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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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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절한 사랑의 추억은 세월이 흘러도 돌아보면 엊그제만 같아 보인다. 하지만 지고없는 앞산 진달래 꽃은 간절한 그리움 끝에 꽃으로 다시 피어나지만, 가고없는 인명에 대한 그리움은 늘 그리움으로 돌아올 뿐이다. 가장 처절한 이들을 진솔하게 사랑한 육영수 여사 역시 매한가지 일 것이다. 육여사가 그들 곁을 떠난 때는 1974년 8월 15일, 세월은 유수와 같은 것이어서 어느 덧 3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 구미시민들에게 육영수 여사는 엊그제 같은 소중한 추억일 것이다. 그만큼 절절하게 사랑했기 때문이리라. 이 땅 곳곳에는 아직도 육 여사를 소중히 추억하는 이들이 적지가 않다.
"아침에 깨어나면 손가락 하나가 잘려나가고, 다시 자고 나면 발가락 하나가 다시 잘려나가고.... 나는 그것들을 고운 천에 싸 양지바른 언덕에 묻는다"라고 노래하던 문등병 시인 한하운. 육여사에 대한 추억이 더욱 고운 것은 누구도 사랑하려고 하지 않던 문등병환자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리라.
1974년 8월 15일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이 열리던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육영수 여사는 비운에 타계했고, 전국 곳곳에 마련된 분향소에는 눈물많은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념과 계층을 떠나 애도의 행렬이 마치 강물처럼 흘러넘쳤으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독재와 항거한 젊은이들이 철창으로 무더기무더기 끌려가던 그 무렵, 그래도 그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육영수 여사는 따스한 모정이었다. 그만큼 그 당시에도 육 여사는 모든 국민의 가슴 속을 아름다움과 은은한 사랑의 이미지로 채색케 했다.
그 만한 이유가 있었다. 육 여사는 생전에 그늘진 곳을 찾아다니며 국민들의 가슴 속에 따뜻한 사랑과 절절한 사랑을 심어주었다. 특히 고아원 어린이들을 지극히 보살펴 준 손길을 따라 가슴 속으로 흘러들면 양로원 어르신들에 대한 공경심이 넘쳐 흘렀다.
- 나환자촌을 찾던 눈가에는 흐릿한 눈물이
그 당시, 가장 천대받던 곳이 다름 아닌 나환자촌, 육 여사는 세상의 인심으로부터 버림받은 전국의 77개 나환자촌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특히 전국 익산군 상지 나환자촌을 방문한 육 여사는 뭉그러진 손을 덥썩 어루만져 주었고, 이 모습을 보고 감동한 나환자들은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감동적인 사랑은 세월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어느덧 37주기, 흐르는 1백리 낙동강 물줄기 속에 육 여사의 따스한 웃음은 세월이 흘러도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것만 같다.
육영수(1925년11월8일- 1974년 8월15일) 여사는 충청북도 옥천 출신이다, 본관은 관성 육씨. 아버지 육종관과 어머니 이경령 사이의 1남 3녀 가운데 둘째딸로 태어났다. 큰 언니는 육 인순, 오빠는 육 인수 였다.
육 여사는 1930년 말 옥천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서울 배화여고를 졸업한 후 옥천 중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6.25 전쟁이 일어나던 해인 1950년 10월12일 당시 박정희 중령과 결혼했다.
육영수 여사는 근혜, 근영, 지만 등 3자녀를 낳았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이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대통령 부인으로서 각종 사회 활동, 육영사업, 적십자 활동에 적극 참여 했다.사회 활동으로 육 여사는 양지회 활동과 함께 각 시군에 여성회관을 건립, 여성의 사회 참여를 선도하기도 했다.여성의 사회참여 운동을 가시화시킨 선구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여성에 대한 관심은 각별했다.
자연보호 운동, 식생활 개선, 의류 혁신, 문화사업 지원, 자원 봉사활동, 적십자 활동, 양지 진료소의 개설, 불우이웃 돕기, 윤락여성의 자활 운동, 양로원, 고아원 위문, 전몰 군경 미망인 자활운동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통해 국민 의식 개혁에 앞장 선 육 여사는 특히 희망의 등불이라는 농어촌 여성 계몽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도 각별했다. 청소년들을 위해 경로효친 사상을 불어넣었고, 어린이 대공원을 조성한데 이어 1969년 4월14일에는 육영재단을 설립, 어린이 회관을 짓고, 어린이 잡지<어깨동무> <꿈나무> < 보물섬>등을 발간했다. 아울러 청소년들에게 직업교육을 시킬 목적으로 정수 직업 훈련소를 개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4년 8월 15일 광복 제 29주년 기념식장에서 재일교포 문세광의 흉탄에 맞아 세상을 떠나야 했던 육 여사, 그해 19일 온 국민의 애도 속에서 육 여사는 국립묘지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 전통적인 한국여성의 상
육영수 여사는 남편을 ‘여보’, ‘당신’등으로 부르지 않고, ‘드세요’, ‘저 좀 보세요’등으로 부를 정도로 조심스럽게 남편을 대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는 옷 맵시에 마음을 쓰고, 절대 맨발이 보이지 않도록 버선을 신었다고도 한다. 육여사는 또 박정희 대통령을 위해 물이 든 세수대야를 받쳐들었고, 마루에 서기도 했을 정도로 남편을 깍듯하게 모셨다고 한다.
1974년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세상을 떠나자, 1974년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던 박근혜 전 대표는 급히 귀국했다.
모정을 가장 필요로 할 나이에 어머니를 여윈 박 전대표에게는 어깨 무거운 책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1974년부터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1979년 10월까지 5년동안 퍼스트 레이디의 열할을 대신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당시 박 근혜 전대표는 어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새마을 운동의 일환인 새마음 운동을 주도했고, 1982년 육영재단, 1994년 정수장학회 등을 물려받아 운영했다.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접은 박근혜 전대표가 다시 정치의 세계로 돌아온 것은 1998년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당선되면서였다. 박대통령이 세상과 결별한지 20년만의 일이었다.
- 구미의 딸이 저렇게 외롭고 고독해 보일 수가..
2008년 박 전대표는 육영수 여사, 박정희 대통령에 이어 박대통령 생가를 애지중지 쓸고 닦던 김재학 생가 보존회장을 떠나보내야 했다. 박 전대표에게는 3번째 비운의 결별이기도 했다. 그해 3월 27일, 구미 순천향병원에 마련된 김재학 회장의 빈소 앞에서 박 전대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구미시민들은 이런 말을 남겼다.
"구미의 딸이 저렇게 외롭고 고독해 보일 수가.."
1974년 조총련계인 문세광에게 총탄을 맞아 유명을 달리한 고 육영수 여사, 1979년 10월 26일 비운을 맞은 박정희 전 대통령, 2006년 지방선거 유세 도중 피습을 당한 박근혜 전 대표, 2008년 3월 26일 피살된 박정희 대통령 생가보존회 김재학 회장.
이제 박 전대표는 가슴 깊은 강에 흐르는 결별의 그리움을 포개앉고 세상의 중심을 향해 걸어들어가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세상은 문둥병 환자의 손을 어루만지던 육여사의 고운 사랑을 기대하고 있으리라.
국모이자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의 추도식을 앞두고 있는 박근혜 전대표의 심정은 누구보다도 남다르리라. 어려운 국민을 누구 못지 않게 사랑하던 육영수 여사의 얼이 딸 박 근혜 전대표에게 계승돼 국민을 진정 사랑하는 정치인으로 거듭나길 세상은 갈망하고 있다.
김경홍기자(gbmhsm@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