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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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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인 2007년 8월 20일 오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대회가 열린 서울 올림픽체조 경기장에서 K모 보좌관의 전화가 걸려왔다. 작열하는 한 여름의 허공을 뚫고 달려온 보좌관의 음성에는 힘이 없었다. 순간, 박근혜 후보에게 행운의 여신이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직감이 감지됐다. 결국 직감은 현실이 돼 있었다.
투표 결과 발표와 함께 당시 박근혜 후보는 “경선 결과에 승복하고 백의종군하겠다”는 단장의 연설문을 짧게 마무리 짓고 하단 했으나, 대회장에 진을 치고 있던 박사모는 “여론조사, 경선무효”를 외치며 눈물을 곱씹었다.
사정은 구미 현지도 매한가지였다. 갈증을 해갈시켜 주리라던 ‘박근혜의 희망“이 좌절이 되어 착륙하자, 친박 정서의 절대다수 구미시민들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우연이었을까. 구미에 소재한 모 대기업은 경선대회 하루 뒤인 그해 8월 21일 구미의 또 하나 희망이었던 연구동 사업을 중단한다는 발표를 했다. 구미로선 설상가상의 비보였다.
친박정서가 절대적이었던 구미의 민심은 2007년 12월 19일 실시된 선거에서 그대로 노정됐다. 이명박 대통령의 고향인 포항북구와 포항 남구는 각각 84%와 80%라는 절대적 표심을 이 대통령의 손에 쥐어준 반면 친이에 대한 구미의 우호적 표심은 전통적으로 야성이 강한 의성군의 66.85%에 이은 66.87%에 불과했다. 72%의 경북도 평균 득표율에 훨씬 못미치는 결과였다.
갈등의 골은 MB정권이 들어선 직후 실시된 18대 총선을 거치면서 더욱 더 깊게 패이기 시작했다.친박계 공천 학살로 명명된 17대 총선을 위한 한나라당 후보공천은 친박 성향이 절대적인 구미민심을 요동치게 했다. 공천결과를 지켜보던 백의 종군 정치인인 박근혜 전 대 표는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통탄을 하면서 낙천 후 친박 무소속 혹은 친박연대의 명함을 내밀고 출사표를 던진 자파 후보들에게 “살아서 돌아오라”고 호소했다.
이러한 정치적 요동기 속에서 낙천 후 친박 무소속으로 출사표를 던진 김태환 국회의원을 비롯한 친박계파의 후보들은 “살아서 돌아가겠습니다”라는 대형 걸게 현수막을 내걸고 정치 현장으로 뛰어들었고, 18명의 친박계 후보들은 한나라당 후보를 파죽지세로 누르면서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친박계 후보에 대한 18대 총선 당시 구미 민심은 상대적으로 돋보였다. 친박무소속 후보로 출전한 김태환 국회의원은 한나라당 후보가 득표한 29.3%를 두배 가량 압도한 59.8%를 득표하면서 ‘미소입성’하는 영예를 안았다.
하지만 한나라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친박 무소속 혹은 친박연대 소속의 18명 국회의원들은 18대 총선이 끝나고 1년 2개월이 지난 2009년 6월에 복당하는 가슴앓이를 감수해야만 했다.
▶박정희 향수와 박근혜 신뢰 정서
전국 팔도출신들이 모여들어 오순도순 삶의 터전을 닦고 있는 42만 구미시는 역대 선거를 통해 18%- 25%에 이르는 야성 성향을 보였다.따라서 75%의 절대다수는 친박정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팔도출신들로 이루어진 구미에서 75% 이상이 친박성향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진보와 보수, 호남과 영남으로 정치정서가 확연히 갈라서는 한국적 정치 풍토에 비추어 볼 때 특이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구미가 낳은 박정희 대통령의 정서가 세월과 무관하게 상당한 흡인력을 보이고 있다고 풀이해야 옳을 듯 싶다.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선출을 위한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패하자, 절대다수의 구미 시민들이 집단적 우울 증세를 보인 것도 그 근간에는 갈망하는 박정희 정서가 딸 박근혜 전 대표를 통해 발전적으로 진화되기를 바랬던 탓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절대다수의 구미시민의 집단적 우울증세는 2012년 12월 19일 실시되는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호전양상을 보이고 있다. 박근혜 전 대표가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유력시되는데다 다자 후보군은 물론 여권 대 야권의 일대일 구도 속에서도 선두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박근혜 전 대표를 존재케 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구미 민심은 역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어떻게 표출되었을까.
- 박정희 대통령과 역대 대선 그리고 경북도와 구미 민심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3년간의 미군정기를 종료한 1947년 7월 20일 비로소 제1대 대통령 선거가 국회에서 선출하는 간선방식을 통해 실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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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톨령 |
대한독촉당 이승만 (74세), 무소속 김구(68세), 무소속 안재홍(66세) 후보등 3파전으로 전개된 선거에서는 와싱턴대와 하버버대 출신으로 미국통인 이승만 후보가 당선됐다.
▷이어 1952년 8월5일 실시된 제2대 대통령 선거는 직선방식을 도입했다. 당시 선거에는 모스크바 공산대 출신의 무소속 조봉암(54세), 자유당 이승만(78세), 구 한국 과거에 급제한 출신의 무소속 이시영(84세), 미국 남가주대 고등과 의과를 수료한 미국통의 무소속 신흥우(68세)후보 등이 출전하면서 다자구도로 선거전이 치러졌고, 이승만 후보가 당선되면서 결국 재선 대통령이 됐다.
▷4년 후인 1956년 5월 15일 실시된 제3대 대통령 선거에는 농림부 장관 출신의 무소속 조봉암(58세), 국회의장과 임정내무부장, 자유신문사 사장 출신의 민주당 신익희()61세),자유당 이승만(82세)대통령이 출사표를 던졌고, 결국 이승만은 3선대통령에 당선되는 자신만의 영예를 안았다.
▷권력은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는 생선맛과 같은 법이다. 그러나 현명한 이는 맛에 매료되지만 때를 알고 씹던 고개를 내뱉는 법이다. 결국 이승만의 장기집권 음모에 반발한 고려대생을 비롯한 청년들은 이승만 타도를 외치면서 들불처럼 타올랐고, 3선의 이승만은 망명객의 신세가 되어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와 함께 1960년 3월15일 실시된 제4대 대통령 선거는 국회에서 선출하는 간선방식으로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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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 대통령 |
민주당 윤보선, 김창숙,변영태, 백낙준, 허정, 김도연 등이 후보로 나선 선거에서는 이순신 장군과 동향인 충남 아산태생으로서 에든버러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시장 출신의 윤보선 후보가 당선됐다.
이후 5.16군사 쿠데타로 대통령 직에서 물러난 윤 대통령은 이후 실시된 5대,6대 대선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대결을 벌였으나 번번히 실패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1979년 신민당 총재 상임고문, 1970년 국민당 총재 등을 거치면서 정치권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또 한국 정치사의 고질병인 계파간 정쟁이 낳은 희생양의 표본이기도 했다.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그는민주당의 신구파간 갈등 속에서 속앓이를 해야 했고, 결국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이 주축이 된 군부에 의해 하야하는 운명을 맞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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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
▷구미출신 박정희 대통령이 44세의 나이로 한국정치사에 최초로 명함을 내민 것은 1961년 6월 국가 최고 재건회의 의장으로서 였다.
이어 대통령의 직에 오른 것은 2년 후인 1963년 10월 15일 제5대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면서였다.
그해 치러진 선거에는 제17대 대통령 선거의 경쟁률에 버금가는 7대1의 치열한 경쟁률을 보였다.결국 신흥당 장이석(60세), 육군 참모총장, 국방장관 출신의 자유민주당 송요찬(45세), 국가최고 재건회의 의장 출신의 민주공화당 박정희(46세), 건설신문사 사장 출신의 추풍회 오재영(44세), 대통령 출신의 윤보선(66세), 국무총리 서리 출신의 국민의당 허정(67세), 국무총리 출신의 정민회 변영태(70세) 등 기라성 같은 후보들이 나선 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윤보선후보가 득표한 454만표보다 16만표가 많은 470만표를 득표하면서 진땀을 흘린 끝에 당선됐다.
당시 선거에서는 지역갈등 양상은 드러나지 않았다. 경북도(대구 포함) 165만표 중 박정희 대통령이 83만7천표를 얻은데 비해 윤보선 후보의 득표력은 54만3천표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 선산군(지금의 구미시)은 총 투표자 4만8천표 중 72.6%인 3만4882표를 박정희 대통령의 손에 쥐어졌다.반면 윤보선 후보는 7천 319표를 획득했다. 하지만 윤보선과 재격돌한 6대선거와 호남출신의 김대중 대통령과 격돌한 제7대 대선을 거치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최고 87.4%의 득표율을 보이면서 구미에 박정희 향수를 깊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1967년 5월 3일 직선제로 실시된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은 윤보선 전 대통령과 재격돌해야만 했다.하지만 표차는 5대에 비해 상당히 벌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선거 결과 전체 투표자 1천 164만표 중 민주공화당 후보인 박정희 대통령은 568만표를 득표해 452만표를 얻은 신민당 윤보선 후보를 1백1십여만표 차로 눌렀으니 말이다. 5대 선거에서 나타난 표차인 16만표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들 정도였다.
6대 대선에서는 여타 후보들이 나섰으나 정의당 이세진 9만표, 한국 독립당 전진한 23만표, 민중당 김준연 24만표, 통한당 오재영 26만표의 득표율처럼 관심의 대상으로 부상되지는 않았다.
특이한 점은 6대 대선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경북득표율이 돋보이기 시작한데다 구미에서의 득표율이 80%에 육박했다는 점이다. 반면 전남지역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이 윤보선 후보를 앞서는 특이상황을 낳았으니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당시 경북(대구포함)지역 선거에서는 총 투표자 178만표 중 박정희 대통령이 1백만8만표를 얻으면서 60%대의 득표율을 보인 반면 윤보선 전 대통령은 44만7천표로 24%를 얻는데 그쳤다.
선산군(지금의 구미시)은 총 4만9천명의 투표자 중 박정희 대통령에게 3만9천표를 몰아주었다. 이는 80%대에 근접한 79%의 득표율이었다. 반면 차점자인 윤보선은 4천6백표로 9%의 득표율을 얻는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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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 |
▷1971년 4월27일 실시된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50대 말의 박정희 대통령은 40대 기수론을 들고 출사표를 던진 전남 목포 출신의 김대중 후보와 격돌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대선사상 최초의 동서대결이었으나, 박정희, 김대중 후보가 각각 적지에서 나름대로의 득표력을 보이면서 동서간 갈등은 눈에 띄지 않았다.
민주공화당 박정희, 신민당 김대중, 국민당 박기출, 자민당 이종윤, 정의당 진복기 후보가 나선 가운데 전체 투표자 1천 2백41만표 중 박정희 후보는 634만표를 얻은데 비해 김대중 후보는 539만표를 얻는데 그쳤다. 하지만 40대의 김대중 후보가 90여만표차로 따라붙은 것은 여권으로서는 충격적이었다.
경북지역(대구포함)에서는 총 투표자 183만표 중 박정희 후보가 133만표를 얻었으며, 김대중 후보 역시 41만표를 얻으면서 득표력을 과시했다.
또 전남에서는 149만표 중 김대중 후보가 87만4천표를 얻었고, 박정희 후보 역시 47만9천표를 얻으면서 득표력을 과시했다.
특히 김대중 후보의 고향인 목포에서도 김대중 후보가 3만 8780표를 얻은 반면 박정희 후보 역시 1만889표를 득표하면서 동서간 갈등의 노출되지 않았음을 증거해 보였다.
하지만 선산군(지금의 구미시) 은 90%에 가까운 민심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쏠려 있었다. 총투표자 4만6650표 중 박정희 대통령은 87.4%인 3만8780표를 득표하면서 3천832표, 8.2%에 그친 김대중 후보를 멀찌감치 따돌렸기 때문이었다.
▷ 1972년 12월 23일 실시된 제8대, 1978년 7월6일의 제9대, 1979년 12월6일의 제10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통일주체 국민회의에 의한 간접선거 방식으로 대통령을 선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제8대, 9대 대통령에 당선됐으며,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동향의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운명을 달리한 직후 실시된 제10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비극의 최규하 대통령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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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대통령 |
이어 1980년 8월 27일 실시된 제11대 대통령 선거 역시 통일주체 국민회의에 의한 간선방식을 통해 전두환을 대통령에 당선시켰다. 사실상 11대 대선은 5.18 광주 민중항쟁의 가해 당사자인 전두환 대통령의 강압에 의한 것으로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면서 젊은 청춘들을 교도소로 향하게 했고, 동서간 갈등을 야기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 방식을 통해 실시된 1981년 2월 25일의 제12대 대선은 제11대 대선을 실시한지 불과 6개월만이었다. 민정당 전두환, 한국 국민당 김종철, 민권당 김의택, 민한당 유치송이 후보로 나섰으나, 야당의 대표주자 형식을 내걸고 출사표를 던진 유치송 후보는 정도야당의 길에서 외도했다는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 역대 대선과 보수 성향의 구미민심은
1972년 직선제에서 간선제로 대선방식이 바뀌고 다시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돌아오기 까지는 16년 세월이 흐른 후 였다.이 기간 동안 미래가 창창한 386세대의 주축인 젊은 대학생들은 줄줄이 철창신세를 져야만 했다. 박종철 군 사망사건은 가슴을 쓰려오게 하는 뼈 아픈 역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중한 희생을 바탕에 깔고 대선방식이 직선제로 진화했지만, 1980년부터 나타나기시작한 동서간의 갈등은 그대로 표심으로 표출되면서 국민화합과 국가발전에 악재로 작용하는 불행을 낳았다.
이와함께 박정희 정서에 뿌리를 내린 절대다수의 구미민심은 13대 대선 이후 보수성향에 많은 표를 몰아주기도 했으나 때로는 진보성향의 후보에게도 득표력을 선물하는 지혜를 발휘하는 현명한 선택을 하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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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대통령 |
▷16만에 직선제 방식으로 실시된 제13대 대선에는 민정당 노태우,민주당 김영삼, 평민당 김대중, 공화당 김종필, 한국당 신정일 후보가 출마했다.
김대중, 김영삼으로 지칭되는 양김 후보단일화가 쟁점이 비롯된 선거였고,김대중-김영삼- 김종필로 지칭되는 3김시대가 출현한 때이기도 했다.
선거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총 2천3백만 투표자 중 노태우 후보가 828만표를 득표하면서 당선됐고, 김영삼후보는 633만표, 김대중 후보 611만표, 김종필 후보는 182만표였다.
경북지역에서는 총 170만표 중 노태우 110만표, 김영삼 47만표, 김대중 3만9천표, 김종필 4만3천표였다.
반면 전남에서는 총 149만표 중 노태우가 11만9천표를 얻는데 그친 반면 김대중 후보는 131만표를 획득했다. 특히 김영삼 후보는 1만6천표, 김종필 후보는 4천831표를 얻었다. 동서간의 갈등이 확연히 표출된 선거였다.
이와함께 선산군에서는 총 4만 872표 중 노태우 3만551표, 김영삼 7천222표, 김종필 후보가 1천581표를 얻은 반면 김대중후보는 527표를 얻는데 그쳤다.
구미시에서도 양상은 같았다. 총 7만8천표 중 노태우는 5만633표를 얻었고, 김영삼 1만8329표, 김종필 후보가 4천664표를 얻었으나, 김대중은 3천872표의 득표에 머물러야 했다.
반면 김대중의 고향 목포에서는 역 현상이 나타났다. 총 11만6천표 중 김대중은 10만6천표, 노태우 6천337표, 김영삼 692표, 김종필은 283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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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대통령 |
▷ 1992년 12월18일 실시된 제14대 대선은 노태우-김영삼- 김종필이 나선
가운데 3당 합당을 이루면서 선명성 논란이 야기됐다. 정주영 현대회장과 수재 출신 박찬종씨가 출마한 선거이기도 했다.또 확고한 진보성향의 백기완 후보가 출마해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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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전 총재 |
선거결과 총 2천4백만표 중 민자당 김영삼은 997만표를 득표하면서 당선됐고, 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8백만표를 득표하는데 그쳐 고배를 마셔야 했다. 국민당 정주영 후보는 380만표, 신정당 박찬종 151표, 최초의 여성 대선 후보인 무소속 김옥선은 8만6천표를 얻었다. 무소속 백기완 후보는 23만8천표였다.
경북도에서는 총 155만표 중 김영삼 99만표, 김대중 14만표, 정주영 24만표, 박찬종 12만표, 백기완 1만7천표였다.
구미시는 총 9만9천명의 투표자가 김영삼 5만7천, 김대중 1만, 정주영 1만7천, 박찬종 후보에게 1만1천표를 안기면서 비교적 모든 후보의 체면을 살렸다. 김대중 후보의 1만표 득표가 눈길을 끌기도 했다.
반면 전남의 128만 투표자들의 성향은 김영삼 5만3천,김대중 117만표, 정주영 2만7천표,박찬종 7천표, 백기완 3천표였다.
목포의 경우 12만표 중 김영삼 2천5백표, 김대중 11만5천표, 정주영 1천4백표, 백기완 256표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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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전총재 |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제15대 대선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당선이 점쳐졌으나, 김대중-김종필씨가 연합전선을 형성하면서 이 후보에게 암울한 미래를 예고했다.더군다나 이인제 후보의 경선 불복과 대선출마는 설상가상이었다. 진보권의 권영길씨의 출마도 눈길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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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씨 |
예상대로 2천6백만표 중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1천32만표를 득표하면서 993만표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50만표 차로 따돌리고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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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재 국회의원 |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는 4백92만표를 획득하면서 저력을 과시했다. 권영길 후보는 30만표를 획득했고, 황당공약으로 관심을 모은 허경영 후보는 3만9천표였다.
경북에서는 총 157만표 중 이회창 95만, 김대중 21만, 이인제 33만, 권영길 후보가 2만2천표를 얻었다, 반면 전남에서는 132만표 중 이회창 4만1천, 김대중 123만, 이인제 1만8천, 권영길 2천1백표였다.
당시 선거에서 구미민심은 쏠림 현상에 인색했다. 구미시갑의 8만7천표 득표력에서 이회창 4만9천표,김대중 1만3천표, 이인제 2만표, 권영길 후보는 2천1백표였고, 구미시을은 7만9천표 중 이회창 4만8천표, 김대중 1만1천표, 이인제 1만6천표, 권영길 1천3백표였다.
반면 전남은 132만표 중 이회창 후보에게 4만1천표를 준 반면 김대중 후보에게는 123만js표의 몰표를 선물했다.이인제 후보는 1만8천, 권영길 후보는 2천1백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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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
▷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제16대 대선에서도 당선이 확실시 되던 이회창 후보가 고배를 마셔야 했다. 청문회스타인 노무현 후보가 회오리 바람을 일으킨데다 막판에 정몽준 씨와의 후보단일화는 노 후보에게 행운을 갖다주었다.특히 김대중 대통령 임기 말, 대통령보다 입김이 강했던 이회창 후보의 패배는 유력 후보들에게 많은 의미를 시사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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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길 씨 |
선거결과 총 2천 478만표 중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1천144만표를 얻었으나 1천2백만표를 얻은 민주당 노무현 후보에게 56마표차로 패배해야 했다. 민노당 권영길 후보는 95만표를 획득하면서 진보권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내로라하는 정치세월을 구가했던 하나로 연합의 이한동 후보는 7만4천표를 얻으면서 현대 정치사를 떠나야 했다.
경북에서는 총 146만표 중 이회창 1백5만표, 노무현 31만표, 권영길 후보는 6만2천표를 득표했다.
전남에서는 116만표 중 이회창 5만3천, 노무현 1백만,권영길 1만2천표였다.
당시 선거에서도 구미시 유권자들은 쏠림현상을 억제했다. 총 16만표 중 이회창 11만3천표,노무현 3만7천표, 권영길 후보는 8천9백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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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 |
▷2007년 12월 19일 실시된 제17대 선거는 직선제 방식의 대선 역사상 1-2위 격차를 가장많이 벌렸다. 재-삼수생들도 많았다.이회창-권영길 후보는 3수, 이인제- 허경영후보는 재수였다. 문국현 후보의 돌풍이 돋보인 선거이기도 했다.
이와함께 박근혜 전 대표의 경선패배 후유증이 영향을 끼치면서 구미유권자들은 이명박 후보에게 도내 23개 시군 중 가장 낮은 표수를 안겨주기도 했다.
총 2천 373만표 중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1천 149만표로 48.75를 득표하면서 617만표(26.1%)의 득표에 그친 민주당 정동영 후보를 5백30며만표로 따돌리는 정치적 이변을 도출했다. 민노당 권영길 71만(3%), 이인제 16만표(0.7%), 창조한국당 문국현 137만표(5.8%), 경제공화당 허경영 9만6천표 등이었다.
경북지역에서도 몰표 현상이 완연했다. 143 표 중 정동영 9만6천표, 이명박 1백만표, 권영길 3만9천표, 이인제 3천8백표, 문국현 4만7천표, 이회창 후보는 19만5천표였다.
반면 전남 에서도 쏠림현상이 재현됐다. 97만표 중 정동영 75만표, 이명박 8만8천표,권영길 2만3천표, 이인제 2만3천표, 문국현 3만1천표, 이회창후보는 3만4천표였다.
구미시는 총 17만2천표 중 정동영 1만2천표, 이명박 11만4천표, 권영길 4천3백표, 이회창 3만표, 이인제 381표, 문국현 8천2백표였다.
이명박 후보의 구미 득표율 66%는 경북도 평균 득표울72%에 비해 크게 믿도는 수준이었다.<김경홍 기자>
구미의 오늘을 있게하신 박정희 대통렴님이시어 영면하소서
06/27 18:50 삭제
가는세월 그 누구가 막을수가 있나요.
구미를 발전시킬 인물이 필요한 때입니다.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할 때이지요
06/27 18:10 삭제
벌써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군요, 옛날의 일들을 떠올리게 하는 글입니다.
2012년 12월19일 캬
06/27 18:07 삭제
현대정치사가 한눈에 고생하셨어요
06/27 18:06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