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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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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의 일제 강점기에 박상희, 장진홍선생과 함께 신간회조직의 또 다른 중심인물이었던 구미출신 김정술선생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져야한다는 여론이 거세게 일고 있다.
신간회는 1927년 2월15일 비타협적 민족자결주의 이념을 표방하는 범민주주의 세력이 결집해서 만든 독립운동단체로 국내를 비롯한 해외지부에 4만여 회원을 가진 조직이었다. 당시 대구고보(현 경북중고교)재학생 신분이었던 김 선생은 신간회를 이끄는 장선생을 지원하는 역할의 중심에 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 선생과 김 선생은 일제 강점기 경찰 정보망을 피해가며 금오산 성안마을에서 제조한 거사용 폭탄 4개와 자살용 폭탄 1개를 소지하고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를 시도한 때부터 김 선생의 독립운동은 시작된다. 그러나 대구은행 폭파시도는 일본경찰의 경비망을 뚫지 못함으로서 그 현장에서 실패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 선생의 이러한 독립운동 발자취가 최근 들어 다시 거론되면서 구미시의회를 비롯한 지역 원로사회의 관심이 부쩍 커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김 선생은 구미-대구행 열차로 통학하면서 신간회 활동지원을 위한 폭탄재료를 금오산으로 운반했는가하면 이곳에서 폭탄실험과 제조를 했던 것으로도 확인되고 있다. 대구은행 폭파가 실패로 돌아가게 되자 김 선생과 그의 동지들은 악전고투 끝에 수 백 개의 폭탄을 또 만들었고, 장 선생과 또 다른 동지들은 이 폭탄으로 안동의 주요시설물 폭파와 영천거사를 추진하게 된다.
그러나 이 또한 실패로 돌아가면서 경북 경찰부 고등과 사상범 전담형사들은 장 선생과 김 선생을 비롯한 신간회 가담자를 체포해서 대구로 압송한 후 유치장에 감금하고 온갖 고문을 감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이러한 상황은 1927년11월 14일자 조선일보에서 자세히 보도됐으며, 지금도 이 기사가 보존되고 있다. 이때 김 선생이 풀려나게 된 것은 당시 대구고보 교장의 신원보증 덕택이었지만 이때부터 사상범으로 분류된 김 선생은 국내에서의 취업 길이 철저히 막히고 만다. 게다가 또 대구은행 폭파시도를 비롯한 안동의 주요시설 폭파, 영천거사 등이 연이어 실패로 돌아가는 가운데 경찰은 장 선생과 김 선생을 구인하기위해 수사망을 좁혀왔고, 이때 일본으로 도피한 장 선생은 일본에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은 후 1930년 7월30일을 일기로 일본 감옥에서 자결하기에 이른다. 바로 이때 김 선생은 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인재양성이 필요하다는 일념으로 만주 길림성 용정으로 도피의 길을 걸었고, 이곳에 있는 영신(광명)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김 선생의 제자들로는 정일권 전 국무총리,이주일 전 감사원장, 윤태일 전 서울시장, 김동하 전 해병대사령관, 이종갑씨 등이다.이렇듯 파란만장한 독립운동의 역경과 함께 1927년 독립을 맞긴 했지만, 이때 김 선생이 이 국 땅에서 보낸 세월만도 무려 18년이다.
비로소 서울로 돌아온 김 선생은 수도여고와 용산고등학교 등에서 교편생활을 하던 중 일본경찰의 혹독한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다 1964년 고향인 구미에서 구국의 한을 품고 일대기를 마무리했다. 이렇듯 당연히 평가받아야 할 김 선생의 독립운동이 사실대로 조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46년이 흐른 오늘에 이르러서야 자식들과 지인들로부터 언론과 정치권에 제보를 하게 된 것이다. 꼭 히 가족들과 지인들의 증언이 아니라하더라도 각종 사료만으로도 김 선생의 독립운동에 대한 입증은 충분한일이다.
1983년도 독립유공자 사료에서 누락
가족· 편집주필의 사례요구에 응하지 않았던 탓
가족들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1985년 박 선생과 장 선생에 얽힌 독립운동 사를 정리했던 주필로부터 김 선생에 대한 자료요청이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가족들은 칠곡에 살고 있는 주필에게 관련 자료를 모두 넘겨줬으나 암묵적으로 사례의사를 밝혀온 주필의 의사를 무시했던 게 김 선생의 명예 재조명의 실패 원인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그 당시 김 선생의 자료를 주필에게 넘겨 준 사람은 김 선생의 아내인 최복인여사와 둘째 아들인 현 구미골프 숍 대표 김구식씨가 동행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이 때 전달했던 자료가운데는 김 선생을 구인해서 취조를 담당했던 구미출신 경북 경찰 고등계 정치 담당형사였던 윤갑득씨의 자필 사실 확인서가 포함됐다고 증언하고 있다.
경찰에서 퇴직한 이후 구미 인동 동장을 지내기도 한 윤 씨는 김 선생의 독립운동정신을 높이 평가한 내용과 고문 및 구금의 경과를 잘 정리해 줬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당시 윤씨의 자필 확인서가 있다면 유력한 입증이 가능할 것이라는 가족들의 아쉬움 속에는 사료정리를 총괄했던 주필에 대한 원망이 깔려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1992년에 세상을 뜬 김 선생의 아내인 최복인 여사는 남편의 명예를 재조명하지 못한 한을 자식들에게 유언으로 남기기까지 했다고 한다. 필경 어느 독립투사와도 다를 바 없이 해방 후 자녀양육과 생계에 시달렸던 최 여사는 지금의 구미초등학교에 교편생활을 했던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둘째 이들인 김 사장은 아버지의 명예를 조명하지 못한 것도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지만, 더욱 가슴이 아픈 것은 어머니의 유언을 헤아리지 못한 점이라고 말문을 연 뒤 눈시울을 적셨다.
우리 5천만 국민 모두는 이렇듯 어두웠던 격변기를 뒤로한 체 더 새로운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꿈과 희망의 미래를 향해 달릴 수 있는 오늘이 있기까지 민족자결의 이념으로 몸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구국 염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이는 과연 얼마나 될까. 이러한 역사적 경과를 놓고 볼 때 우리는 지금 김 선생에 대한 명예복원과 재조명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렇다면 우선 구미시가 홈페이지를 비롯한 홍보매체를 통해 지역출신 독립 운동가를 재조명하는 일에 나서는 일이 필요하다. 구미시와 지역정치권이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다.
<대표이사/발행인 박순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