
미술에 문외한이지만, 선생님의 그림에서 여름의 역동성이 느껴집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몰랐던 것 배우게 되네요. 멋진 조상의 유산 배우고 갑니다.^^
라면 먹으러 축제에 가야겠군요. 타지 방문객 통계도 한 명 더 올리고. ^^
벚꽃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장미처럼 유명하지 않아도, 낮은 곳에서 저마다 작은 결실 피워내는 식물들의 위대함을 느낍니다. 냉이꽃처럼...
선산봉황시장의 2층은 현재 어떻게 되었을까요? 좋은 결과를 지속적으로 내고 있을까요? 궁금합니다.
음악으로 보자면 어설픈 공연자 2백만원씩 5명 보다는 유명한 1명이 공연의 질을 더 높일 수 있죠. 그런데 스티븐 해링턴? 누가 아시나요? 그냥 행사 추진자가 좋아하는 사람 아닌가? 지역 예술가들을 우대하되 기준을 객관화해서 정치인이나 지방권력자 친분으로만 하지 말고요.
지역의 예술가들이 함께하고 성장할 수 있는 정책 집행이 아쉽군요. 음악이건 미술이건... 너무 외국 유명인에게 기대는 것은 좀... ㅠ.
건강하셔서 좋은 글 많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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