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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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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대 공단으로만 알려진 구미시가 경북 최초로 농산물 수출을 위한 선산 농산물 가공공장 즉 경북농산을 유치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역사적인 가공공장 준공식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치사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에따라 새마을 운동의 중심지이면서 자연보호 운동의 발상지인 구미는 국내 최대의 공단 지역이라는 역사적인 의미와 함께 경북 최초로 수출을 위한 농산물 가공공장을 운영했다는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됐다.
1968년부터 3년간 농어촌 공사 직영의 선산 농산물 가공공장이 운영 됐던 곳은 구미시 원평동 지금의 강남병원 자리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김교홍 예절원 원장은 당시 농산물 가공 공장인 경북 농산에서 임원으로 활동했다.
김원장에 따르면 농대 졸업 후 7-8명으로 협업 농장을 설립한 후 , 농어촌 공사가 추진하던 농어촌 개발 사업의 일환인 농산물 가공 공장(경북농산)에 공급할 양송이 재배동을 설립키로 결심했다. 이를 위해 김원장 등은 낙동강 호환 공사의 일환으로 발생한 3만여평의 금오천 옆 하천부지를 임대하고, 사업을 추진키로 했다.
하지만 자본금이 전혀 없던 김원장 등은 당시 박창규 선산 군수에게 사업 내용을 설명하고 담보없이 대구은행으로부터 자금을 차입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협조를 요청했다.이와함께 당시 이석진 원평성당 신부도 힘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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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홍 원장 |
이처럼 각계의 협조에 힘입어 1968년 11월 11일 양송이를 공급할 수 있는 24동의 재배동과 이를 가공할수 있는 농산물 가공 공장인 경북농산이 준공식을 갖게 된 것이다. 특히 경북최초의 농산물 가공 공장을 중공하는 역사적인 자리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치사를 하기도 했다.
이후 경북최초의 농산물 수출 공장인 경북농산은 대미수출등의 판로를 개척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노지에서 생산해 가공하는 동남아 국가의 제품과는 경쟁에서 밀릴 수 밖에 없었다. 24동의 재배동에서 양송이를 재배하기 위해서는 값비싼 연료비를 충당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경북농산은 수출보다는 내수를 통해 자립을 한다는 새로운 출구전략을 통해 기사회생의 각오를 다졌지만 적자 경영을 극복하지 못하고 준공 3년만에 문을 닫게 됐다.
하지만 치사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이 감동할 만큼 농산물 수출을 주 목적으로 하는 경북농산 운영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러한 의미 때문에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은 김교홍 원장등 관계자들의 등을 다독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1968년 경북농산이 준공되던 이듬해인 1969년에는 전자공업진흥법이 제정된데 이어 1970년 8월 24일 구미전자공업전문단지 조성이 본격화되면서 조그만 시골마을이었던 지금의 구미시는 선산군 구미읍으로 격상됐다.
이어 8년 후인 1977년 2월 15일 구미시의 전신인 경상북도 구미출장소는 구미읍과 칠곡군 인동면을 아우르며 급부상을 했고, 1년 후인 1978년 2월 15일 구미출장소가 구미시로 승격되는 역사적인 순간을 맞게 됐다.
▶박정희 대통령 선산 농산물 가공공장(경북농산) 준공식 치사 주요 내용
1968년 11월 11일 구미의 선산 농산물 가공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의 치사 는 선진농업으로 가는 방향을 제시하고 아울러 산림녹화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담겨 있다.
이날 치사에서 박대통령은 “근대 시설을 갖춘 농산물 가공 처리 공장의 규모는 비록 크지 않지만 정부와 농민들이 지금 힘을 기울이고 있는 농가 소득 증대, 또는 농공 병진 정책, 이러한 여러 가지 목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상징적인 가공 공장이라는 점에 있어서 대단히 의의를 느낀다”며 깊은 의미를 부여했다.
박대통령은 또 “부근에 있는 농가에서 재배하는 양송이를 가공하고 처리해서 통조림을 만들어 해외에 수출하는 사업을 시작했지마는, 앞으로는 이 지방에 양송이 외에 또 다른 여러 가지 알맞는 특용 작물과 기타 농산물을 여러분이 많이 연구하고 재배해서 이 공장에서 양송이 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종합적인 농산물을 가공 처리 할 수 있는 훌륭한 공장이 되고, 나아가서는 이 지방에 있는 모든 농가의 소득도 증대되고, 이 공장도 운영이 잘 되어서 명실 공히 농공 병진과 농가 소득 증대 사업에 크게 이바지해 줄 것을 당부해 마지않는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농촌이 기사회생할수 있는 방향도 제시했다.
“지금 우리 농촌에서 농업을 할려면 주로 쌀 농사. 보리 농사, 이것만을 여러분이 위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쌀 농사. 보리 농사는 우리 나라 식량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식량 작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앞으로도 많이 재배를 하고 또 같은 단위 면적에 있어서도 종래보다도 더 많은 수확을 얻을 수 있는 노력을 계속해야 됩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하고 풍년이 들어서 풍작이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 농민들이 모두 다 부자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예를 들어서 여러분 가운데 지금 논 몇 마지기를 농사짓고 있는 농가가 있다 할 것 같으면, 여러분의 가정에는 점차 식구가 늘어날 것입니다. 늘어날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자제가 점차 큼으로써 학교도 보내야 되고 학비를 대주고 모든 경비가 많이 지출될 것입니다. 또, 여러분의 자제가 커서 분가를 해서 살림을 따로 내게 되면, 여러분이 지금 열 마지기 가지고 있는 논을 절반쯤 나누어서 주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가정에 식구는 점점 늘고 돈은 점점 많이 써야 되고 또 자제들이 커서 분가를 하게 되면 농토는 더 줄어들고, 다각적으로 여러분의 농토는 현재와 같은 이러한 영농 방식 가지고는 날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가난해지는 결과밖에 오지 않는다 하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의 농가가 잘 살자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하면, 지금 하고 있는 쌀 농사.보리 농사 이것도 물론 잘 해야 되겠지만, 이것 외에 보다 더 수입이 높은 다른 영농 농작물. 특용 작물 또는 특산물 등 여러분이 노력을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서 준공을 본 양송이 가공 공장도 그러한 특용 작물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읍니다. 여기 논들을 볼 것 같으면 금년에 벼 농사가 끝나고 나면 지금부터 그 논은 앞으로 몇달 동안 아무 수입도 없이 놀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이 11월달이니까 내년 4월달쯤 가야 겨우 못자리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면 겨울 동안 일년 열두달 사이에 벼 농사 한번 지어 먹고 논을 6개월 동안 그냥 놀려 둔다는 이런 식의 농사 가지고는 우리는 절대로 부자가 될 수 없읍니다. 우리가 벼 농사. 보리 농사나 해먹고 하늘만 쳐다보고 금년 비가 잘 와서 풍년이 들었으면 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것 가지고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박대통령은 또 고등소채 재배에 대해서도 깊은 의미를 부여했다.
“겨울철에 나오는 ‘토마토’와 오이.상추.호박 등 고등 소채를 도회지에다 파는 것입니다. 벼 농사 하고 난 뒤에 가을에 고등 소채를 해서 논 한마지기 당 쌀 농사에 비해서 얼마나 더 많은 수익을 올리느냐 하면, 다각도로 재배한 사람은 쌀 농사의 29배를 올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한 마지기에 금년도 농사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알기에는 대략 평년작 정도로서 한 마지기에 벼 한 두섬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쌀로 해서 한 섬이지요. 한 섬이면 쌀로 두 가마인데 쌀 한 가마에 5천원이라고 해도 논 한 마지기에서 결국 만원밖에 안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료값 떼고 여러 가지 노임 떼고 이것 저것 다 빼면 실제 한마지기에서 나오는 순 이익이라는 것은 불과 얼마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쌀 농사를 한 뒤에 그 자리에 고등 소채인 ‘토마토’를 재배하니가 쌀 농사의 29배가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만원만 잡더라도 29만원이 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수박을 하니까 42배가 나온답니다. 아마 여러분이 들으면 깜짝 놀랄만한 얘기입니다. 오이 농사를 하니까 쌀 농사보다도 19배의 수익이 나오며, 가지를 하니까 12배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상 남도 김해군의 예입니다. 김해군에 가면 이런 농사를 하는 농가에는 벌써 ‘텔레비젼 안테나’가 지붕 위에 올라가 있고, 집도 초가집이 아니라 근사한 문화 주택에다가 현재 자가용 자동차를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해 제일 먼저 고등 소채를 시작한 박 재수라는 사람은 작년만 하더라도 1년에 약 200만원을 벌었읍니다. 물론 우리 나라 모든 논에 고등 소패를 다 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면 생산 과잉이 되어서 값이 떨어져서 여러분이 손해를 볼 것입니다. 물론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농사보다도 그 지방에 알맞고 더 수익성이 높은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는 것은 농민 여러분이 연구를 해야 됩니다. 우리는 살 농사, 보리 농사로서 하느님이 잘 봐 주어서 비가 잘와야 풍년이 든다, 정부가 잘 봐 주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 이런 생각을 하는 농민은 영원히 부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
박대통령은 특히 이날 당시 구미보통학교를 다니던 당시를 술회 하면서 국민 계몽 운동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나도 어릴 때 국민 학교를 다녔는데 그당시만 하더라도 우리 구미 내에서는 구미 보통 학교 하나 밖에 없었읍니다. 학생은 불과 4,5백명 되었을 거예요. 우리 동리만 하더라도 한 백여 호가 사는 농촌에서 보통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불과 대여섯 명밖에 없었어요. 그때는 보통 학교만 다녀도 상당히 지식 층에 속하는 그런 층이었을 것입니다. 그 외는 학생이 없었읍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구미 국민 학교에 아마 학생수가 그때보다도 몇 배는 늘었을 것입니다. 아마 1천 5,6백명 될거예요. 이 방청만 해도 국민 학교가 또 있지요, 그 외에 중학교가 있고 고등학교가 있읍니다. 그 외 객지에 나가서 대학이다,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을 겁니다.
그 당시는 구미 면내 전부를 통틀어서 중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아마 열사람 이내이었을 것입니다. 그것 뿐이 아닙니다. 많은 동리 청년들은 군대에 가서 훈련을 받고 좋은 기술을 배워서 돌아와 있는 청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국가가 많은 투자를 해서 교육을 담당하고 여러분이 농가에서 무리해 가면서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서 교육을 시킨 것은 그네들이 장차 우리 고장과 우리 국가를 개발하기 위한 인재를 양성하고 기술을 얻기 위해서 보낸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을 이제부터는 활용을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을이면 마을, 군이면 군, 여리 있는 공무원, 기타 학생. 농민 모든 사람들이 협력해서 어떻게 하면 우리의 고장을 보다 더 살기 좋은 고장으로 개발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여러분이 연구하면 좋은 구상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박대통령은 이날 구미발전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첫째는 우리가 이 구미에다가 어떤 사업을 해야 되겠다고 할 때는 그 사업이 기술적으로 될 수 있는가를 잘 연구하고 검토해야 됩니다. 만약에 그 기술 연구 중에 여러분의 힘을 가지
자연보호운동의 발상지라는 얘끼좀 그만 할수없나? 되도안한 말
03/13 11:48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