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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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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새누리당 중앙위 의장 당선- ▶2012년 4월 19대 총선 당선 3선 국회의원- ▶2012년 7월 국회 행정안정위 위원장- ▶2012년 12월 박근혜 대통령 당선 파워 메이커-▶2013년 1월 새누리당 중앙위 의장 연임 -▶ 2013년 2월 5일 대한 태권도 협회 회장 당선”
2011년과 2013년, 내리 3년 동안 김태환 국회의원이 정치적 능선을 타고오른 족적은 선명하다. 이러한 족적의 힘은 불산 사고 발생 12일만에 특별재난 지역 선포와 함께 복구와 보상을 위한 절차에 착수해 피해 지원 및 복구비 지원 예산 554억원을 확정하는 힘을 발휘했다. 아울러 18대 대선 기간 중에는 전국 곳곳에서 확고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새누리당 중앙위 위원들을 규합해 박근혜 후보에게 상당한 힘을 실리게 했다. 여기에다 역대 대선 중 처음으로 도입한 재외국민 투표의 민심을 끌어안기 위해 현해탄을 건너간 김의원은 일본에서 일본통으로서 입지를 확인하면서 18대 대선 승리의 파워메이커 역할을 소화해 내기도 했다.
하지만 굽이굽이 능선을 오르고 내려 오늘의 족적이 있기까지는 걸어온 길이 마치 臥薪嘗膽와신상담의 순간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의원의 정치 역경이 험산준령을 오르내리는 곡예의 정치사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16대 총선이 실시된 2000년, 형 김윤환의원의 석패를 지켜보아야 했던 김태환 의원은 구미갑과 을구로 선거구가 분구된 2004년 17대 총선을 통해 중앙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탄핵열풍이 몰아치던 당시 선거에서 초반전에는 열린우리당 추병직 후보에게 밀렸으나 후반부로 가면서 탄력을 얻은 김의원은 3만2804표를 얻으면서 2만4314표를 얻은데 그친 추 후보를 여유있게 물리치면서 신승을 거뒀다.
당시 당 대표였던 박근혜 위원장의 선산장과 인동장 지원유세와 전문 경영 능력을 갖춘 기량이 힘을 발휘한 것이 계기가 됐다. 아울러 주민들 가슴 속에 다시 살아난 김윤환 의원에 대한 진한 그리움도 힘을 보탰다.
당시 선거에서 패배한 추병직 후보가 건설교통부 장관에 발탁되면서 김태환 의원은 초선이면서 3선의원으로 불리기도 했다. 적어도 재선 이상은 돼야 장관에 발탁되는 것이 정치계의 관행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의원의 재선가도는 굴곡 그 자체였다. 공천파동이 있던 2008년 18대 선거에서 김의원은 최대의 정치위기를 맞아야 했다. 한나라당 구미갑에 공천을 신청했던 이재순 전 구미폴리텍대 대학장이 한나라당 구미을 후보로 전략공천되면서 낙천한 김의원은 친박무소속 후보로 본선에 나서야 했다.게다가 공천권을 행사한 이정임 전 시의원 역시 도전장을 내밀던 때였다.
선거결과는 이변이었다. 3만3125표, 59.8%의 득표율을 보인 김의원은 1만6245, 29.3%의 득표율에 그친 이재순 후보를 여유있게 따돌리면서 재선 입성에 성공했다.
“살아서 돌아오라”는 당시 박근혜 전대표의 호소에 대해 “살아서 돌아가겠다”며 눈물의 능선을 넘어선 김의원의 고군분투는 한국 정치사의 한페이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굴곡의 정치사는 지속됐다. 2008년 10월 실시된 구미을구 도의원 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무소속 후보에게 패배한데 이어 2010년 실시된 6대 지방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가 같은 선거구 선거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의원은 이러한 굴욕을 딛고 19대 총선을 통해 당당히 당선됨으로써 지역구 3선의원이라는 명패를 들고 국회로 당당히 입성했다.
이처럼 태백준령과도 같은 험란한 정치사를 걸어와 힘 있는 정치인으로 자리를 잡은 김태환 국회의원에게 거는 지역의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남다르다. 그 힘은 지역발전과 국가발전, 지역화합의 밑거름으로 쓰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구미현대 정치사의 중심에 서 있다는 역사적인 책무를 늘 돌아보는 진중한 모습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