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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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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박희광 선생 고향옛터 생가 복원과 추모관 및 겨레(애국)의 동산 조성 사업>이 시비를 확보하지 못해 좌초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한 박세진 의원이 임춘구 의장과 협의하에 내년 예산에 반영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예산확보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지난 달 30일 열린 의회 행정사무감사에서 주민생활지원과장은 구미에는 1급인 왕산 허위 선생과 박희광 선생등 3급으로 분류된 독립유공자 3명등 4명의 독립유공자가 있다고 밝히고, 우선순위 원칙에 따라 내년도에 예산을 편성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박의원은 그러나 시민의 대표기구가 의회이고, 의장이 의원들의 의견을 취합해 예산 편성을 요구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묵살한 것은 납득할수 없는 자세라고 비판했다.
국장은 그러나 박희광 선생의 경우 동상 재정비등 구미시로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서 재정여건과 우선 순위에 따라 년차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박의원은 “왕산에게는 혜택을 주면서 다른 유공자에게는 전혀 혜택을 주지 않고 있다”면서 시의원의 의견을 취합, 의장이 요구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라고 재차 언성을 높였다.
<사업추진은 어떻게>
.숭고한 정신의 뿌리를 출생지인 구미시 봉곡동에 심고, 가꾸기 위한 애절한 운동은 애국지사 박희광 선생 기념사업회(명예 회장 이수성, 사무처장/유족대표 박정용)를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다. 사업회가 추진하고 있는 <애국지사 박희광 선생 고향옛터 생가 복원과 추모관 및 겨레(애국)의 동산 조성 사업>은 생가를 고전적 한옥 황토집1동과 팔각정 1동으로 복원하고, 유물 전시실을 포함한 추모관 1동과 겨레(애국) 동산 등 조성 등이다.문제는 사업착수에 따라 예상되는 21억4천5백만원의 사업비이다.
사업회는 이를 위해 친지와 유족이 이미 확보한 4천5백만원에다 추가로 21억원을 조성하기 위해 국비 7억원, 시비 7억원, 도비 7억원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이에 앞서 밀양박씨 경주공파 종중은 2천58평방미터(622평/ 18억6천6백만원 상당)의 대지를 확보했다.
국가 보훈처의 관련 규정에 따르면 정부는 사업 주체인 기념사업회로부터 사업 계획서를 제출받아 ‘ 부지 확보, 지방비 확보방안, 향후 활용방안’을 검토한 후 국가 보훈처 현충시설 심의위원회에 상정, 최종적으로 국고지원 여부를 결정하도록 하고 있다. 이에따라 사업회는 생가 건립 부지 확보 및 자부담 확보, 2013년도 본예산에 시비 및 도비를 확보한 후 2013년 3월말까지 국가 보훈처에 사업계획서와 모금 계획서, 국고 예산 지원 요구서를 제출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 기념사업회는 지난 9월 24일, 구미시에 대해 관련 사업에 필요한 시비 7억원을 2013년 본예산에 상정해 달라는 내용의 청원을 제출했다. 이와함께 경상북도에 대해서도 도비 보조금 7억원을 2013년 본예산에 상정해 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했다.
국가 보훈처는 2013년 3월부터 5월까지의 기간 내에 국비 보조금 지원에 대한 타당성을 심의, 결정한 후 기획재정부를 거쳐 국회에 상정하게 된다. 결국 박희광 선생의 추모사업은 구미시가 시비 7억원을 2013년 본예산에 확보해 주느냐의 여부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게 될 전망이다.
이와 관련 사업회 측은 “ 구미출신 항일 독립 투사인 애국지사 박희광 선생의 얼이 구미에서 발현될수 있도록 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박희광 선생의 항일 독립 투쟁사
박희광 선생이 중국에서 18세의 나이에 항일 독립운동을 펼치다 검거돼 20년간의 옥고를 치루고 1943년 3월 23일 출옥했다. 그의 나이 43세였다,
1944년 귀향해 그해 4월 20일 결혼한 박 선생은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임시 정부 요원들이 귀국하자, 백범 김구를 만나 그 동안의 경과를 보고했다. 당시 김구는 비서를 시켜 위로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박 선생의 생활은 궁핍했다.옥중에서 익힌 양복 제봉 기술에 의지해 어렵게 살다가 5남매를 남겨둔 채 부인마저 세상을 떠나자, 풍상과 맞서 사는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받은 것은 광복 후 23년만인 1968년 3월1일이었다. 기쁨도 오래 가지 않았다. 박선생은 7년 후인 1970년 1월 22일 70세를 일기로 서울 보훈 병원에서 한많은 생을 마쳤고,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 부인 류씨와 함께 안장됐다.
그가 세상을 뜬 2년 후인 1972년 3월에는 공적을 기리는 동상(기념비) 건립 추진위원회가 발족됐다. 이어 1973년 3월 1일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친필휘호와 하사금을 받으면서 동상건립이 탄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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