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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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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민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추도식과 탄신제 때마다 일부에서 제기하고 있는 신격화 논란에 대해 이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
도내 22개 시군은 물론 호남과 충청을 비롯한 팔도민이 봇짐을 싸들고 흘러든 구미는 10% 내외의 토착민과 90%에 가까운 외지인이 한데 어우러진 공동체다. 을씨년스러운 황무지에 둥지를 튼 그들은 샛별을 등짐 져 공단으로 향했고, 달빛을 벗삼아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살아온 40여년의 세월이었다.
그렇게 걸어 온 삶이었으니, 이들에게 각인된 구미시 상모동 출신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인식은 변별적인 특성을 갖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버지 대통령 각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4년이 됐다. 아버지의 딸이 이 나라 대통령이 됐다. ”(심학봉 국회의원 2003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추도사)
“박대통령이 구국의 결단을 나설 때 구미초등학교 교사여서 잘 몰랐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돌아보니 대단한 어르신이라는 생각이 든다,”(김관용 지사 2013년 10월 26일 추도식 인사말)
“님이 구미 땅에서 태어난 것만으로도 무한한 영광이다” ( 남유진 시장 2013년 10월 26일 추도사)
“박정희 대통령은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 하늘이 내렸다란 말 밖에 드릴 말씀이 없다.성공한 오늘 날의 한국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보릿고개를 넘어 경제발전의 기적을 이루셨다.”(남유진 시장 2013년 11월 14일 탄신제)
“앞으로는 추도보다 탄신제에 비중을 두고 거리에 등도 달면서 축제로 승화시켜 나가야 한다. ”(김관용 도지사 2013년 11월 14일 탄신제)
지난 10월 26일의 박정희 대통령 추도식과 11월 14일 탄신제에 참석한 인사들의 발언을 둘러싸고 일부 언론과 진보 성향의 논객들이 ‘ 박정희 대통령 신격화’를 논쟁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상황 속에서 구미시민들 대부분은 주요 인사들의 발언에 침묵했다. 이심전심이었기 때문이었다.
왜 그랬을까.
1967년 5월 3일 실시된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선산군(지금의 구미시)은 총 4만9천명의 투표자 중 박정희 대통령에게 3만9천표를 몰아주었다. 이는 80%대에 근접한 79%의 득표율이었다. 반면 차점자인 윤보선은 4천6백표로 9%의 득표율을 얻는데 그쳤다.
구미 1공단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토착민이 절대적인 다수를 차지하던 당시 선산군민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동향인이었다.
그러나 외지인이 구미로 몰려들기 시작한 1971년 4월 27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선산군(지금의 구미시)은 오히려 박정희 대통령에게 87.4%를 몰아주었고, 상대적으로 압도적인 지지세에 밀려 김대중 대통령에게 돌아간 표는 8.2%에 그쳤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2012년 12월 실시된 제17대 대선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의 득표율 80.34%였다.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얻은 득표율 66.87% 보다 13%를 뛰어넘는 결과였다. 역대 총선, 대선, 지방선거에서 구미의 여권 득표율이 70% 전후였다는 점에 주목했을 때 기적에 가까운 득표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군다나 박정희 대통령이 87.4%를 획득하던 1971년은 절대다수의 구미 토착민 공동체가 붕괴되던 시절이었다. 충청과 호남을 비롯한 전국 팔도에서 흘러들어와 근로자로 변신하던 그 시절, 왜 그들은 절대다수가 토착민이었던 1967년 5월 3일 실시된 제6대 대통령 선거 당시의 득표율인 79% 보다 8% 이상을 상회하는 압도적인 지지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것일까.
▶전국 팔도에서 유입한 구미시민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1962년 1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를 시작으로 경제부흥에 나선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부터 1971년까지 수출에 역점을 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 추진했다.이를 계기로 1971년 11월 3일, 비산동 일대를 중심으로 제1공구 조성사업을 시작한 구미공단 조성은 1973년 11월 20일 완료됐다.
이 당시는 춘궁기(春窮期) 였다. 기아에 허덕이면서 보리고개를 뛰어넘지 못한 숱한 삶들이 안타깝게 생을 마쳐야 했던 시절이었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추수 때 걷은 농작물 중 소작료·빚·이자·세금 등 비용을 떼고 남은 식량으로 초여름 보리수확 때까지 견뎌야 했다.
극도의 빈곤 시절이었다. 식량이 바닥나면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끼니를 때우는 초근목피, 걸식과 빚으로 연명해야 했다, 유랑민이 되어 떠돌아다니기는 것도 예사였다.
이 무렵 황량한 바람이 서슬퍼렇던 구미 낙동강변에 코오롱, 제일모직, 한국합섬, 태광산업(주) 구미면방공장 등 섬유업체, LS전선, LG필립스디스플레이, LG필립스LCD, 합동전자, 한국전기초자(주) 제3공장, 오성전자, 오리온PDP, 오리온오엘이디, 대우일렉(주) 구미사업장 등 전자 업체와 기타 업체로 계림요업 등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보리고개의 비극을 극복하기 위한 당시 구미지역 주민들의 결단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신부동, 장동, 매호동, 낙계동, 신기동, 파계동 주민들은 조상대대로 되물려 온 문전옥답을 구미공단 부지로 선뜻 내놓으면서 지금의 신평2동을 비롯한 다른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망향의 서러움도 삭혀야 했다.
이 무렵, 보리고개의 황량한 산비알에 가족들의 안타까운 생을 묻어야 했던 전국 팔도의 젊은 청춘들은 봇짐하나를 달랑 둘러매고 구미로 흘러들었다. 구미공단을 일으켜 세워 보리고개의 아픔을 극복하려는 옹골찬 결의는 대단했다. 구미1공단으로 인구가 몰려들면서 1960년 마의 능선인 20만명을 넘어서면서 30만을 향해 가던 김천시의 인구는 1970년대 들어서면서 10만대로 내려앉았고, 1965년 26만 5천명으로 도내 최대 인구를 자랑하며 34만명대를 향해가던 상주시 인구 역시 10만 명대로 시대로 후퇴했다.
최대 10만에서 7-8만명에 이르는 김천, 상주 인구의 구미 유입이 낳은 결과였다. 여기에다 구미로 이주해 온 각각 수만명의 호남과 충청인들 역시 가장 거대한 향우회를 결성할 정도였다.
이들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성공사의 숨은 주인공들이었다. 1962년 1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당시 국민 1인당 GNP 1만3천원,주요수출 품목이 철광석, 오징어, 활선어 등일 만큼 아프리카 케냐, 가나의 빈곤과 동일 상황이던 한국은 67년부터 71년까지 수출에 역점을 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성공적으로 추진되면서 섬유와 선박이 주요 핵심 부품으로 부상했다. 철광석이 차지하던 수출 1위 품목 역시 전체 수출액의 40%를 차지하는 섬유로 뒤 바뀌었다.
특히 구미 1공단 전자단지에서 둥지를 틀고 날아간 전자산업은 현대화 산업을 주도하면서 수출 주요 품목에 진입했고, 낙동강의 신화를 써 내리면서 오늘의 경제 강국, 한국을 견인했다.
이처럼 봇짐 하나를 달랑 둘러매고 구미 공단으로 몰려든 십만여명의 근로자들의 피와 눈물의 노력 끝에 제7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마무리되던 1996년에는 1차 경제개발 계획이 출발하던 1962년의 1인당 GNP 1만3천원에 비해 1천배에 가까운 1007만원, 수출액 역시 180억원에서 7천 801배인 127조 4623억원을 마크했다. 세계가 놀란 한강의 기적이면서 낙동강의 신화였다.
이러한 저력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져 2013년 구미공단은 수출 360억달러를 상회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고, 특히 우리나라 전체 무역수지 흑자의 60% 이상을 견인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빵과 자유,그러나 빵을 선택해야 했던 가난한 시절
1953년 스탈린이 죽으면서 러시아에는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 당시 해빙문학의 작가들은 빵보다는 자유를 달라는 주제의 작품을 쏟아냈고, 이러한 문풍(文風)이 전세계를 주도해 나갔다. 한국도 영향권 밖은 아니었다. 시인 김지하는 “자유가 아니면 빵을 달라”고 외쳤다.
이 와중에 보리고개를 올라야 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선택은 빵이었다.
이후 이러한 명제는 세월과 함께 무던히도 많은 변화를 거치면서 또 다른 명제를 낳고 있다. 지난 해부터 중등을 휩쓸고 있는 민주화 바람의 근본원인은 “빵과 자유를 달라”는 구호로 요약된다.
역사적 실체는 현재의 상황과 인식에 따라 평가를 달리하는 법이다. 특히 상황적 인식이 갖는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김관용 지사 (“시간이 흐른 지금 박정희 대통령의 구국 결단은 대단한 것이었다.), 남유진 시장 (” “박정희 대통령은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 하늘이 내렸다란 말밖에 드릴 말씀이 없다.”), 심학봉 국회의원 ( “아버지 대통령 각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4년이 됐다. 아버지의 딸이 이나라 대통령이 됐다.”)은 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일부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문장을 첨부했을까.
보리고개 앞에서 주린 배를 움켜줘야 만 했던 당시, 고아읍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김관용 지사는 가난 때문에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초교 교편을 잡아야 했고, 주경 야독 끝에 행정고시에 합격, 행정가의 길을 걸어왔다.
옥성면에서 태어난 남유진 시장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선산군 간부 공무원을 지낸 아버지밑에서 유년과 청소년기를 보냈다.박정희 대통령이 보리고개의 가난을 몰아내기 위해 구미 1공단을 필두로 경제 부흥을 위해 팔을 걷어부치던 밤낮이 없던 시절이었다.
포항에서 태어난 심학봉 의원은 유년 시절,부모가 어린 삼남매를 세상에 남겨두고 세상을 하직하자, 유년의 삶을 나이 든 조모에게 의탁해야 했다. 하지만 품삯으로 끼니를 이어주던 할머니 조차 세상을 뜨자, 심의원의 삶은 더욱 더 고되고 힘든 생존의 벼랑으로 몰려야 했다.이후 심의원을 뒷바라지한 것은 학업을 포기한 누이동생과 형이었다.
고달픈 유년의 삶 속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은 심의원은 고입시험에서 200점 만점에 199점을 얻으면서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켰으나 수업료 면제 혜택만으로는 포항지역 인문고를 다닐 형편이 못됐다.
그래서 찾은 곳이 박정희 대통령이 설립한 구미전자고등학교 였다. 숙식은 물론 학비까지 면제해 준 구미전자고등학교 입학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추도식과 탄신제 때마다 신격화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이들 세명의 인사,하지만 구미시민 대부분은 이들 인사의 발언을 부정하지 않는다.
보리고개의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봇짐을 싸들고 구미공단으로 흘러들어와 둥지를 튼 외지인 일색의 구미시민들, 자신들이 밟은 보리고개의 가난과 질곡의 세월을 함께 한 역사를 걸어나와 낙동강 신화의 주인공인 박대통령에게 깊이 고개를 숙인 세명의 인사와 함께 그들 역시 고개를 숙인다.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한 이심전심의 공동체가 바로 구미이기 때문이다.
독일 국민들의 투표로 당선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일의 아우토반을 건설하고 공업화를 이루어 0%에 가까운 독일 역사상 최저의 실업률을 달성 시킨 히틀러....하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자국민과 서구의 그 누구도 그를 구국의영웅이라 말하지 않죠.. 작금의 시대.. 다만 그런 국민의식이 부러울 따름...
11/21 14:27 삭제
딱 구미 신문수준을 못 벗어나는군요..
시대에 갇혀서 꽉막힌채로 살아가라고 언론이 잘 포장해주네요
11/21 13:48 삭제
말하지않는다고 같은 맘이라는 것은 ........글쎄올시다
정치인(꾼)들이 입에 침이마르도록 하는 모습이 구미시밍의 마음과 같다고 보는 것은 신문의 기능에 대한 모독(?)아닌지.....
11/20 17:02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