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 칼럼

이일배의 살며 생각하며(23)]건망에 대하여

경북문화신문 기자 / gminews@hanmail.net입력 : 2026년 03월 31일
↑↑ 이일배 수필가(금오산수필문학회 자문위원)
ⓒ 경북문화신문
오래 사귄 친구 이름이 한동안 기억나지 않다가 어느 날 문득 이름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보다 더 민망한 일은 아는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데, 이름이 통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물어보면 실례가 되거나 실망을 줄 것 같아 물어보지도 못하고 아주 답답했던 적이 있었다.

무슨 일을 하리라 하고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는 순간 잊어버렸다. 내가 무슨 일을 하려 했더라? 한참을 궁리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욕실에 가서 무엇을 하리라 하고 방에서 욕실로 갔는데, 순간 내가 왜 여기 왔지? 어처구니없는 의문에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어떤 글을 읽다가 ‘엄살’. ‘다혈질’이라는 말을 떠올려야 하는데, ‘응석’ ‘어리광’, ‘고혈질’, ‘고혈압’과 같은 얼토당토않은 말만 맴돌고, 그 말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아, 이렇게 어찌 살아야 하나 하는 암담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근래에 와서 건망健忘이 부쩍 심해진 것 같다. 주위에 그런 사실을 털어놓으면 다른 이들도 자주 그런다면서, 다 나이 탓이라 했다. 나이가 들면 다 그런 건망을 다 앓아야 하는가. 그런데 건망에 ‘튼튼하다’는 뜻의 ‘건健’ 자는 왜 붙는 걸까. 잊는 게 튼튼하다는 말인가. 우습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나이 탓만 아니라 수면과 운동이 부족해도, 스트레스와 우울이 심해도, 과음과 흡연을 해도, 고혈압 당뇨 등 만성 질환이 있어도, 사회적 고립 및 대화 부족이나 정신적 자극 부족도 기억력과 인지력 저하를 초래하는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 했다.

그런 위험 요인 중 몇 가지가 마치 나를 지목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근래 내가 처한 처지와 환경에서 그런 요인들이 거의 비롯된 것 같다. 요즘 와 더욱 심해진 것 같은 건망의 원인으로 와 닿는다.

어쩌다 홀로 사는 처지가 되었다. 잠을 잘 못 이룰 때도 있고, 심한 스트레스와 우울을 겪기도 한다. 거기다가 오래전부터 겪고 있는 만성 질병에 독작과 독백으로 고립감을 이겨내려 해보기도 한다. 건망의 위험 요인을 두루 갖추고 지내는 셈이다.

그럴 바에 모든 것을 싹 몰각해 버릴 수는 없을까. 우스갯소리로 주위 사람들은 불편하지만, 본인은 편한 병이 치매라기도 한다. 모든 걸 다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렇다고 치매를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잊고 싶은 것일수록 왜 그리 잊히지 않는 걸까.

기쁘고 즐거운 일이 잘 떠올라주면, 그 또한 얼마나 즐거운 일이 될까. 그런 일보다는 세상을 살아오면서 실수며 시행착오를 겪었던 일, 상처를 주거나 받은 일이 기억에서 잘 지워지지 않는다. 내가 한 일이 실수며 시행착오인 줄도 모르고 저지를 때가 많았던 것 같다.

상처도 그렇다. 내가 남에게 알게 모르게 준 상처도 많았을 것이다. 남들도 나에게 그렇게 상처를 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준 것이든 받은 것이든 상처 진 기억들이 뇌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내가 끼친 상처가 잘 잊히지 않는다.

세상살이를 모두 어찌 편안하게만 할 수 있을까만, 세상에 부대끼면서 살아오는 사이에 생겨난 고통스러운 상처 때문에 가끔씩 우울에 빠질 때가 있다. 내 탓이 크겠지만, 이런 일들은 왜 내 건망의 목록에 들어주지 않는 걸까.

부처님의 어느 경전을 보면 ‘평안한 사람’이란 ‘미래를 원하지도 않고, 과거를 추억하여 우울해하지도 않는’ 사람이라 했다. 그렇게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다면, 이 또한 부처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정신적 자극이 부족하면 뇌 가소성可塑性이 감소하여 기억 회로가 퇴화한다고 했다. 정신 자극에 도움이 될까 해서 책 읽기며 글쓰기에 마음을 바쳐 보고, 시 외기를 즐겨 해 본다. 그런 일이 아픈 기억들을 밀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없지 않다.

내가 즐겨 외는 시에는 정일근의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조창환의 「나는 늙으려고」, 박주택의 「하루에게」, 계절에 따라서는 봄에는 신달자의 「봄의 금기 사항」, 여름에는 오세영의 「파도는」, 가을에는 문병란의 「반려返戾」, 겨울에는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들을 즐겨 외지만, 내가 특별히 애송하는 시는 조병화의 「늘, 혹은」이다.

「늘, 혹은」은 “늘, 혹은 때때로 /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건 / 얼마나 생기로운 일인가”로 시작해서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라 하고,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인생다운 일이라 하고,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건 ‘아직도 살아 있다는 명확한 확인’이라 했다.

사람이라도 좋고, 사물이라도 무방하다. 그렇게 시를 외며 정신에 자극을 조금이라도 주다 보면, 그리하여 늘 혹은 때때로 누구를, 무엇을 생각하고 보고 싶어 하고 그리워하다 보면, 내 건망의 늪에도 청량한 샘물이 고일 수 있을까. 살아 있음이 확인될까.

건망이란 일깨워 가는 내 생각으로 조금은 잠재울 수도 있을 것이라는 아린 믿음도 가지면서 조용히 시 하나 외어 본다.


경북문화신문 기자 / gminews@hanmail.net입력 : 2026년 03월 31일
- Copyrights ⓒ경북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스토리네이버블로그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개인정보 유출, 권리침해, 욕설 및 특정지역 정치적 견해를 비하하는 내용을 게시할 경우 이용약관 및 관련 법률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가장 많이 본 뉴스
6.3 지방선거 구미시장·도의원·시의원 선거구별 후보자 득표순위..
6.3 구미 지방선거 최종 투표율 53.74%...지난 지선 대비 10.94%p 상승..
김장호 구미시장 당선 ˝시민 모두의 승리˝..
`경북 K-푸드, 세계를 맛들이다` 2026 경북농식품대전 4일 개막..
구미시, 투표소 100곳 최종 점검...3일 오전 6시부터 투표 시작..
구미로컬푸드직매장, 개장 3주년 풍성한 감사·할인행사 열려..
국립금오공대 갤러리, 변금조 작가 초대전..
구미 해평면 낙산리 고분군 야행, 19~21일까지 열려..
안재민 상주시장 당선...‘사람이 모이고, 경제가 살아나는 상주’..
기고]신분증 준비해 주세요!..
최신댓글
감사합니다. 수정하겠습니다.
첫번째 사진은 103동이 아니고 104동 입니다.
낙동강 취수원 문제로 어설프게 덤볐다가 명분도 실리도 놓치고, 어설프게 정치꾼 행세하다가 되지도 않는 안전문제를 핑계로 이승환 공연 취소해서 전국민 비웃음꺼리 만들고 진짜 안전 위험 인물 전한길은 집회 허가하고 제대로 된 기획력 없이 매번 어설픈 낭만 타령 문화행사만 일삼는 현 시장 못마땅해 민주당 찍으려고 해도 시장 재직 기간 아무런 행정력도 발견하지 못한 장세용씨를 다시 내세우다니... 구미에 그리도 인물이 없는가?
구미대 항공헬기정비학부 전체 학생들의 단합된 모습들이 너무 보기 좋아요. 요즘은 개인적인 성향들이 많다보니 함께하는 모습 넘 보기 좋고 흐믓합니다.
민원인들 중에서도 악의적으로 이용하여 누구는 유료로 이용하고 누구는 무료로 주차하는 일이 생기기 때문에 형편성에 문제가 생기기에 저렇게 현수막을 걸어 놓은 듯. 관리자의 입장과 이용자의 입장 둘다 본다면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니다 다만, 이해 하려는 마음이 문제라고 느껴짐.
역시 정론직필!!
예방법없음
따뜻한 기사 잘 보았습니다. 주변에서 볼수 있지만 관심을 주는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후원해 주신 에스엠디에스피 대표님과 선행을 알려주시는 경북문화신문과 김예은 학생 기자님께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단체장이 불법?
충돌 우려로 이승환콘서트를 금지했던 구미시장은 왜 이번엔 잠잠하지요? 정치적 선동금지 서약을 받았나요? 이건 이승환콘서트 보다 더 큰 충돌 우려가 되는 이벤트인 것 같군요.
오피니언
"신분증 준비해 주세요~.""마스크 좀 내려 .. 
새옹지마(塞翁之馬) : 변방의 늙은이의 말.塞.. 
쇼펜하우어는 지식을 체화시키는 것에 대해 이런.. 
"호국영웅들이 지켜낸 대한민국, 우리가 이어가.. 
여론의 광장
경북도, ‘APEC 2025 열차’ 대구와 함께 달린다..  
˝구미 전통시장에서 장보고 14만원 환급받으세요˝..  
구미도시공사, 체육본부장 공개모집..  
sns 뉴스
제호 : 경북문화신문 / 주소: 경북 구미시 지산1길 54(지산동 594-2) 2층 / 대표전화 : 054-456-0018 / 팩스 : 054-456-9550
등록번호 : 경북,다01325 / 등록일 : 2006년 6월 30일 / 발행·편집인 : 안정분 / 청소년보호책임자 : 안정분 / mail : gminews@daum.net
경북문화신문 모든 콘텐츠(기사, 사진, 영상)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며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Copyright ⓒ 경북문화신문 All Rights Reserved.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요강을 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