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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창간 10주년, 단독보도 10대 뉴스

경북문화신문 기자 / gminews@hanmail.net입력 : 2015년 06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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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시무실>
 

오프라인 경북문화신문과 온라인 경북타임즈가 6월29일자로 창간 10주년을 맞는다. 그동안 본지는 분석 중심의 정치, 사회, 경제, 교육분야를 비롯한 동네 소식을 상세히 알리는데 무게를 두고 이를 집중 보도해 왔다.

창간 10주년을 앞두고 대안을 제시한 주요 10대 뉴스를 간추려 보도한다.<편집자 주>

 

■6월 잊혀지지 않는 참극 시무실 미군 오폭사건

-<단독보도>구천을 떠도는 수백명 원혼

 

<2009년 6월 7일자>지난 2009년 4월 6일 구미시 형곡동 이규원 전 시의원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았다. 4월 7일부터 8일까지 시무실(형곡)미군 폭격기 오폭사건을 현장 조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2007년 1월 30일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로 부터 조사개시를 결정받은지 2년 3개월만의 일이었다.

시무실(지금의 형곡동) 미군 오폭사건에 대한 현장 조사에 나선 형곡지구 대상자는 생존자와 피해자 가족 등 35명이었다. 더 많은 피해자가 있지만, 당시 상황을 목격한 주민이나 피해자 가족들이 전국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기 때문에 현장조사 대상자는 미군 폭격기의 오폭으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130여명에 비해서는 턱없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조사기간 동안 피해자나 그 가족, 현장을 목격했던 주민들은 기억하기 조차 싫은 미군 폭격기 오폭 당시로 되돌아가야 했고, 그 악몽의 세월 속에서 그들은 다시 깊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렇다면 1950년 시무실( 지금의 형곡동)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50년 6.25발발 당시 시무실로 불리던 지금의 형곡 주민들은 농사만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순박한 이들이었다.

이들에게 비극의 기운이 밀려온 것은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였다. 그해 여름,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인 지정학적인 특수성 때문에 이곳에는 수천 명의 피난민들이 만호처럼 몰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순박한 마을 주민들은 전쟁을 피해 이곳으로 온 피난민들과 함께 포성 속에서 숨죽이며 전쟁이 끝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허망한 기대였다. 1950년 8월 16일( 음력 7월 2일) 오전 10시경, 기체 불명의 폭격기 몇 개 편대가 수 시간 동안 시무실을 맹폭하면서 마을은 삽시간에 비극의 먹구름으로 뒤덮혔고,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설상가상, 폭격이 끝나자마자 다시 제트기 몇 대 편대가 마을을 향해 기관포 사격을 가해왔다.

이 난리통에 1백 3십명을 훨씬 웃도는 주민과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피난민들이 집단 떼죽음을 당해야 했다.당시 목격자들에 따르면 한 집안이 몰살된 경우가 많았으며, 마을과 인근 산야가 벌집 쑤셔놓은 것처럼 참담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피폭자들은 무장한 군인이 아니라 순수 민간인들이었다는 것.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당시 동사무소에 공식 신고된 형곡동(당시 시무실)의 사망 주민은 130여명, 전쟁 중이어서 급박한 정황 때문에 미처 신고하지 못한 사람까지 포함하면 수백 명에 이를 것으로 당시를 목격한 이들은 예상하고 있다.

특히 타 지역에서 이 마을로 피신한 이들 중 사망한 사람은 통계에 포함되지조차 않았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면, 그 피해자는 엄청날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비극을 밝혀내기 위한 노력>

지울수 없는 악몽 속에서 살아온 생존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참극이 발생하고 40년이 지난 1992년 이종록(발기인 대표)옹을 중심으로 ‘위령탑 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미국의 미자도 꺼내지 말라’는 국방부로부터의 회신을 받고 이들은 좌절해야 했다.이어 2005년에는 구미시에 의견서를 제출하고, 진정서를 냈으나 시정에 반영되지 않았다.

결국 1년 후인 2006년 11월 28일 이규원 전 구시의회 의원은 진정서 마감시한을 이틀 앞두고 부랴부랴 진정서를 작성하고, 과거사 정리 기본법에 따라 과거사위에 자료를 제출했다. 이로부터 2개월 후인 2007년 1월 위령탑 건립 추진위는 오매불망 그리던 ‘결정통지서’를 손에 쥘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조사개시 결정 통지서를 받을 당시 이종록 발기인 대표는 “내 나이 30세의 꽃다운 청춘에 일어난 역사의 비극을 지금이나마 국가가 결정, 현장을 조사하겠다니, 다행스러운 생각에 가슴이 미어진다”며 “83세의 나이에 이제는 여한도, 미련도 없다. 구미의 역사적 사건들이 면밀하게 조사되고 잘 기록되어 보존되기를 간절하게 바랄뿐”이라며 눈시울을 붉혀 세상을 숙연하게 했다.

그리고 현장조사에 착수한 것은 조사개시 결정 통지문을 받은지 2년 3개월 후인 2009년 4월 7일이었다. 그러나 현장조사를 했지만, 이를 뒷받침할 법안이 발의, 의결되고, 보상에 따른 재조사에 착수하려면 그 끝점이 언제일런지는 예상하기 조차 불투명한 것이 사실이다.

“지금도 파편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시는 중환자 분은 물론 심지어 폭격으로 다리가 절단된채 눈물로 살아가는 분도 생존해 계십니다.”

시무실(荊谷), 사창(司倉), 수락 (水洛) 등으로 불리웠던, 1950년 금오산 기슭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던 형곡, 당시만 해도 시무실로 불리던 이곳에 미군 폭격기의 무차별 맹폭으로 이곳에 살던 주민 일백 3십명과 수를 헤아릴수 없는 피난민들이 쓰러져 간 것은 다시는 있어서는 안될 비극이다.

이 때문에 생존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들은 " 비명에 가신 원혼을 달래고,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역사적인 교훈으로 삼기위해서라도 구미시가 위령탑을 세우는 정도의 가장 기본적인 노력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울먹였다.

 

 

 

■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 아 옛날이여

- <단독보도> 구미출신 장관급 인사 전무

 

<2010년 8월 1일자>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이요,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역사서 택리지에는 인재의 고장, 선산을 이처럼 높게 평가하고 있다.

구미(선산)는 고래로부터 많은 인물을 배출해 왔다. 영남 사림파의 거두인 야은 길재는 물론이고, 사육신, 생육신이 구미에서 나왔다. 점필제 김종직도 인재의 고장 선산의 가치를 더해 준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구미가 낳은 인물이다. 세명의 대통령을 탄생시킨 킹메이커 김윤환 전 의원은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고, 박세직 전 의원은 서울시장, 안전기획부장, 88올림픽 추진위원장을 지내면서 구미의 명성을 높였다.

이후에도 구미출신 장차관들은 수 없이 많이 배출됐다. 이어 노무현 정부 들어서는 추병직 건교부 장관을 배출했다. 그러나 추 전 장관을 끝으로 구미의 득세는 하향 곡선을 긋기 시작했고, 급기야 이명막 정부 들어 구미는 장,차관급을 한사람도 배출하지 못했다.

현 정부의 요직에는 구미출신으로 김두우(53)청와대 기획관리실장이 유일하다. 경북고와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중앙일보 정치부장, 수석 논설위원을 거친 김 실장은 지난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특종보도하면서 한국 기자상을 수상한 유명 언론인이다. 2009년 신설된 청와대 메시지 기획관으로 등용된 김 실장은 지난 7월 참여정부 시절의 국정상황실장과 유사한 기획관리 실장에 임명됐다.

이명박 정부가 제1기 내각을 출범시킬 당시 15개 부처 장차관급으로 경북에서는 3명의 장관과 3명의 차관과 1명의 차관급을 탄생시켰다.

▶김경한 법무장관은 경북 안동이 고향이었고,▶원세훈 행정안전부장관은 영주가 고향이었다.▶이영희 노동부장관은 경산 출신이었다.

새 정부에 입각한 경북출신 차관은 3명이고, 차관급은 1명이었다.

8월 들어 이명박 정부는 후반기 내각인 3기 내각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구미출신 장차관은 전무했다.

반면 경북출신 장차관은 1기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인물이 등용됐다.

▶7월 28일 송파을 재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재오 특임장관은 경북영양이 고향이다.

경북출신 차관과 차관급은 총 5명이었다. 시군별로는 청도, 안동, 김천, 영양, 의성군이 각각 1명의 차관급을 배출했다.

▶이현동 국제청장은 청도가 고향이다. ▶류성걸 기획재정부 2차관은 안동출신으로서 기획통으로 평가 받는다 ▶안양호 행정안전부 2차관은 김천이 고향으로 국민권익위 중앙행정 심판위 상임위원을 지냈다. ▶김재수 농림수산식품부 1차관은 이재오 특임장관과 동향인 영양이 고향이다. ▶김희국 국토해양부 2차관은 의성이 고향이다.

이처럼 이 명박 정부 들어 구미는 김관용 경북도지사를 중심으로 그 역사적인 인맥을 이어나가고 있는데 만족해야 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번사 주변

 

■구미의 생명수 번사를 이대로 둘 것인가

<단독보도> 구미 역사의 샘터, 망각 속으로

 

<2009년 2월 15일자> 구미시 원평동 우시장 길에 접어들면 구미시청 환경미화원 사무실 뒤쪽에는 1970년대 개통된 경부고속도로가 있고, 도로와 어깨를 낀 곳에 물이 흘러내려 고인 물 웅덩이가 있다.

예로부터 이 일대를 번사마을로 불렀기에 사람들은 이 물을 번사물 이라 부르고 있다.

지금도 구미시민들은 아련한 추억을 번사에서 찾으려 한다. 하지만 황폐화된 모습은 실망감을 안겨줄 뿐이다.

산업화의 물결이 구미에 밀려오면서 공장이 들어서고 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이었던 1970 년대 이전만 하더라고 이 번사물은 아이들이 발가벗은채 물놀이를 하고 아낙네들이 옹기종기 모여 빨래를 하곤 했던 추억이 서린 장소였다.

어른 팔뚝만한 고기까지 서식하는 등 생생한 추억을 잊지 못한 이들은 번사계를 만들어 그들만의 소중한 추억을 이어나가고 있다.

산업화 이 후 차가운 시멘트 문화가 자리를 틀면서 잊혀져 가는 추억의 장면을 마음속에 나마 되살려 놓기위해 위해 번사계를 만들어 아련한 추억을 잇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향수를 퍼 올리는 번사가 각종 쓰레기와 오수로 뒤범벅이 되면서 본지는 세차례에 걸친 보도를 했다.

지역주민들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향수를 져버리고 있다는 본지 지적에 원평2동은 하천을 보호하고, 주변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안전 울타리를 치는 등의 노력을 보였다.

하지만 이후 시는 발전적으로 개발 할수 있는 방안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전 울타리를 치는 작업에 그쳤다.

안전울타리 설치가 물리적으로는 번사를 지켜 낼 수 있지만 번사에 서린 향수와 지역민들의 애환을 달래기에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잇따르면서 근본적인 대책마련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50년 가까운 세월동안 번사를 지켜보아 왔다는 석모(79세) 마을 주민은 “고속도로가 들어서기 전만 하더라도 이곳은 우시장이 들어서고 멱을 감는 아이들, 빨래를 하는 아낙네 등 사람들이 북적였던 구미의 대표 마을”이라며“번사물의 크기도 작아지고 물의 양도 줄어 예전 같지는 않지만 이대로 방치했다간 흉물로 전락할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극성 부리는 노점상

 

 

 

■빈 점포, 임대점포 가슴치는 서민 상가

-<단독보도> 상성 요일장▪노점상 활개

 

<2007년 6월20일자> 2년 전인 2005년까지만 해도 구미시 형곡동 H시장 프라자는 88개의 모든 점포가 성업 중이었다. 그러나 2년 후인 2007년 6월 20일 현재 약 30%에 이르는 30개에 가까운 빈 점포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인근에 위치해 있는 W프라자 역시 2005년까지만 해도 50개의 점포가 성업 중이었으나, 이곳 역시 지난 2006년도에는 완전 철시했고, 그 자리는 대형 PC방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세금을 꼬박꼬박 내면서 영업을 해온 점포들이 문을 닫는 곳은 비단 이곳만이 아니다. 메뚜기떼가 농지를 휩쓸고 가면 남아나는 농작물이 없는 것처럼 대형화된 상설요일장이 들어선 지역의 인접 서민상권은 생계의 벼랑으로 떨어지면서 문을 닫고 있는 심각한 실정이다.

형곡동 H시장 프라자 상인 김모씨(옷가게 운영)는 시립도서관에서 대구은행구간 인도변, 풍림아파트 인접 도로변에 점포에서 팔고 있는 유사업종인 의류노점상이 성업을 하면서 유사점포 대다수가 문을 닫거나 점포를 운영하는 점포주들 역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형할인점에게 쫓기고, 불법 노점상에게 거덜이 나고 있는 서민상가들, 본지 취재진이 지난 5월, 노점상 없는 도시 가꾸기에 성공한 김천시와 울산 중구를 현지 취재한 결과 수천, 수억원의 단속용역비를 들여 전문노점상을 거리에서 쫓아낸 결과 이곳으로는 노점상이 얼씬지역 내에서 돈이 돌고 돌아야 서민상권은 물론 서비스 등 각 분야에 경제력이 실핏줄을 타고 흘러들어 지역 경기를 회복시키는 것은 상식. 그러나 구미는 사정이 다르다.

최근 구미시가 집계한 노점상과 본지가 취재를 통해 집계한 노점상은 66개소에서 100개소에 1천277개에서 2천개에 이른다. 상설 요일장은 15-17개소에 663개에서 1천개에 이르며, 불특정 노점상은 594에서 1천개에 이르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의 추세대로 대형 아파트가 들어서는 곳마다 기업화, 대형화된 노점상이 요일별 상설시장을 개설해 나갈 경우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 확실시 된다. 매월마다 대형아파트가 분양공고를 하고 있고, 매년마다 수개의 대형아파트가 준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친필휘호 훼손

 

 

■ 대통령 친필휘호 원형 파괴

- <단독보도> ‘일선교 준공 기념비 방치

 

<2007년 5월2일자> 1966년 구미시 선산읍 일선교 준공당시 박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남긴 ‘친필휘호’ 기념비가 도개면 도개문화마을 놀이터에 방치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1966년 3월 27일 일선교 준공식 및 구미시 원평동 재향군인회관 준공식에 잇따라 참석하기 위해 구미를 방문한 박 대통령은 일선교 준공행사에서 ‘일선교 준공기념-박정희’라는 친필휘호를 한자로 남겼다.

그러나 지난 2004년 국도 25호선을 확포장하는 과정에서 일선교 교각에 세워졌던 친필휘호 기념비를 철거했다.

선산지역 주민들이 즐겨찾던 명소이자 역사의 현장인 ‘친필휘호’ 기념비가 도개면 도개문화마을 놀이터에 방치되면서 이 지역주민들은 “첨단산업만을 생각하는 편협된 발상이 역사적인 소중한 사료의 원형을 파괴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손만 닿으면 역사적 향기가 물씬 배어나오는 선산지역의 역사적인 향수들을 굴뚝없는 산업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역사적인 의무감 앞에 구미시는 서 있다.

1966년 3월 27일 박정희 대통령은 구미를 방문했다.

지금의 원평동에 있는 재향군인회관과 일선교 준공식에 직접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박대통령은 일선교 준공식에 참석, ‘一 善橋 竣工 記念- 박정희’ 라는 친필휘호를 남겼다.

그런데 지난 2004년 국도 25번 확장공사를 하면서 친필휘호 기념비가 철거된 것.

기념비는 현재 도개면 정보문화마을 놀이공원 입구의 푸섶속에 보호장치 없이 방치 되다시피 해 있다.

친필휘호 기념비의 내용 중에는 당시 60년대 역사의 향기를 맡을수 있는 내용까지 수록되어 있어 아쉬움을 더해주고 있다.

“낙동강으로 분단된 본도 중부지방의 침체된 교통운수 및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1964년 6월 6일 착공, 1억7천5백만원의 공사비를 투입하는 3개년 사업이다. 박 대통령께서 친히 본교의 명명 및 휘필을 했다. 서기 1966년 12월, 경상북도 영남국토 건설국.” 기념비에 쓰여진 이러한 내용의 글씨는 그러나 역사적인 가치성에도 불구하고 관리부실로 글씨까지 훼손 될 위험을 안고 있다.

특히 선산지역 원로들에 따르면 “그해 3월 27일 일선교 준공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은 일선교 행사장 주변을 둘러보면서 착할 선善자, 선산善山인데 산은 왜 이렇게 악산이냐며, 벌거숭이 산에 대한 녹화사업을 지시했다.”고 회고하고 있어 박 대통령의 자연보호에 대한 통치권자로서의 통치이념의 발상지로서도 의미가 있다고 평가한다.

 

 

■ 금오산 등산로 정비해야

<단독보도> 관절염 유발시키는 ‘돌바닥’ 등산로 문제 있다

 

<2007년 2월 15일자> 구미시하면 금오산이요, 금오산하면 구미시를 상징할 만큼 금오산은 시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자연환경이다.이러한 금오산 등산로가 이곳을 이용하는 시민들의 입방아에 자주 거론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는 바와 같이 금오산 등산로는 진입지점부터 대혜폭포 구간까지 돌무더기 투성이다.

돌무더기인 등산로를 시민들이 즐겨 걷다보니, 인체의 가장 중요한 관절이 온전할 수가 없다.

주요 등산로 구간이 돌무더기이고, 이에 따라 관절염 발병우려가 제기되면서 3대 구미시의회는 주요 등산로에 깔아놓은 돌을 없애고 흙으로 교체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는 이러한 요구에 대해 ‘흙으로 등산로를 정비했을 경우 폭우 시 쓸려 내린다’는 이유를 들어 난색을 표명해 왔다.

한마디로 말해 흙으로 등산로를 정비했을 경우의 문제점만을 내세우며 시민들의 건강을 등한 시 해온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흙길로 조성된 십여키로의 문경새재 등산로는 그 옛날에 폭우에 쓸려 갔어야 했지만, 폭우로 인해 문경새제 등산로가 쓸려 갔다는 얘기를 들어 본적이 없다.

어떠한 사업이라도 크고 작은 문제 해결 없이 좋은 성과물을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시멘트와 돌(石)로 등산로 바닥을 치장하던 관선시대는 등산인구가 많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로서는 잘한다고 했던것은 분명하다.그러나 이제는 등산이 생활스포츠가 되었고, 더군다나 건강에 각별히 관심이 큰 시대를 살고 있다.

시민과 관광객들이 평일에는 수백명, 주말이나 쉬는 날에는 수천여명에 육박하는 인구가 이곳 금오산 등산로를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을 찾는 시민이나 외지 관광객들은 단 한번을 등산해도 관절에 무리를 느낀다고 말한다. 현장에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렇듯 금오산 등산로가 시민들에게 관절염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면, 당장에 이를 시정해야 맞는 것이다.

흙으로 조성했을 경우 폭우에 쓸릴 것만을 우려한 나머지 시민적 요구를 무시한다면, 이는 결국 시민의 건강을 생각하지 않는 시정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편으로는 목재형 등산로 구상도 필요한 일이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담그지 않는다면, 된장 먹기를 포기해야 한다.

구미시는 오래전부터 시민들이 한결같이 요구하고 있는 금오산 진입로에서 대혜폭포에 이르는 구간을 흙길이나 목재로 조성해야 한다는 여론을 수 없이 접한 것으로 알고 있다.

웰빙 시대를 맞이하면서 금오산을 찾는 시민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시는 서둘러 시민의 건강을 위하고 금오산에 대한 이미지 개선 차원에서 등산로를 흙이나 목재로 조성하는 일을 서둘러 실천해야 한다.

  천주교 성지 무을 안곡리

 

 

■ 무을 안곡리에 조선의 보고가 묻혀 있다

<단독보도> 역사 속에 묻힌 천주교 성지

 

<2009년 1월 30일자> 구미시 무을면 안곡리가 최근 들어 조선시대의 보고寶庫로서 집중적인 조명을 받고 있다. 무을 생태공원 조성과 함께 조선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알려진 우물이 복원되기 시작하면서 안곡리에 묻혀 있는 조선의 역사가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특히 천주교 교우촌과 최양업 신부가 안곡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성지로서의 가능성까지 열어놓고 있다.

안곡리의 또 다른 이름 안실安室은 설핏 보아도 이곳에 역마촌이 있었음을 짐작케 해 준다. 지명이 말해 주듯 안곡리에는 조선시대 한양으로 가는 길목으로 개령, 양천역과 상주 청리역을 이어주는 안곡역이 있었다. 김천찰방 관할이었던 당시 안곡역은 중마2필, 하마4필, 역리 62인, 노 20인, 비 5인을 거느린 경북도 서북쪽의 주요 역중의 하나였다.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는 선비들과 나들이객들이 우물을 마시고, 말의 짐을 풀어 쉬어가곤 했던 이 곳에는 당시의 역사를 증빙시켜주는 우물물이 지금도 남아 있어 아련한 역사의 향기를 느끼게 하고 있다. 아울러 우물가를 둘러친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안곡 역사의 그윽함을 뒷받침해 준다.

안곡역이 있던 안곡리에는 지금도 조선시대의 대문호 2명과 박해받던 천주교의 역사의 단편이 살아 숨쉬고 있다.

특히 안곡역의 역사와 함께 조선의 숨결을 가다듬은 안곡리가 최근들어 집중적인 관심을 받는 이유는 천주교 선교 초기 교우촌이 있었고, 1850년대 2년 동안 이곳에 거처한 2대 신부인 최양업 신부가 16,17번째 서한문을 작성하여 르그레 주아 리부이 신부에게 편지를 보낸 역사성 때문이다.

조선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사제가 된 최양업 신부의 생애는 오랫동안 김대건 신부의 활약과 순교에 묻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최양업 신부가 한국 천주교 역사에 남긴 발자취는 김대건 신부에 못지 않을 만큼 소중한 가치로 평가되고 있다.무엇보다도 최 신부는 1842년부터 1860년까지 거의 매년 보고 듣고 체험한 내용을 유창한 라틴어로 써서 스승 신부들에게 19통의 서한을 통해 보고 하했다. 이중 16,17번째 서한문을 안곡에서 작성했다는 점은 주목할만한 역사적 사건이 아닐수 없다.

이와함께 최양업 신부가 1850년대 안곡리에서 2년동안 거처했다는 점은 천주교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다. 천주교의 역사에 있어 1950년대는 가장 박해가 심했던 무렵이었고, 이 당시 최신부는 5개 도에 걸쳐 100개가 넘는 광활한 전교 지역을 돌아야 했기에 7,000리를 걸어야 했다.신자가 둘이나 셋밖에 없는 공소도 마다하지 않고 방문하였고, 다섯 가구의 신자집을 방문하기 위해 사흘길을 걷기도 하였다. 계속되는 박해를 피해 깊은 산골에 숨어사는 신자들을 찾아다닌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1852년부터 1854년 사이의 사목활동은 체포의 위기, 공소의 습격 등의 잦은 박해 속에서 이루어졌고,선교사들 중 가장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 최양업 신부는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12년간 온갖 고난과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사목한 덕분에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1861년 6월 15일, 영남지방 전교를 마치고 주교에게 사목활동 상황을 보고하려고 상경하던 도중 경상도 문경에서 갑자기 쓰러진 최신부는 40세의 아까운 나이로 사망했다. 이 기간 동안 최신부는 안곡리에 2년여를 머물렀던 것이다. 따라서 안곡리 어디엔가는 최신부가 머물렀던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 확실하다.

이처럼 무을면 안골리는 역마촌과 교우촌, 퇴계 이황과 무릉도인 주세봉 시인, 최양업신부와 함께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와 나들이객들의 숨결이 면면히 살아 숨쉬고 있는 조선 역사의 보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특수 선점해야 구미 미래 있다

<단독보도>제2의 한국 민속촌 구미 건설하자

 

<2014년 10월9일자> 중국 특수 선점으로부터 구미의 미래 성장 동력을 찾아야 한다. 건강한 육체와 건전하고 풍부한 정신을 가져야만 국가와 사회의 재목이 될 수 있는 법이다. 구미는 산업과 문화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를 시의 적절하게 활용해야 한다.

머지 않아 내한하는 중국 관광객이 수천만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도 불구하고 구미에는 한국 근대화의 상징적인 도시에 걸맞는 산업박물관 하나 없다.

중국에서 가장 추앙받는 등소평과 동격의 예우를 받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관광화 작업도 빈곤하기 짝이없다. 중국인들이 비 정치인으로서 가장 추앙받는 왕희지에 버금가는 고산 황기로 역시 구미출신이지만 유산과 유물은 빛을 바래고 있다.

문화를 대외에 알리려면 깊은 고민과 관심이 필요하다. 외국인들에게 안내 도우미 역할을 하는 안내판 역시 허술하기 짝이 없다. 실례로 미국에서 수십년간 학문을 연구하다가 귀국한 미국 국적의 한국인이 박정희 대통령 생가 안내판에 대해 비판을 쏟아낼 정도였다.

선산읍 낙남루 앞을 비롯한 주요 도로변의 박정희 대통령 생가 안내판의 영문은 로 표기가 잘못됐다는 지적이었다. 생존해 있는 전직 대통령은 < Former President >인 반면 작고한 전직 대통령은 가 정확한 표기라는 것이다.

어학 사전에 역시 Former President는 생사유무를 떠난 전임 대통령, Late President는 작고한 전직 대통령으로 풀이해 놓고 있다.물론 다양한 주장이 있겠으나, 미국사회의 언어관습을 꿰뚫고 있는 미국 국적의 한국인의 지적이 그릇되어 보이지 않는다. 외국인들에게 작고한 전임 대통령과 생존해 있는 전임대통령에 대한 인식은 그 향수성과 역사성에 의미를가감시켜 줄 수도 있기 때문에 중요한 대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문화의 본향 구미를 위한 대규모 프로젝트 구상해야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다. 역사적인 유물을 가치화 하려는 노력은 관광문화로 접목되고, 그 관광으로부터 벌어들이는 부가가치가 미래 구미를 먹여살리는 성장동력으로 진화, 발전해 나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세계사적인 추세이기 때문이다.

본지는 새마을 테마파크 프로젝트가 가시화 되기 이전인 지난 2002년부터 줄곧 농촌지역이면서 새마을의 원형을 갖추고 있는 선산지역을 선정해 수백만평의 새마을촌을 조성하자고 제의했었다.관광특수를 불러들여 도농 통합으로 상대적인 경제적, 역사적인 박탈감에 빠져 있는 선산지역에 부를 가져다 주고 동시에 구미의 미래 성장 동력을 갖추자는 의미였다. 그러나 훗날 이러한 필자의 제의는 새마을 테마파크로 변형돼 가시화되었고, 사업 규모 역시 1천 수백억원에서 수백억원대로 축소됐다. 심지어 경북도는 부지매입비 172억원을 구미에 떠다맡기면서 그렇쟎아도 매년 200억원 이상의 무상보육비와 양육수당을 부담해야 하는 구미를 난처한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다.

풍부한 문화유산은 구미를 풍부한 문화관광의 부촌으로 도약시키는 첩경이 될 수 있다. 매년 기하급수적인 증가추세를 보이면서 한국으로 몰려들어오는 중국의 특수가 기대를 걱게하고 있고, 구미는 그 특수의 중심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새마을 운동과 산업근대화를 통해 보릿고개를 극복한 중심 현장이 구미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산업화의 역사를 조망할 수 있는 구미산업박물관 건립이 조기에 가시화 될수 있도록 해야 한다. 새로운 관광명소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둘째, 새마을 테마파크 조성과 별도로 선산지역 중 새마을 원형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을 선정해 1970년대의 새마을촌을 복원함으로써 역사성을 배가시켜 주어야 한다. 문화관광에는 진한 역사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이를 농촌 정비사업과 연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 탄소제로 교육관을 자연보호 기념관으로 개명하든지, 행정적인 폐쇄의 관습 때문에 해결할 수 없다면 21세기 인류의 새로운 화두로 부상한 녹색운동의 본향이 구미가 될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연보호 기념관을 별도로 건립하고, 이를 자연보호 발상지인 금오산 대혜폭포와 연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넷째,상모동에서 구미초등학교까지의 구간에 걸쳐 소위 <박정희 학교길>을 복원하고, 여기에다 스토티 텔링을 가미시키는 등의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구미에 산재해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정치적, 태생적 발자취를 찾고, 이를 세상에 알리려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낙동강 최초 교량인 구, 일선교, 경북최초 가공 농산물 수출 가공공장이 있었던 원평동 (지금의 강남병원 인근)등 구미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발자취가 묻혀 있던 곳이 무수히 있다. 이들을 복원해 벨트화 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 구미, 대기업 보다 더 큰 자산 있다

<단독보도> 후삼국 통일의 역사적 현장은 지산동 발갱이들

<2014년 11월 26일자>굴뚝산업과 굴뚝없는 산업을 조화시키는 것이 구미 미래의 먹거리가 될 수 있다는 여론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국 산업화의 현장인 구미에는 여타 지자체들이 부러워하는 문화유산이 광범위하게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들어 후삼국 통일의 현장인 지산앞들인 발갱이들 일대를 대상으로 한 후삼국 통일문화제를 구미시의 대표축제로 태생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미, 삼국통일의 현장인 논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향토축제인 60년 전통의 백제문화제 일원으로 참여해 황산벌 전투를 재현하면서 관광가치를 재고시키고 있다.

따라서 936년, 발갱이들이 후삼국 통일의 현장이 되기까지 2년 동안 왕건이 견훤(아들 신검)과 대적하기 위해 전열을 정비했던 해평면 냉산(태조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선산읍 생곡리 앞 낙동강 연안부터 고아읍 관심리, 괴평리의 앞들과 지산동 앞들을 대상으로 후삼국 통일의 길을 스토리텔링화 한 가운데 만들고, 후삼국 통일의 현장을 재현하는 내용의 후삼국 통일문화제를 탄생시킬 경우 막대한 부가가치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여론이다.특히 낙동강변을 대상으로 시가 추진하고 있는 <낙동강 7景6樂 리버사이드 프로젝트>와 접목할 경우 효과의 극대화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호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관광산업은 대기업 하나를 유치하는 것 이상의 부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외국의 도시들은 보여주고 있다. 실례로 괴테의 도시 프랑크 푸르트는 괴테의 생가 문화를 포장해 관광산업을 발전시켜 나가면서 한 도시가 먹고사는 먹거리를 창출하고 있다. 또 문화 유산이 전무하다시피한 미국 뉴욕은 로마나 파리처럼 역사적 유적으로 유명한 도시도 아니고, 스위스처럼 빼어난 자연환경으로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곳도 아니지만 없는 문화유산을 개발하고 이를 포장해 상품화 함으로써 4000만명의 내국인과 1000만명 이상의 외국인이 찾는 세계적 관광지로 명성을 높이고 있다.

한편 뜻있는 시민들은 문화예술과 명칭을 문화 관광과로 개칭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예술은 문화의 하위 개념이다. 과를 신설할 당시부터 문화과라고 했어야 옳다.따라서 차제에 문화 관광과로 명칭을 바꾸고, 부서안에 가칭, 후삼국 통일 문화제 T/F을 구성, 운영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렇다면 936년 후삼국 통일을 이루기까지 선산읍 낙동강변과 고아읍, 지산동 앞들에서는 어떤 전투가 전개되었을까.

지산동 앞들은 발갱이들이라고 불린다. 이 명칭의 시초는 발검(拔劍)들이다. 칼집에서 칼을 뽑았다는 의미가 바로 발검이다. 고서에 따르면 935년 지금의 선산읍 생곡리 앞 낙동강 연안에 있던 견훤을 무찌른 왕건은 마지막까지 항전하는 견훤의 아들 신검을 쫓기 시작했고, 이듬해인 936년 지산동 앞들에서 신검을 격퇴시켰다.

칼집에서 칼을 뽑은 (발검 拔劍) 왕건이 신검을 격퇴시킨 지산동 앞들인 발갱이들은 바로 후삼국 통일의 현장인 것이다.

▶후삼국 전투

918년 궁예를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고 권력을 쥔 왕건은 927년,견훤과의 팔공산 동오수 전투 (桐藪동수전쟁)에서 대패한 후 선산지역으로 후퇴해야 했다.

전열을 가다듬은 것은 8년 후인 935년이었다. 왕건은 그동안 지금의 선산인 당시 일선군 냉산(태조산)에 숭신산성 (崇信山城)을 쌓고, 그 아래의 낙산동 일대에 군창( 軍倉)을 일곱 개나 지어 군량을 비축하는 등 장기전을 마무리했다. 낙산동 일대를 칠창리(七倉里)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전열을 가다듬은 왕건은 그해 선산읍 생곡리 앞〔지금의 일선교 근처, 속칭 어성정 禦城亭〕 태조방천으로 불리는 낙동강 연안에서 견훤과 후삼국 통일을 위한 싸움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935년 선산 전투는 8년전 분루를 삼켜야 했던 팔공산 동오수 전투의 악몽을 말끔히 씻어낼 수 있었다. 선산에서 대승을 한 왕건은 이듬해인 936년 여세를 몰아 견훤의 아들 신검과 고아읍 관심리 앞들에서 제1차 결전에 들어갔다. 당시 왕건이 신검을 막기 위해 주둔한 관심(官心)평야는 어검(禦劒)평야, 지금은 어갱이들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아울러 괴평동 앞뜰에 진을 쳤던 신검의 진지를 왕건이 점령한 후부터 이곳은 점검(占劒)평야 즉 점갱이들이라고 불렸다.

어검들 전투에서 패배한 신검은 936년 인접해 있는 지산동 앞들과 사기점(신평2동)으로 피신했고, 이곳에 미리 도착해 진을 치고 있던 왕건은 신검을 사로잡고 그를 굴복시켰다. 결국 이곳은 당시 칼집에서 칼을 뽑고 신검을 격퇴시켰다는 의미에서 발검(拔劍)들이라고 했고, 이후 발갱이들로 불리기에 이르렀다.

 

 

■금오산이 월출산에 뒤질 이유없다

<단독보도> 국립공원 승격 여론 탄력

 

<2009년 4우러 18일자> “금오산이 월출산에 비해 뒤질 이유가 없다”는 말이 구미시민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1973년 3월 해발 809미터의 월출산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이후 15년만인 1988년 6월 국립공원으로 승격된 것을 두고 하는 말로서 그 이면에는 금오산을 국립공원으로 승격시켜야 한다는 강한 주문이 내포되어 있다.

중국의 오악 가운데 하나인 숭산에 비해 손색이 없다는 이유로 남숭산, 산의 동쪽에서 바라보면 사람의 누워있는 형상을 띠고 있다고 해서 와불산 혹은 거인산으로 불리면서 구미시, 칠곡군 북삼면, 김천시 남면 경계에 걸쳐 있는 해발 977미터의 금오산은 월출산보다 3년 빠른 1970년 6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도립공원으로 지정 되었다.

국립공원 지정 요건 중 역사적 유물과 자연경과 조화 및 보존 가치의 경우 금오산은 여타 국립공원이 갖지 못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도 금오산은 자연보호 발상지라는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현 정부의 녹색뉴딜정책이나 저탄소 녹색성장과도 일맥상통한다. 지난 1995년 11월 10일 제12회 구미시의회 임시회에서 당시 곽용기 의원은 구미출신 박정희 대통령이 금오산을 방문, 마구 버려진 쓰레기와 깨진 병 등을 줍는 것이 발단이 되어 자연보호가 사회적인 문제로 제기되었고, 이에따라 전국적으로 민간단체인 자연보호위원회가 구성되어 1978년 10월 5일 자연보호헌장이 발표되었다는 점을 중시, 자연보호 발상지라는 것을 기념하고 자연보호의 중요성을 국민운동으로 승화발전시켜 나갈수 있도록 하기 위한 표적비 건립을 주문했다. 이후 시는 금오산 잔디광장에 ‘ 자연보호운동 발상지’라는 표적비를 건립했다.

산정에는 고려시대에 천연의 암벽을 이용해 축성한 길이 3.5㎞의 금오산성이 있다. 이성은 ,



경북문화신문 기자 / gminews@hanmail.net입력 : 2015년 06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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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인
이양호 청장은 바로 선산 옥성면 덕촌리 출신임
덕촌초등학교 출신이고.
06/23 11:20   삭제
이시우
정말 공감가는 글입니다
우리 구미시는 아직 관광과나 문화과가 별도로 없는게 너무나 안타깝습니다.시장님이나 시의원님들이 좀 더 보는 시야가 넓으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ㅉㅉ 농촌진흥청장이신 이양호님은 우리 지역출신이신거 같은데 확인 좀 해주시길
06/22 17:49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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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억원. 가본 사람이 5만명이면 인당 1만원. 그 만큼의 가치를 주나요? 구미 연간 예산 2조원. 구미시민 40만명. 시민 1명당 5백만원. 난 왜 구미시의 공공서비스를 연간 10만원도 못받는 느낌이지?
금오산 정상 케이블카 설치가 추진되곤 했나보군요. 산은 '걸어 올라갈 수 있는 자' 들에게 문을 열어주게 두면 좋겠군요. 저는 딱 한번 ^^. 전국에 우후죽순처럼 지자체 케이블카 사업이 추진됐는데... 돈 버는 곳은 '여수 해상케이블카', '남산 케이블카' , '설악산 케이블카' 정도라고 하는군요. 나머지는 모두 극심한 적자라고... 좀 지난 기사기는 하지만... 혹 금오산에 케이블카 눈독들인 정치인 계시다면 조심하시는게... ^^
구미에 이런 오랜 역사가 있었군요. 취재에 고생하셨습니다.~
국립오페라단이 구미에서... 와우~. 관람료도 적당히 책정했군요. 정말 구미에서 만나기 쉽지 않는 기회인 것 같습니다. 가보고 싶군요. 강추!!
구미는 별천지군요. 민주당이 다수인 국회 관련 기사인가? 하다가 보니... 구미시 의회로군요. 전국구에서 힘 못 쓰고 구미에서 '안방 여포' 하려는건지. 시의회가 어찌... 에휴.
오폐라 중 가장 위대한 작품은 모짜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오페라의 전편이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입니다. 구미에서 만나기 쉽지 않은 공연입니다. 강추!!
대통령과 악수하는데 이철우 도지사가 뒷짐지고 악수하데. 주려던 떡도 도로 거두겠다.
너거들이 무능한게 아니고?
국가산단 경쟁력 강화와 지역 정주여건 개선을 위해 KTX 구미역 정차? 나같으면 "구미 오시느라 오래걸려서 고생하셨을 겁니다. 기업의 직원과 협력사 직원들이 출장 다닐 때 이렇게 교통 시간이 많이 걸리니 불편할 뿐 아니라 산업경쟁럭도 악화됩니다. 해외법인이나 글로벌 파트너사에 시간을 다투는 출장가려고 인천공항에 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랬을 것 같다. 말에는 초점이 있어야한다. 정주여건이야 그냥 시장이 알아서 하거나 경북지사와 얘기해도 될 일.
근대 그때 다부동 방어선 있고 가산 대구 방향은 국군, 유엔군 지역이고 구미 선산 왜관은 북한군 점령지이고 다부동 진출의 교두보인데 후방폭격은 당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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