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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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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미군 폭격기에 의해 피해를 입은 형곡동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건립을 위한 추진위원회를 17일 구성했다.
공동위원장은 형곡1․2동 출신 손홍섭,박교상 시의원이 맡았으며, 간사는 이규원 전 시의원, 위원은 유족대표 6명, 지역대표 2명, 시민대표 2명으로 총12명이다.
위령탑 건립 추진위는 지난 2월 8일 구미시의회에서 형곡동 출신 손홍섭 의원이 “위령탑 건립 촉구”에 대한 5분 자유발언을 시작으로 4월 30일 1차 모임을 거쳐 본격적인 실무작업에 착수한지 17일만에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추진위원회는 6월 중 충북 영동군, 강원도 강릉시, 전남 곡성군, 경북 예천군 등 위령탑이 건립된 지방자치단체를 방문, 6.25전쟁 당시 희생자 자료수집 및 발굴을 위한 벤치마킹을 나설 계획이다.
또 향후 2013년도 예산에 반영해 오폭으로 희생된 주민들의 넋을 기리고 유족들을 위로할 수 있도록 내년 8월에 위령탑 건립 마무리와 함께 추모행사를 갖기로 했다.
<비극의 현장 시무실, 지금의 형곡동>
구미시의회 손홍섭 의원은 지난 2월 8일 열린 구미시의회 본회의 5분발언을 통해 6.25 전쟁 당시 형곡동 오폭사건에 따른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건립을 촉구했다.
이날 손의원은 6.25 전쟁 이후 60여년 동안 구미는 대한민국 내륙 최대의 수출도시로 급부상한 가운데 지난해의 경우 수출 335억불을 달성하는 등 국내외 관심이 집중되고 있고, 시민들의 삶은 풍요로워졌지만, 그 이면에는 아직도 피눈물 나는 아픔을 겪으며 살아가는 분들이 있다면서 형곡동 미군 오폭 사건의 비극을 공개했다.
손의원은 " 6.25전쟁이 발발한지 6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면서 " 지난 날 암울했던 역사의 진실을 규명해 인권과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야 할 시점"이라고 주장했다.
또 " 비명에 간 원혼을 달래고, 오랜 세월동안 불구의 몸으로 가슴아픈 인생을 살아온 피해주민과 유족을 위해 최소한의 예의를 갖출수 있도록 위령탑 건립을 강력이 촉구한다"고 거듭 밝혔다.
손의원은 특히 "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은 이미 강릉시를 비롯한 동해시, 제주도, 곡성군, 예천군 등 전국적으로 많은 지자체에서 앞서 건립했다"고 밝히고 " 구미시에서도 빠른 시일내에 희생자 위령탑 건립을 추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경북문화신문 역시 지난 2007년부터 위령탑을 건립해야 한다면서 형곡동 비극사를 집중 보도해 왔다. 결국 본지의 집중보도와 손홍섭의원의 노력에 의해 결실을 도출하게 이른 것이다.
이와관련 구미시민들은 "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굴곡의 역사속에서 비극을 겪은 시민들의 아픔을 잊지 않고, 이를 공론화한 손의원의 결단에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미군 폭격기 시무실 오폭 사건>
그렇다면 1950년 시무실( 지금의 형곡동)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50년 6.25발발 당시 시무실로 불리던 지금의 형곡 주민들은 농사만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순박한 이들이었다.
이들에게 비극의 기운이 밀려온 것은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였다. 그해 여름,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인 지정학적인 특수성 때문에 이곳에는 수천 명의 피난민들이 만호처럼 몰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순박한 마을 주민들은 전쟁을 피해 이곳으로 온 피난민들과 함께 포성 속에서 숨죽이며 전쟁이 끝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허망한 기대였다. 1950년 8월 16일( 음력 7월 2일) 오전 10시경, 기체 불명의 폭격기 몇 개 편대가 수 시간 동안 시무실을 맹폭하면서 마을은 삽시간에 비극의 먹구름으로 뒤덮혔고,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설상가상, 폭격이 끝나자마자 다시 제트기 몇 대 편대가 마을을 향해 기관포 사격을 가해왔다.
이 난리통에 1백 3십명을 훨씬 웃도는 주민과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피난민들이 집단 떼죽음을 당해야 했다.당시 목격자들에 따르면 한 집안이 몰살된 경우가 많았으며, 마을과 인근 산야가 벌집 쑤셔놓은 것처럼 참담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피폭자들은 무장한 군인이 아니라 순수 민간인들이었다는 것.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당시 동사무소에 공식 신고된 형곡동(당시 시무실)의 사망 주민은 130여명, 전쟁 중이어서 급박한 정황 때문에 미처 신고하지 못한 사람까지 포함하면 수백 명에 이를 것으로 당시를 목격한 이들은 예상하고 있다.
특히 타 지역에서 이 마을로 피신한 이들 중 사망한 사람은 통계에 포함되지조차 않았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면, 그 피해자는 엄청날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비극을 밝혀내기 위한 노력>
지울 수 없는 악몽 속에서 살아온 생존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참극이 발생하고 40년이 지난 1992년 이종록(발기인 대표)옹을 중심으로 ‘위령탑 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미국의 미자도 꺼내지 말라’는 국방부로부터의 회신을 받고 이들은 좌절해야 했다.이어 2005년에는 구미시에 의견서를 제출하고, 진정서를 냈으나 시정에 반영되지 않았다.
결국 1년 후인 2006년 11월 28일 이규원 전 구미시의회 의원은 진정서 마감시한을 이틀 앞두고 부랴부랴 진정서를 작성하고, 과거사 정리 기본법에 따라 과거사위에 자료를 제출했다. 이로부터 2개월 후인 2007년 1월 위령탑 건립 추진위는 오매불망 그리던 ‘결정통지서’를 손에 쥘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장조사에 착수한 것은 조사개시 결정 통지문을 받은지 2년 3개월 후인 2009년 4월 7일이었다. 그러나 현장조사를 했지만, 이를 뒷받침할 법안이 발의, 의결되고, 보상에 따른 재조사를 꿈꿔온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꿈은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