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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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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시무실, 지금의 형곡동>
조형물 당선작이 표절시비에 휘말리면서 6.25 전쟁 당시 미군 폭격기에 의해 피해를 입은 구미시 형곡동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건립 사업이 해를 넘기게 됐다. 위령탑 건립 추진위원회 (위원장 손홍섭 구미시의회 부의장/이하 추진위)는 당초 7월까지 공사를 마무리 지은 직 후 민간인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한 추모제를 열기로 했었다.
하지만 위령탑 건립장소와 위령탑에 씌여질 문구, 구미시 관내 타지역 희생자 포함 여부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추진위는 20여명으로 심사위원회를 구성한 가운데 조형물 공고를 통해 접수된 작품 중에서 당선작을 선정했다. 그러나 탈락한 2위 작품의 작가가 표절의혹을 제기하면서 당선작 가처분 신청을 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재판 절차를 남겨두게 됐다.
이처럼 당선작이 소송에 휘말리면서 위령탑 건립은 해를 넘기게 됐고, 2013년 당초 예산에서 확보한 1억원의 사업비 역시 이월 될 처지에 놓이게 됐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구미지역에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건립이 가시권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추진 과정에서 일부 인사들이 “위령탑 건립이 자칫 미국과의 선린 우호적 감정을 헤칠 수 도 있다”며 조심스러운 접근을 요구하는 등의 장애요인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미군 폭격기의 오폭에 의한 시무실 (지금의 형곡동) 의 비극을 최초 보도한 경북문화신문은 지속적으로 위령탑 건립을 촉구했고, 2012년 손홍섭 부의장이 의회 5분발언을 통해 위령탑 건립을 강력하게 촉구하는 것을 계기로 사업이 탄력을 받게 됐다.
▶미군 폭격기 형곡동 오폭 사건
1950년 8월 16일(음력 7월 2일) 오전 10시경, 기체 불명의 폭격기 몇 개 편대가 수 시간 동안 시무실을 맹폭하면서 마을은 삽시간에 비극의 먹구름으로 뒤덮혔고, 불바다로 변했다, 설상가상, 폭격이 끝나자마자 다시 제트기 몇 대 편대가 마을을 향해 기관포 사격을 가해왔다.
이 난리통에 1백 3십명을 훨씬 웃도는 주민과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피난민들이 집단 떼죽음을 당해야 했다.당시 목격자들에 따르면 한 집안이 몰살된 경우가 많았으며, 마을과 인근 산야가 벌집 쑤셔놓은 것처럼 참담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피폭자들은 무장한 군인이 아니라 순수 민간인들이었다는 것이다.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당시 동사무소에 공식 신고된 형곡동(당시 시무실)의 사망 주민은 130여명, 전쟁 중이어서 급박한 정황 때문에 미처 신고하지 못한 사람까지 포함하면 수백 명에 이를 것으로 당시를 목격한 이들은 예상하고 있다.
▶폭사건, 형곡동 이외에도 선산,구포동서도 발생
지난 1950년 8월 16일(음력 7월 2일)미군 폭격기의 오폭에 따른 구미시 시무실(사창마을), 지금의 형곡동을 맹폭하면서 1백 수십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 이외에도 시 관내 타 지역과 이웃해 있는 시군에도 이와 유사한 비극이 발생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여기에다 6.25 당시 민간 학살사건의 비극 역시 발생했던 것으로 알려져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동시에 이들의 영혼을 추모해야 여론이 일고 있다.
1950년 6월 발생한 6.25전쟁을 전후해 미군 폭격기의 오폭사건으로 역사적인 비극을 겪어야 했던 곳은 형곡동, 선산 송림동, 구포동, 김천시 농소면 봉곡리 등이었다.
경북도의회 특위 보고서(2000년)에 따르면 형곡동(시무실 혹은 사창마을)은 1950년 8월 16일 미국 폭격으로 130여명이 사망했다. 또 전민특위 공동 백서에 따르면 선산읍 송림동 역시 1950년 8월 31일, 미군 폭격으로 38명이 사망했다.
또 1950년 음력 7월 2일에는 미군기가 마을로부터 4키로미터 떨어진 금전동 앞 하천에서 피난 생활을 하고 있는 주민 50여명을 향해 미군기가 총을 쏘아 18명이 사망했다.
이외에도 구미도로변의 피난 행렬도 미군기 폭격을 받아 5-6명의 희생자를 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오태동 묘곡리에 살고 있는 유족들이 6.25 당시 형곡동에 피난 중 미군 폭격기의 오폭으로 3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했다면서 형곡동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건립을 위한 추진위원회를 방문하기도 했다.
또 1950년 7월 25일에는 전폭기 2대가 피난민 수천명이 생활하는 김천시 남면 연봉천 냇가에 기관총을 발사해 희생자를 발생시켰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와함께 미1기갑 사단장 호바트 게이 소장과 일부 장교들이 칠곡군 왜관교 폭파명령으로 다리가 폭파되면서 어린이와 여성등 많은 피난민이 살해되거나 익사됐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양민 학살 사건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1960년 6월28일자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양민 학살자 신고 기간 중 당시 선산에서도 100여명이 신고했다. 이들은 주로 1950년 8월 1차 후퇴 때 경찰에 의해 학살당했거나, 북진 당시 군인에 의해 학살된 양민이었다.
희생된 이들은 농민 69명, 공업4명, 상업 6명, 공무원 3명, 기타 학생과 무직 등이었다. 이러한 비극을 알고 있는 유족들은 수차례 당시의 사찰형사에게 학살날짜라도 알려달라고 하소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이 보도 내용이다.
이외에도 선산읍 이문리에서도 피난을 갔다가 너무 일찍 돌아왔다는 이유로 군인이 마을 사람 20-30명을 총살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구미시 법성사 인근에서도 억울한 양민학살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비극을 밝혀내기 위한 노력
지울 수 없는 악몽 속에서 살아온 생존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참극이 발생하고 40년이 지난 1992년 고 이종록(발기인 대표/ 이규원 전 의원 선친)옹을 중심으로 ‘위령탑 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미국의 미자도 꺼내지 말라’는 국방부로부터의 회신을 받고 이들은 좌절해야 했다.이어 2005년에는 구미시에 의견서를 제출하고, 진정서를 냈으나 시정에 반영되지 않았다.
결국 1년 후인 2006년 11월 28일 이규원 전 구미시의회 의원은 진정서 마감시한을 이틀 앞두고 부랴부랴 진정서를 작성하고, 과거사 정리 기본법에 따라 과거사위에 자료를 제출했다. 이로부터 2개월 후인 2007년 1월 위령탑 건립 추진위는 오매불망 그리던 ‘결정통지서’ 손에 쥘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장조사에 착수한 것은 조사개시 결정 통지문을 받은지 2년 3개월 후인 2009년 4월 7일이었다. 그러나 현장조사를 했지만, 이를 뒷받침할 법안이 발의, 의결되고, 보상에 따른 재조사를 꿈꿔온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꿈은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위령탑 건립 가시화
2012년 5월17일 발족한 구미시 형곡동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건립을 위한 추진위원회는 2013년 8월 위령탑 건립 및 추모행사를 위해 발 빠른 움직임을 보여왔다.
총 12명으로 구성된 추진위는 충북 단양의 6.25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등 2곳을 방문하는 등 밴치마킹에 나섰다.
이어 12월에는 위령탑 건립 향후 추진계획, 희생자 접수 안내 및 기타 토의등 주민설명회를 통해 건립 장소를 구미시립중앙도서관 공원 내로 의결하고 2013년 7월까지 위령탑을 건립하자는데 뜻을 같이 했다.
추진위는 설명회를 시작으로 2013년 2월 명각 대상자를 확정하고 4월까지 조형물 공모, 6월까지 위령탑 건립공사 시행, 7월까지 공사를 마무리 짓고 같은 달 3일, 민간인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추모제를 열기로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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