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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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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4월 구미문화재보존회(지금은 구미문화지킴이)회원들과 우리구미지역의 삼국시대의 고분 분포도를 조사하러 다니던 중 금오산 (지금의 자연학습원이다)저수지부근에서 조선시대의 백자를 구웠던 가마터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이일로 우리구미지역의 자기 가마터를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아무런 문헌과 기록물이나 자료등이 없는 백지상태에서 또한 사전지식도 없이 무작정 가마터를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나 마찬가지였다. 우연히 이웃하는 군위지역에서 조선초기 분청사기에 군위인수부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 도자기를 볼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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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껑엔 "군위" 밥그릇엔 "인수"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청주박물관 소장 |
* 태종 17년(1417년)에는 관청에 상납할 자기와 나무그릇에 관청이름을 새기도록 했다. 관청의 이름은 대체로 지방이름과 함께 사용되는데, 인동인수부,인동장흥고(사선.예빈.) 상주 인수부, 언양인수부·순흥장흥고·군위인수부·언양장흥이란 글자등은 각 지역에서 도자기를 제작 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는데, 각 지역마다 명문과 함께 조형과 문양도 아름답다.인수부는 정종 2년 2월에 아우 정안공(靖安公)을 왕세자로 세우고 국가의 중요한 일을 맡게 한 관청으로 후에 세자부를 설치하여 인수부라 했다. 이후 세조 원년에 덕령부(德零府)로 이름이 바뀌고 폐위 당한 단종을 위한 관청이 되었다가 단종이 죽자 다시 인수부로 고쳐져 명종 11년까지 존속한 세자부이다.따라서 인수부랑 글자가 있는 도자기는 정종 때 10개월과 세종이후 명종까지 약 140여간 제작된 도자기임을 알려준다.
인수부(仁壽府)라는 명문을 접하면서 의문을 가지고 주위의 많은 학자들이나 고고학교수, 사학과 교수들에게 문의해보았지만 도자기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학자들은 없었다. 여러가지 사전과 문헌등을 조사하다가 인수부라는 글뜻과 조선초기 인수부를 설치한 이유를 알게되었다. 그리고 세종실록 지리지에 우리 구미에도 자기소가 2 곳이나 설치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선 세종실록 지리지에 인동현 동쪽 막곡리란 지명이 나와 있다. 막곡리란 곳이 어디에 있는지 칠곡군청이나 문화원등에 알아보았지만 조선초기의 지명이라 모두들 모른다고 하였다. 그러다 7월 여름 날 칠곡군 가산면 학하동(유학산)에 친구들이랑 계곡에 놀러가게 되었다. (지금은 칠곡군에서 골프장 허가를 주어 가마터는 지하로 영구히 묻혀버리고 말았다 1996년경 칠곡군청에 유학산 부근에 가마터가 2곳이나 있음을 알렸다 그 후 2004년경 이곳에 골프장이 들어선다 하기에 당시 칠곡군청문화계에 연락하여 귀중한 조선시대의 가마터가 있음을 알리고 이곳에 체험학습장을 만들어 도자기 만들기, 산골마을 체험, 다양한 문화센타등을 건립하여 문화관광단지 조성등을 하도록 건의 하였지만 환경을 오염시키는 골프장이 들어서고 말았다.)
계곡에서 상감무늬가 들어있는 도자기파편을 하나 우연히 줍게 되었다. 주어서 보니 상감청자파편으로 또 다른 도자기 파편이 보이길래 주워서 보나 이번엔 분청자기였다. 파편이 보이는 둔턱을 따라 올라가보니 아주 넓은 분지 비슷한 곳에 옛날 사람이 살았던 집터 같은 곳이 있었다.
집터 옆에 당시 생각으로 가마터로 짐작하였지만 문외한 나로서는 그 곳이 가마터인지 도자기 굽다가 실패작인 자기를 버린곳인지 잘 모르고 있었다.
여기에서 당시 같이 갔던 친구가 주워온 파편을 보니 사선(사선)이란 명문이 들어있었다.
사선이란 명문이 발견되었어도 그 당시엔 분청자기 가마터가 그리도 중요한지를 또한 명문이 얼마나 학술적으로 귀중한지(10여년이 흐른 뒤에 알게되었다.)를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