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경북문화신문 |
|
1953년 11월 미군통신기지가 들어서면서 출입 통제 구역으로 묶였다가 최근들어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금오산 정상 옛 미군기지 내에 문화적 가치가 매우 높은 황기로 선생의 걸작품이 묻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구미출신으로 우리나라 3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인 황기로 선생이 금오산 정상의 큰 바위에 초서체로 음각한 후망대 (候望臺)가 미군기지 건설 과정에서 파묻혔고, 현재 큰크리트에 덮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적으로 보물적 가치가 있는 후망대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큰크리트 해체 등 옛 미군기지터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원형이 훼손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가 뒤따라야 한다고, 뜻있는 시민들이 입을 모으고 있다.
 |
금오산 중턱 바위에 황기로 선생이 음각한 금오동학, 관리가 허술해 글씨가 지워지고 있다 |
정상 이외에도 금오산 케이블카 기점으로부터 금오산 방향 500미터 부근에는 거대한 바위에 황기로 선생이 음각한 금오동학 金烏洞壑 ( 金(103㎝×72㎝) 烏(107×69) 洞(90×52) 壑(95×50)이 있다. 금오산의 깊고 그윽한 절경을 뜻하는 소중한 보물인 금오동학은 보물적인 가치가 있으나 안내판만 있을 뿐 이를 보존하거나 세상에 알리려는 노력이 뒤따라 주지 않아 눈여겨 보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글씨체가 상당부문 훼손된 상태여서 안타까움을 더해 주고 있다. 따라서 고귀한 유물을 보존할 수 있는 과학적인 보호시설을 서둘러 설치하고, 아울러 시야를 장애하는 나무를 잘라내는 등의 대책이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조선 중종 16년 (1521년) 지금의 고아읍 대망리 속칭 망장에서 태어난 고산 황기로 선생(1521년- 1567년)은 유구한 우리나라의 역사를 통해 성인 칭호를 받는 3인 중의 한 사람이다. 문인으로 신라시대 김생은 서성 書聖, 조선시대 황기로는 초성 草聖, 무인으로 이순신 장군이 성웅聖雄 칭호를 받았다. 그만큼 황기로 선생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인물 중의 한사람인 것이다.
특히 황기로 선생은 사신단으로 중국을 방문 했을 때 황제 앞에 글씨를 써 넣었고, 이를 본 황제는 황기로 선생을 해동초성 海東草聖이라고 칭했다. 왕휘지 이후 일인자라는 의미였다. 이 때문에 중국사신단이 우리나라를 방문하면 황기로 선생의 글씨를 받아가는 것을 최고의 선물로 여겼고, 금오산 정상에 올라 후망대를 바라보면서 감탄을 했다고 한다. 그 만큼 황기로 선생은 중국에서도 성인의 예를 받던 인물이었다.
고아읍에 있는 접성산의 유래 역시 황기로 선생이 서재로 사용하던 매학정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성인이 태어나고 도를 닦는 매학정과 접해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접할 접 接자에 성인 성 聖자를 써서 접성산 接聖山이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후망대候望臺에 얽힌 역사
구미문화원이 발간한 구미인물지에는 “금오산 최정상에 후망대候望臺라고 음각되어 있는 글자가 있으니, 이것도 고산 황기로 선생의 걸작 중의 하나”라고 소개하고 있다.
독립 큐레이터 이택용 선생이 소개한 금오산 기행문에는 후망대에 얽힌 역사가 자세히 소개돼 있다. 금오산 기행문은260년 전 칠곡 벽진이씨 청백리인 인동현감 이등림(李鄧林), 선산부사 이언영(李彦英)의 후손인 조선후기 여행가 명암(冥菴)선생의 쓴 책이다.
관련 기행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후망대(候望臺)를 가서 보니 그 높이를 헤아려보니 3리나 5리는 되어 보이고 올라가기 어려움에 겁이 나고 다리를 쉬고 싶었다. 또 되갚을 생각을 하면서 하루를 머물렀다. (중략)아름다운 곳에 위치한 정자와 누각을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았고 후망대(候望臺)에 올라 하나하나 도맡아 관장하고 싶었다. 이 때문에 잠깐 널리 보니 남쪽으로 시야를 돌리니 약사전(藥師殿)이 있었는데 높은 바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바위와 후망대(候望臺)는 서로 마주하고 있었고 두개의 틈사이의 공간은 겨우 한 사람이 지날 정도였다. 다리를 매고 10여 개의 계단을 올라 아래를 보니 작고 보잘것없어 이름이 없는 한 개의 돌 부쳐가 모셔져있었는데 유독 영험하다고 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이 다투어 왔다
(중략)나는 먼저 이 바위를 보고 뒤에 후망대(候望臺)에 오르고 싶었다. 정(鄭)과 육(陸) 두 서생은 앞서 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오르내리면서 곧바로 성(城)의 오래된 곳을 벗어나려고 하였다. 곧바로 두 서생은 따라 보봉(普峯)의 옆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왔다.
나는 돌아서 바위를 따라 아래로 내려와 후망대(候望臺)를 보려고 하였다. 물이 있었는데 바위틈에서 졸졸 흘러 내려와 표주박을 가지고 물을 마시니 달고 이가 시렸다.
이어 수십 개의 계단을 올라 대(臺)에 오르고 난 뒤에 아래를 굽어보니 앞에는 두 개의 바위가 또한 수 백 길이나 되니 대개 성(城)이 산에서 가장 높은 곳인 듯 하였고, 대(臺) 또한 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듯하였다. 그 때문에 밖에서 일어나는 변을 살피기에 반드시 이 대(臺)에서 한 것이니 대(臺)의 이름이 후망대(候望臺)라고 한 것이 이 때문일 것이다.
(중략) 대(臺)의 위에는 평평하고 방정하고 넓어 수 묘(畝)는 됨직한 반석이 누워있어 걷거나 눕기에 편리하였다. 그러나 매우 높아 차가와 봄이 다가고 여름이 되어야 나무 잎들이 비로소 싹을 틔우고 가지들은 모두 짧았다.
(중략).봉우리에 의지한 작은 암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무너져 중이 없고 하늘빛 또한 약사암(藥師庵)과 후망대(候望臺)와 같았다. “
“10여 개의 계단을 올라 아래를 보니 작고 보잘것없어 이름이 없는 한 개의 돌 부쳐가 모셔져있었는데 유독 영험하다고 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이 다투어 왔다”는 내용은 고려시대 만들어진 보물 제 90호인 금오산 마애여래입상 ( 龜尾 金烏山 磨崖如來立像 )을 지칭하는 것이다. 보물로 지정됐지만 관리상태가 허술해 체계적인 대책이 필요한 실정이다.
또 다른 고서에는 후망대라고 유래된 역사적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조선조 선조때 이 고장이 배출한 명필 고산 황기로의 글씨로 “후망대”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구전이 있으나 문헌이 기록된바 없고 또 미군영내에 위치하여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어 확인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하여튼 후망대란 높은데 올라서서 저 멀리 조망하는 곳이니 고려말 국력이 쇠잔하던 틈을 타서 왜구의 해적선이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면서 강 양안의 마을을 덮쳐 분탕하고 노략질이 극심하여 그때마다 남부여대하여 금오산에 들어와 성을 쌓고 난을 피하면서 고대로 현월봉에 올라서서 멀리 왜구들의 동태를 살피고 망을 보다 왜구들이 떠나가면 다시 마을로 내려와 불탄 집을 손질하고 농사를 짓는 등 생업을 영위했으리라. 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는 군사들이 왜군들의 동태를 살피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지방 기념물 제67호로 지정된 금오산성의 축조 배경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정상부와 계곡을 이중으로 두른 석축산성인 금오산성의 내성은 험한 절벽을 이용해 둘레 2.7km, 높이 2m로 쌓았고, 외성은 계곡을 감싸며 둘레 3.5km, 높이 2.4m로 쌓았으며 처음 축성시기는 고려말로 추정되고 있다.이 곳은 조선 태종 10년(1410년)에 국가적 계획으로 크게 고치고 임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훼손된 부분을 다시 쌓았으며 고종 5년(1868년)에도 다시 고쳐 쌓았다고 고서는 전하고 있다. 산성 안에는 폭포가 있는 계곡, 연못, 우물 등과 내성창, 대혜창 등의 창고와 진남사가 있었다고 하지만 기록으로 밖에 남아있지 않아 안타까움을 더해 주고 있다.
또 성안에 남아 있는 중수송공비는 고종 때 대원군의 지시로 세운 것이며 산성과 관아를 중수한 후 세운 기념비로 백성의 생업 종사 및 태평성대를 구가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고귀한 문화 유산을 복원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이처럼 금오산 최정상에 묻혀 있는 후망대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군사들이 왜군들의 동태를 살피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고, 황기로 선생은 애틋한 심정으로 400여년 전 금오산 정상에 올라 후망대에 <후망대候望臺>를 음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라와 민족, 고향 구미를 근심하면서 쓴 후망대는 분단의 역사가 낳은 미군기지 건설과정에서 큰크리트에 묻히고 만 것이다. 결국 나라와 민족, 고향을 근심하면서 쓴 황기로 선생의 넋이 분단이라는 슬픈 역사 속에 파묻힌 채 울부짖고 있는 것이다.
21세기는 문화가 주도하는 시대이다. 세계 각국은 없는 것도 만들면서 문화관광 부국을 향해 가고 있다.미군기지 건설 과정에서 큰크리트에 파묻힌 후망대, 금오산 정상의 미군기지는 최근 구미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제 해야 할 일은 콘크리트에 파묻힌 후망대를 서둘러 복원하고, 아픈 역사를 끌어안고 신음하고 있는 고산 황기로 선생의 얼과 넋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길이다. 이러한 노력이 구미가 문화 관광의 부촌으로 가는 길이며, 물질문명의 세파에 밀려 신음하는 우리 고유의 문화를 일으켜 세우는 길이다.<김경홍 기자>
< 저작권자 경북문화신문/ 경북타임즈. 무단전재-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