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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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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작가의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의 배경이 됐던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은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수도원 중 하나다. 세계 베네딕도수도원 가운데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큰 수도원이기도하다.
왜관수도원 초대 아빠스를 지낸 독일인 오도 하스(Odo Hass, 84세) 아빠스를 지난 일요일 구미카톨릭근로자문화센터에서 만났다.
34세에 초대 아빠스로 선출
“신부가 될 때부터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해줘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러다 한국을 알게 돼 한국으로 지원했어요.”
1931년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나 1960년에 독일에서 선교사로 파견한 오도 하스 아빠스는 독일 신부들이 일제강점기부터 한반도 북쪽에서 널리 포교를 했다고 전한다.
왜관수도원은 1952년 시작됐지만 그 기원은 19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전쟁 이전 북한에 있던 덕원수도원과 만주의 연길수도원의 수도자들이 월남해 설립한 수도원이기 때문.
작은수도원에서 시작한 왜관수도원은 본당과 신자수가 급속히 늘고 수도원 가족도 크게 늘어 대수도원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그 결과 1964년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됐다. 이때 오도 하스 신부는 34세의 나이로 초대 아빠스로 선출됐다. 왜관수도원의 최연소 아빠스다.
일하며 기도하라
“수도원의 수입은 인쇄소와 철공소, 목공소, 농장 등의 운영에서 나오죠. 이 수입으로 수도원 운영과 사회사업을 하죠.”
오도 하스 아빠스는 “‘일하며 기도하라’는 베네딕도 사도의 정신에 따라 수도원 자급자족을 위해 여러사업을 펼쳐오고 있다”고 설명한다. 지금의 분도출판사와 목공소 등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특히 수도원의 현대식 농장경영은 왜관수도원의 자급 자급자족에 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농장경영의 현대화를 통해 지역사회에도 크게 이바지 했다. 또 왜관수도원은 왜관의 순심 중·고등학교를 인수하고 기숙사를 운영함으로써 청소년교육에도 전력했다.
필리핀 이주민을 위한 미사 진행
오도 하스 아빠스는 “내가 파견해올 때만 해도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빠른 시간에 눈부신 발전을 했다며 한국경제발전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높이 평가했다.
1971년, 오도 하스 아빠스가 사임하고 후임으로 한국인 아빠스가 취임되면서 왜관수도원은 한국화 되기 시작했다.
사임 후 그는 아시아 수도원을 담당하면서 일본과 필리핀 등에서 수도원장을 맡았고 로마와 대만, 스위스 등에서 신부로서 사역을 하다 2011년 다시 왜관수도원으로 돌아왔다.
“일을 충분히 했다. 하지만 난 할 수 있어요.”
오도 하스 아빠스는 구미카톨릭근로자문화센터에서의 마지막 미사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는 영어로 미사가 가능했기 때문에 지난 1여년 동안 1주일에 한 번씩 구미카톨릭근로자문화센터에서 필리핀 이주노동자와 여성들을 위해 미사를 주례해왔다. 하지만 왜관수도원에서 운영하던 구미카톨릭근로자문화센터를 대구대교구가 운영하면서 지난 7일 미사를 끝으로 마무리했다.
수도원 생활에 충실할 터
오도 하스 아빠스의 요즘 하루 일과는 새벽 4시 30분 기도를 시작으로 저녁 8시 끝기도에 이어 편지쓰기, 일기쓰기가 끝나면 11시 취침에 들어간다. 하루일과 중 독일기부자들에게 공동편지 쓰는 것과 일기 쓰는 것은 그가 결코 놓을 수 없는 일이다. 지난 11월에는 20통, 12월에는 85통의 편지를 독일로 보냈다. 이를 통해 필리핀 학생 90명에게 학비와 식비를 지원해주고 있다.
기자의 계속되는 질문에 “나에 대해 알고 싶으면 고향친구에게 물어보라”며 “60년부터 고향친구와 지금까지 편지를 주고 받아왔는데 그 편지를 그 친구가 모두 보관하고 있다”고 웃으며 말한다.
오도 하스 아빠스는 “남은시간 수도원생활에 충실하고 독일기부자들에게 공동편지쓰기와 필리핀 학생지원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는 앞으로의 바람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