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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 고아읍의 인물들

경북문화 기자 / gminews@hanmail.net입력 : 2013년 12월 11일

 

-구미시 고아읍의 인물들

- 문향과 예향, 충절과 열녀의 역사가 흐르다

-서예의 대가 황기로, 충절▪학문의 대가 야은 길재, 영화의 효시 김유영, 국악계 거목 박록주, 부부의 정을 지킨 열녀 약가

 

구미시 선산 출장소 지역의 발전 중심축으로 부상하면서 신흥 주거지역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는 고아읍의 유구한 역사 속에는 문향과 예향, 충절과 효심, 열녀의 강물이 마치 살핏줄 처럼 흐르고 있다.

그 흐름은 고아읍에 둥지를 틀고 살아가는 이들의 정신적 혼을 일깨우기도 하고, 무질서의 혼탁한 시류 속에서 걸어가야 할 정도가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기도 한다. 문물이 교차정도가 갈수록 농후해지는 현대사의 한 페이지가 구미시에 씌여지고 있다는 현실을 들춰내다 보면 고아읍에 탯줄을 드리우고 세상의 혼을 일깨우던 이 지역 출신 인물들의 맑은 혼과 그 가치성은 가슴 깊은 곳에 경종을 울리고도 남음이 있다.

고아읍은 근현대로 오면 동편제의 거목이면서 국악의 효시로 명명되는 박록주 선생을 탄생시켰고, 근대한국 영화의 효시인 김유영 선생을 배출시켰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역사에 깊은 족적을 남겼는데도 불구하고 상응하는 평가가 이뤄지지 않아 안타까움을 더해 주는 초성 草聖 황기로 선생이 태생한 곳 역시 고아읍이기도 하다.

봉한리 국도변을 거치다보면 조그만 삼강정려각이 세월을 버티고 앉아 있다. 봉한리 한 마을에서 충신 길재,효자 배숙기, 열녀 약가가 나오자,정조 19년에 그 정려를 한곳에 모아서 비각을 세운 것이다.

한 지역에서 이처럼 이 나라 국악와 영화, 서화의 대가에다 충신과 효자, 열녀의 상징적인 인물이 나오기는 쉽지 않다.

이 때문에 고아읍의 상징인 접성산은 늘 고고하고, 수려한 산세마다 수림을 이른 청정한 소나무들이 그다지도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단 말인가.

▶ 초성 草聖 황기로 선생

  ▶금오산 입구에 향기로 선생이 쓴 금오동학이 있다. 하지만 관리 허술로 글씨체가 보이지 않는다.

유구한 우리나라의 역사를 통해 성인 칭호를 받는 이는 세분이 있다. 문인으로 신라시대 서성 書聖인 김생, 초성 草聖 칭호를 받은 조선시대 황기로 선생, 무인으로 성웅聖雄 칭호를 받은 이순신 장군이 그들이다. 그만큼 고아출신의 황기로 선생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인물 중의 한명인 것이다.

조선 중종 16년 (1521년) 지금의 고아읍 대망리 속칭 망장에서 태어난 고산 황기로 선생(1521년- 1567년)은 사신단으로 중국을 방문 했을 때 황제 앞에 글씨를 써 넣었고, 이를 본 황제는 황기로 선생을 해동초성 海東草聖이라고 칭했다. 왕휘지 이후 일인자라는 의미였다. 이 때문에 중국사신단이 우리나라를 방문하면 황기로 선생의 글씨를 받아가는 것을 최고의 선물로 여겼고, 금오산 정상에 올라 후망대를 바라보면서 감탄을 했다고 한다. 그 만큼 황기로 선생은 중국에서도 성인의 예를 받던 인물이었다.

고아읍에 있는 접성산의 유래 역시 황기로 선생이 서재로 사용하던 매학정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성인이 태어나고 도를 닦는 매학정과 접해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접할 접 接자에 성인 성 聖자를 써서 접성산 接聖山이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황기로 선생은 역사적인 족적에도 불구하고 현대사로의 계승 작업이 지지부진해 안타까움을 더해 준다. 1953년 11월 미군통신기지가 들어서면서 출입 통제 구역으로 묶였다가 최근들어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금오산 정상 옛 미군기지 내에는 문화적 가치가 매우 높은 황기로 선생의 걸작품인 후망대 글씨체가 묻혀 있다.

이 뿐이 아니다. 금오산 케이블카 기점으로부터 금오산 방향 500미터 부근에는 거대한 바위에 황기로 선생이 음각한 금오동학 金烏洞壑 ( 金(103㎝×72㎝) 烏(107×69) 洞(90×52) 壑(95×50)이 있다. 금오산의 깊고 그윽한 절경을 뜻하는 소중한 보물인 금오동학은 보물적인 가치가 있으나 안내판만 있을 뿐 이를 보존하거나 세상에 알리려는 노력이 뒤따라 주지 않아 눈여겨 보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글씨체가 상당부문 훼손된 상태여서 안타까움을 더해 주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 근대 영화의 효시 김유영 선생

  ▶김유영 선생

생소할런지 모르지만 한국 근대 영화의 효시인 김유영 선생이 고아읍에서 태생했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해 준다고 할 것이다.

1908년 9월 22일 출생한 김 선생의 삶은 32세에 세상을 별리할 만큼 길지 않았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한국 근대영화계에 남긴 족적은 가히 역사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중장년층에게 어색하지 않은 1928년의 영화 유랑과 1940년의 수선화 역시 김 유영 선생의 감독한 작품이다.1938년에는 조선 최초로 조선일보가 발의한 영화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족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업적이 역사로부터 소외될 위기에 놓여 있었으나,

지난 2008년 당시 박순이 의원의 첫 제의와 정근수, 김도문 의원의 노력으로 <근대 영화인 김유영 유허비 건립>을 위한 예산을 마련했고, 이듬해인 2009년 지금의 문장초 앞 도로변에 유허비가 건립됐다.

▶국악 동편제 국보적 존재 박록주 명창

  ▶명창 박록주

  ▶명창 박록주 전국 국악대전 시연 모습

동편제(東便制)창법의 국보적 존재로 흥보가 명창이면서 판소리계 우먼파워를 심은 인간문화재인 박록주(朴綠珠, 1905~1979) 명창은 열두살 때부터 소리길을 닦았고, 20대에 벌써 국창급 대명창들의 고제를 두루 이어받아 여류명창으로 명성을 떨쳤다. 1928년에는 콜롬비아 레코드사에 심청가를 취입했고 연이어 빅터 태평양 레코드사에 판소리 네바탕을 모두 출반하기도 했다.

특히 1933년 조성성악연구회 결성에 결정적 기여를 한 박록주는 1935년 춘향극(조선성악연구회 주최, 정정렬 연출) 공연에서 춘향역을 맡아 열연해 장안의 화제를 낳았다.

40년대 후반에는 남창 편의 위주로 운영된 국악계에 여성국악동호회를 창립해 여류 국창으로 군림한데 이어 남자 명창들의 맥이 거의 끊어져버린 인간문화재 시대에는 김여란과 함께 쇠퇴하는 소리판을 굳건히 지켜냈다. 타계 일년전인 1978년 고향 선산에서 열린 고별공연에서는 백발가를 불러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구미시민들이 박록주 선생에 대한 계승작업은 남달랐다. 김영일 전 경북도 정무부지사를 주축으로 한 인사들은 1994년 구미문화연구회롤 발족하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구미지역 문화예술 관련 연구사업과 명창 박록주 선생의 추모 사업을 매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등 구미지역 문화예술 진흥을 선도해 왔다. 이러한 노력은 2000년 초반 발족한 명창 박록주 기념사업회로 진화해 나갔고, 구미문화예술진흥원으로 발전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제11회 대회를 목전에 두고 있는 명창 박록주 전국 국악대전은 대통령상을 수여할 만큼 전국 국악대전의 대명사로 자리를 잡았다. 구미가 자랑할 수 있는 문화의 상징물로서 손색이 없다는 평을 얻고 있다.

▶야은 길재 선생  

   금오산 도립공원 안에 있는 채미정은 조선 영조44년(1768년)에 야은 길재 선생의 높은 충절과 학행을 추모하기 위해 당시 선산부사 민백종이 지은 건물이다.

고아읍 봉한리에서 출생한 야은 길재(吉再, 1353~1419)선생은 금오산의 명성을 새롭게 한 인물이기도 하다. 금오산은 영남의 소금강으로 유명하지만, 금오산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야은 길재 선생이 은거하면서 절개를 지킨 곳이기 때문이다.

1386년(우왕 12)에 문과에 급제. 성균관 박사를 거쳐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올랐으나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특히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들어서면서 태상박사(太常博士)의 관직을 내렸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벼슬을 사양하고 선산(善山)에 은거하면서 절의를 지켰다. 1419년(세종 1)에 그가 별세하자 나라에서 충절(忠節)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후세 사람들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이라 일컬어 높은 절의와 고매한 학덕을 추모했다.

금오산 진입에는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1768년(영조 44년)에 건립한 정자인 채미정이 있다. 1977년 문화재관리국에서 전면 보수를 실시한데 이어 대대적인 국비지원에 힘입어 내년부터는 주변 정비사업에 들어간다.

길재 선생에 대한 후세들의 계승 노력도 남다르다. 최근 김종배 구미상의 사무국장 등은 야은선생 숭모회(회장 김종배)를 발족하고, 생가 유허지(遺墟址)를 경상북도지정 기념물 추진키로 하는 등 선생의 업적을 재조명해 경북의 정신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앞장서고 있다.

▶ 열녀 악가

삼강 행실도를 넘기다보면 열녀 약가 이야기가 나온다. 또 봉한리 국도변에는 조그만 삼강정려각이 있다. 이곳 봉한리 한 마을에서 충신 길재,효자 배숙기, 열녀 약가가 나오자 정조 19년에 그 정려를 한곳에 모아서 비각을 세운 것이다.

약가는 고려시대 충신이었던 길재 선생과 한 마을에서 자랐다. 곱게 자란 약가는 조을생에게 시집을 갔다. 하지만 그 무렵 바다 건너 왜구들이 배를 타고 건너와 노략질을 일삼았다. 심지어 왜구들은 낙동강을 거슬러 약가가 살고 있는 봉한리 까지 침략해 마을을 불사르고 물건을 빼앗아 갔다. 이에 굴하지 않던 약가의 남편 조을생은 의병이 돼 왜군과 싸웠지만 잡혀가는 신세가 되어야 했다.

그 세월이 8년이었다. 그 오랜 시간을 하루같이 문고리를 잠그고 외롭게 지낸 약가는 다시 남편과 만나 행복한 여생을 보냈다. 짧지 않은 세월동안 남편을 기다리며 지내 온 사실을 안 조선 태종은 그녀를 역사에 길이 남을 열녀로 평하고 <삼상행실도>에 기록해 후세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게 했다.

 

-구미가 낳은 열녀 향랑

- 지조를 지키려고 지주중류비 연못에 몸을 던지다

 

 

  ▶시립 중앙도서관에 있는 향랑의 시비

 

“하늘은 어찌하여 높고도 멀며/ 땅은 어이하여 넓고도 아득한고/ 하늘과 땅이 비록 크지마는/ 이내 한몸 붙일 곳이 없네/ 차라리 강물에 몸을 던져/ 물고기 뱃속에 장사지내리/”

1683년 구미시 형곡동 박자신의 딸로 태어나 19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며 남긴 열녀 향랑의 ‘산유화가’의 일부이다.

길재 선생의 넋이 서린 구미시 오태동 지주중류비에 가면 지금도 세상을 떠나며 남긴 젊은 아낙의 흐느낌이 귓가에 맴도는 듯 하다. 20세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낙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형곡동에서 태어난 향랑은 어려서부터 사대부가의 아녀자들도 능히 행동할 수 없는 절의를 배웠다. 어린시절 어머니를 여인 그녀의 삶은 비극적이었다. 포악한 계모의 학대에도 슬픈 내색이 없었고, 행실이 단정했다. 가사에만 전념하던 그녀가 출가를 한 것은 17세 되던 해. 신랑은 인근마을 임천순의 아들 임칠봉이었다. 14세인 어린 신랑인데도 성질이 포악해 툭하면 향랑은 머리채가 휘어잡히고 얻어맞는 폭력을 당해야 했다. 피멍이 든 며느리에게 시부모까지 합세하여 못살게 했다.

  ▶향랑의 사당

결국 그녀는 집으로 쫓겨와야 했다. 그러나 계모의 학대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이를 보다 못한 숙부는 개가토록 종용했다.

그러나 향랑은 “제가 비록 상것이지만, 이부종사를 어떻게 하겠느냐.”며 다시 시집으로 돌아왔지만, 그녀를 맞이한 것은 갖은 학대와 구타였다. 향랑은 결국 정조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1702년 가을, 향랑은 길재 선생의 넋이 서린 지주중류비 아래 낙동강이 바라다보이는 연못으로 가 마침 나무하던 소녀를 만나 맺힌 사연을 모두 털어놓고, 죽음을 친정에 알려 줄 것을 부탁하면서 지은 가사를 서럽게 읊었다. 이 노래가 바로 “이내 한몸 붙일 곳이 없다.”는 산유화가이다.

향랑은 그 쓸쓸한 가을날 치마와 신을 벗어놓은 채 굽이치는 연못에 꽃다운 스무살의 한많은 몸을 던졌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704년 선산부사 조구상은 이사실을 삼강행실도의 예에 맞춰 그림으로 조정에 품신하고, 숙종은 그해 6월 5일 정려를 내렸다. 열녀임을 국가에서 인정한 것이다.

“삼월 봄바람에 풀은 푸른데/ 오태소에 아낙네가 신을 벗구나/ 산유화가 한가락에 목이 매이고...” 선산부사 조구상은 열녀 향랑을 이렇게 추모했다.

1992년 형곡동은 지역 출신 향랑을 추모하기 위한 ‘열녀 향랑 추모회’를 결성했고, 초대회장은 고 이종록 옹이 맡았다. 1997년 4월에는 구미시 형곡동 시립도서관 뒤편에 그녀를 기리는 시비를 세웠다.

지금도 형곡동 형곡중 맞은 편 야산에는 향랑묘가 그녀를 기리는 당시의 추모비와 함께 누워있다. 구미시에서는 사당을 짓고 매년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경북문화 기자 / gminews@hanmail.net입력 : 2013년 1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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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정상 케이블카 설치가 추진되곤 했나보군요. 산은 '걸어 올라갈 수 있는 자' 들에게 문을 열어주게 두면 좋겠군요. 저는 딱 한번 ^^. 전국에 우후죽순처럼 지자체 케이블카 사업이 추진됐는데... 돈 버는 곳은 '여수 해상케이블카', '남산 케이블카' , '설악산 케이블카' 정도라고 하는군요. 나머지는 모두 극심한 적자라고... 좀 지난 기사기는 하지만... 혹 금오산에 케이블카 눈독들인 정치인 계시다면 조심하시는게... ^^
구미에 이런 오랜 역사가 있었군요. 취재에 고생하셨습니다.~
국립오페라단이 구미에서... 와우~. 관람료도 적당히 책정했군요. 정말 구미에서 만나기 쉽지 않는 기회인 것 같습니다. 가보고 싶군요. 강추!!
구미는 별천지군요. 민주당이 다수인 국회 관련 기사인가? 하다가 보니... 구미시 의회로군요. 전국구에서 힘 못 쓰고 구미에서 '안방 여포' 하려는건지. 시의회가 어찌... 에휴.
오폐라 중 가장 위대한 작품은 모짜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오페라의 전편이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입니다. 구미에서 만나기 쉽지 않은 공연입니다. 강추!!
대통령과 악수하는데 이철우 도지사가 뒷짐지고 악수하데. 주려던 떡도 도로 거두겠다.
너거들이 무능한게 아니고?
국가산단 경쟁력 강화와 지역 정주여건 개선을 위해 KTX 구미역 정차? 나같으면 "구미 오시느라 오래걸려서 고생하셨을 겁니다. 기업의 직원과 협력사 직원들이 출장 다닐 때 이렇게 교통 시간이 많이 걸리니 불편할 뿐 아니라 산업경쟁럭도 악화됩니다. 해외법인이나 글로벌 파트너사에 시간을 다투는 출장가려고 인천공항에 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랬을 것 같다. 말에는 초점이 있어야한다. 정주여건이야 그냥 시장이 알아서 하거나 경북지사와 얘기해도 될 일.
근대 그때 다부동 방어선 있고 가산 대구 방향은 국군, 유엔군 지역이고 구미 선산 왜관은 북한군 점령지이고 다부동 진출의 교두보인데 후방폭격은 당연함
일본어 이동네주위에4~5십년거주한시닌으로서금리단길은금오산가는도중길이어서상권형성에어려룸이많을것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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