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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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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하된 종주국의 경기력을 회복하고, 조직적인 태권도장 경쟁력 강화에 힘쓰겠다”
3월 19일 올림픽공원 K-아트홀 태권도 공연장에서 열린 제 26대 대한 태권도 협회장 취임식에서 신임 김태환 회장(새누리당, 구미을 3선의원)은 취임 일성을 이렇게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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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인터넷 뉴스 제공 |
홍준표 경남 도지사의 바톤을 이어받은 김태환 국회의원이 제26대 회장에 취임하는 식장에는 국회의원과 협회 임원을 포함한 300여명의 저명인사들이 자리를 메꿨다. 대한 태권도 협회의 위상을 한눈에 읽을 수 있는 모습이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태권도를 경험하지 않은 국민이 없을 만큼 전 국민으로부터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는 태권도는 특히 올림픽 정식 메달종목으로 채택된 이후 세계인들로부터도 열렬한 사랑을 받아왔다.
태권도의 위상이 높아지는 만큼 대한 태권도협회의 존재가치와 협회를 진두지휘하는 회장의 위상 또한 타 협회 회장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태권도의 종주국인 대한민국의 태권도 협회장을 맡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진가는 높이 평가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취임식이 있은 3월 19일, 식장에 눈길을 끄는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운용 대한 태권도 협회 명예회장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적극적인 관심이 없었으면 오늘의 태권도가 없었고, 김운용 회장의 살신성신의 태권도에 대한 사랑이 없었더라면 태권도의 융성기는 기대할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박대통령과 김회장이 태권도 역사에 남긴 업적은 대단한 것이었다.
흔히 태권도장에서 볼 수 있는 <국기태권도>는 1971년 3월 20일 구미출신 박정희 대통령이 남긴 친필휘호이고, 그로부터 43년 후인 2013년 구미의 딸 박근혜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구미출신의 김태환 국회의원이 제26대 대한태권도 협회장에 취임했으니, 구미로서는 영광스러운 해가 아닐 수 없다.
이 때문에 세상은 오늘의 태권도를 있게 한 박정희 대통령과 구미출신 김태환 국회의원의 대한 태권도 협회 회장 취임에 주목하고, 구미시가 진정한 태권도의 종주도시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의미부여가 터무니 없는 것이 아니어서 감회가 남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시대를 거슬러 오를 때마다 박정희 대통령의 형인 박상희 선생과 김태환 의원의 부친인 매암 김동석 선생, 박정희 대통령과 김윤환 의원, 박근혜 대통령과 김태환의원 간의 얽힌 인연이 관심을 끈다. 양 가문의 인연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역사적인 대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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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이 쓴 친필휘호 |
▶태권도 종주도시 구미, 박정희 대통령이 남긴 발자국
김운용 명예회장은 2010년, 시리즈 <김운용의 만난 거인들>을 일요신문에 연재했다. 김회장은 그해 6월4일 스물두번째 연재물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과 태권도의 인연을 소상히 써 내리고 있다.
김 회장에 따르면 1972년 태권도 중앙도장인 국기원을 건립했으나, 태권도의 국기화, 세계화의 길을 가고 있는데 다른 종목 특히 씨름과 축구계에서 "깡패놀이가 무슨 국기냐" 하는 말이 나왔다.
그래서 김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해 '국기태권도'라는 친필 휘호를 받아 2000장의 복사본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했다. 이를 계기로 타 종목의 국기 논란을 잠재웠을 뿐 아니라 혼란했던 태권도계에도 활력을 넣는 계기가 됐다. 그때만 해도 국내 태권도는 30개관으로 갈라져 있었고 해외 태권도도 전부 일본의 '가라테' 간판을 내걸고 운영되고 있었다.
당시 정부의 재정 지원은 없었다. 그 후 김회장은 스포츠로서의 조직적 체계를 갖추고 분석적 방법으로 태권도의 기초를 세우게 됐다. 역사를 찾고, 만들기도 하고 스포츠로서의 경기규칙과 헤드기어를 쓴 호구도 개발했다.
국고보조라고는 1000만 원 한 번, 2000만 원 한 번을 받아냈을 뿐이고 이렇다 할 스폰서도 없을 때다. 태권도인 전체의 소원이던 중앙도장을 맨주먹으로 건립하고 나서 사재 200만 원을 들여 재단법인 국기원을 등록하여 종주국 태권도의 세계총본산으로, 그리고 무도의 전통을 지키는 본부로서 제일 중요한 승단심사와 사범의 교육을 책임지게 했다. 정말이지 다들 많은 고생을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적극적인 후원이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석유파동 등 심각한 경제위기 속에서도 국기원은 예정대로 세워졌다. 서울 강남에 칠성사이다 공장과 산 위의 국기원밖에 보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박 대통령이 지방순시에서 돌아오는데 고속도로에서 보니 새빨간 산 위에 국기원 건물만 덩그러니 있는 것을 보았다. 마침 전국에 대대적으로 녹화사업을 추진할 때였다. "산이 새빨갛다. 나무를 심으라"고 하는 박 대통령의 말이 떨어지자 5000그루가 심어졌고, 양택식 서울시장이 청양에서 국기원 건물 높이의 은행나무 두 그루도 갖다 심었다.
그 은행나무는 지금도 건재하다. 그래서 현재도 국기원은 규모는 작지만 '푸른 국기원'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다. 이때는 역삼동 국기원 주변에는 전기, 수도가 없어 국기원 개원 전날 특별히 전기를 끌어오고, 청와대의 이동전화를 빌려 설치하고, 우물물을 펌프로 끌어올리는 등 모든 것을 새로 마련해야만 했다.
73년 청와대 예방 때는 머리가 긴 것은 안 된다고 해서 '머리 짧게 깎기 운동'이 있을 때였다. 왜 그 유명한 장발단속의 시기였다. 그런데 마침 태권도 임원 중에 머리가 긴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박 대통령은 "머리 좀 깎아서 데리고 다녀"라고 하면서 다리를 올려 나를 태권도 발차기를 하는 듯한 제스처를 쓰기도 했다. 이렇게 장난까지 칠 정도로 박정희 대통령의 태권도에 애정이 많았다.
▶역사적인 인연
박정희 가문과 김윤환-김태환의원을 낳은 매암 김동석 의원 가문과의 역사적인 인연은 깊다.
1903년생인 매암은 일제 시절인 1927년 6월 4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3년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어 1934년에는 조선민보사 장천지국을 맡는 등 언론계에 몸을 담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따르던 형인 박상희 선생은 1903년 생으로 매암과 동시대에 태어났다. 구미 최초의 언론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박 선생은 일제 시절인 1931년 신간회가 해체되자, 중외일보 기자, 조선중앙일보 대구지국장 겸 기자, 동아일보 선산지국장등을 통해 언론계에 투신했다.
이처럼 김윤환- 김태환 의원의 부친인 매암과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따르던 형인 박상희 선생은 동시대를 살면서 일제에 저항하다 탄압을 받았고, 또 언론을 통해 민족의 목소리를 표출했던 것이다.
이후 박정희 가문과 매암 가문은 유신말기인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3년 임기의 유정회 국회의원 (제10대 국회)으로 김윤환 의원을 영입하면서 박상희 선생과 매암의 인연을 이어나갔다.
김윤환 의원과 박근혜 대통령의 인연은 1998년 4월, 당시 김석원 쌍용 회장이 지역구인 대구 달성의 국회의원 직을 내놓은 직후 보궐선거가 치러지면서였다. 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에 성공한 국민회의(현 민주통합당)는 안기부 기조실장 출신인 엄삼탁을 후보로 내세웠다.
박근혜 대통령을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 달성 보궐 선거에 출정시킬 당시 김윤환 의원은 한나라당 부총재였다. 한나라당을 좌지우지 하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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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환 의원 |
하지만, 이후 박근혜 대통령과 김윤환 의원은 이회창 전 총재로부터 정치사의 아픈 역사를 써 나가야 만 했다. 2000년 실시된 제 16대 총선을 앞두고, 자신이 영입한 이회창 전 총재가 이끌던 한나라당 공천에서 낙천한 김윤환 의원은 분루를 삼키며, 이기택, 김광일, 조순, 이수성, 박찬종 등 한나라당 낙천자들과 함께 민주국민당을 창당해 경북 구미에서 출마했다, 그러나 결과는 패배였다. 김의원은 안타깝게도 낙선 후인 2003년 12월 15일 창암이라고도 불리던 신장암으로 세상을 떠야 했다. 정치적으로는 젊은 71세의 나이였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당시 이회창 전 총재와 각을 세웠다, 1998년 대구 달성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치계에 입문한 박근혜 대통령은 2002년 2월 27일 확정된 대선후보 경선방식 및 당 지도체제 변경 관련 ‘당헌개정안’에서 총재직 폐지와 대선후보와 총재 분리 등이 제외되자, 탈당이라는 강수를 두기도 했다.
김윤환의원의 낙천과 별세, 박근혜 대통령의 한나라당 탈당과 복당등의 정치적인 과도기를 넘긴 두 가문이 다시 재회한 것은 2004년 실시된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 김윤환 의원의 동생인 김태환 의원이 한나라당 후보로 지명되면서 였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한나라당 대표 최고위원으로 17대 총선을 진두지휘 하고 있었다.
이후 김태환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과의 밀접한 교류를 통해 두가문의 쌓아온 역사적인 인연을 이어나갔다. 정치계에 등원하자마자 한나라당 수석 사무부총장을 맡았던 김 의원은 그러나 2008년 실시된 제 18대 총선에서는 친이계의 친박계 낙천바람에 휘말려 낙천 후 친박 무속으로 출마해 당선되기도 했다. “살아서 돌아오라”는 당시 박근혜 의원의 호소는 정치판을 흔들었고, 김태환 의원은 “살아서 돌아가겠습니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이후 어렵게 한나라당에 복당한 김태환 의원은 한나라당 중앙의장에 당선된데 이어 박근혜 대통령이 진두지휘한 제19대 총선에서는 한나라당 후보로 공천을 받고 3선 의원으로 당선되는 영예를 안았고, 국회 안전행정위원장의 자리에 앉는 또 하나의 정치사적인 기록을 썼다.
특히 이어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태환 의원은 한일의원 연맹 회장(대리), 중앙위의장, 안전행정위원장의 중책을 내걸고 박근혜 후보를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기도 했다.
결국 현대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김태환 국회의원이 3월 19일,박정희 대통령이 태권도를 세계사적으로 발전시킨 대한 태권도 협회 회장에 취임한 것이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이 임기가 시작되는 초두에 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그 의미를 더해주고 있는 것이다.
삶의 길에는 누구에게나 희노애락이 있기 마련이다. 2003년 12월 형, 김윤환 의원을 떠나보낸 비운을 안고 김태환 의원은 험산 준령을 타 넘어 구미는 물론 중앙의 중심 정치인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만큼 김의원의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다.
박정희 대통령의 숨길이 담긴 태권도의 저하된 종주국의 경기력을 회복하는 일도, 40년 노후 구미산단을 재창조하고 동시에 4공단 확장단지- 경제자유구역- 제5공단을 조기에 조성, 분양하고 이를 통해 제2의 구미 부흥기를 맡도록 해야 한다는 시대적인 의무와 과제의 중심에도 김태환 국회의원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