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 기자·데스크

김종길의 구미 근현대사] `국민보` 상모동 출신 박정희, 혁명지도자로 소개

김종길 시니어 기자 / 입력 : 2024년 04월 12일
↑↑ 김종길 시니어 기자
ⓒ 경북문화신문
혁명지도자 박정희 약전
국민보 1961-11-22 WEDNESDAY
국민보 제三千五百七十七호

서울역에서 경부선을 타고 수원, 천안, 대전을 지나 경상북도 땅에 들어서 대전과 대구 중간되는 곳에 [김천]역이 있다. 이 김천역에서 서너 정거장 더 가 [구미]라는 역에서 내리면 서쪽에 금오산이 세차게 날개를 뻗치고 우뚝 솟아 있으며, 이 금오산 기슭에 九○여 호의 농가가 옹기종기 등을 기대고 사는 [상모]라는 촌락이 있다. 지난날에는 [부지동]또는 [모로동]이라고도 불렀다는데 [모르겠다]라는 어원에서 나왔다고 한다더라. 옛 노인들이 (운심부지처)라 용이 있기는 있는데 구름이 깊어 갈 수 없다 하여 이렇게 동리 명을 불렀다는 것이다.

六, 二五 전쟁 전만 하더라도 (운심루)라는 누각이 있어 글 하는 노인들의 모임터가 되어왔다고 한다. 금오산은 일찍이 명산으로 알려져 있으며 (구미) 서쪽에 불끈 솟은 산 속에 거세게 남으로 뻗쳐 문필봉, 열녀봉, 효자봉을 이루고 있다. 상모리는 바로 효자봉 메뿌리가 흘러내린 기슭에 부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씨가 태어난 생가는 바로 이 부락 막다른 골목에 위치한다. 금오산의 주령이 필경 이곳인 모양이라. 동리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뒷산에 오르면 금오산 줄기가 안고 돌아갔으며 앞에는 멀리 낙동강이 구비쳐 흐르고 그 저쪽엔 태백산맥이 줄기차게 뻗고 있다. 산수를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미상불묘하게 위치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一八九四년 동학란이 일어나 세상이 어지럽고 一九一○년 한일합방이 있은 지 十二 년 되는 해이다. 동학란이 경상도를 휩쓸었을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운 공으로 조정으로부터 무과 벼슬을 받아 영월군수를 지낸바 있는 박성빈씨를 엄친으로 자당 백남의씨는 단산한 줄 알았던 터에 배가 불러 이웃이 창피타 하여 배 안의 아이를 떨구고자 간장 두 종기를 마셨으나 끝내 낳게 되었다는 막내둥이다. 실상 떨구고자 했던 아이가 낳고 본즉 막내둥인 관계도 있었겠지만 굉장히 정을 쏟더라는 것이다. 즉, 기미년 삼일운동이 일어나기 전전해인 一九一七년에 났으며 당시 엄친의 나이는 五四세요. 자당의 나이는 四四세였다.

엄친 박성빈씨는 산기슭의 건답 여덟 마지기로 생계를 이루어 나가는 자작농으로 동리에는 집집마다 감나무가 한 두 그루 서 있고 농기구로 제각기 갖추고 큰 부자도 없었을 뿐더러 그렇다고 절량농가도 없던 모양이다. 상모동 어린이들은 이곳서 시오리 떨어진 구미 보통학교에 다니어야 하였다. 겨울이면 눈이 무릎까지 쌓이는 길을 푹푹 빠지며 학교 길을 재촉해야 되었다.

박정희 소년은 남보다 키가 작았으며 가냘픈 편이었다. 동리 아이들은 모두들 떼를 지어 학교까지 오고가고 하는 것이었으나 박 소년만은 혼자서 걸었다. 이와 같은 행동을 하는 어린 것을 볼 때 동리사람들은 이상한 아이라고 유심히 보는 것이었다.

필요치 않은 말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말을 하면 침착하고 조리있게 어른다운 언동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예 말이 없는 고독한 소년이었다고 할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와 할 일이 없으면 뒷산에 올라가 목검을 만들어 갖고 혼자서 나무등을 치고 칼 쓰는 흉내를 내는 것이 유일한 취미었던 것 같다. 이런 것을 보는 어머니는 [쟤는 커서 군인이 될라는가부]하고 혼잣말을 하는 것이었다.

학교성적은 맡아 놓고 일등이었고 졸업할 때까지 급장 노릇을 했다. 간혹 선생의 꾸중을 듣는 일이 있었으나 그는 표정 하나 고치지 않고 변명을 늘어놓는 일이 없었다. 묵묵히 자기가 옳다고 판단한 대로 행동할 뿐이다.(미완)

이번에는 신문기사만 전하기로 한다. 다만 기사를 실은 국민보를 소개한다. 국민보는 1913년 8월 1일 호놀룰루(Honolulu)에서 국민회(國民會)가 발행하던 『신한국보(新韓國報)』를 게재하여 발행한 신문이다. 이 유서 깊은 신문에 상모동 출신의 박정희가 혁명지도자로 소개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신한국보』는 당시 하와이의 교민단체가 통합되어 결성된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가 1909년 2월 1일 미국 본토 캘리포니아지역의 공립협회(共立協會)와 연합단체를 구성하여 국민회로 되면서 1907년 10월 17일 창간한 그 기관지인 『한인합성신보(韓人合成新報)』를 1909년 2월 15일 개제하여 발행한 신문이었다.

따라서, 그 후신인 『국민보』는 매호 상단에 ‘1907년 10월 17일 창간’이라는 것을 명기하였다. 체재는 타블로이드 배대판(倍大版) 4면, 7단제로 발행하였다. 처음에는 『신한국보』의 주필이었던 홍종표(洪宗杓)가 주간이었으나, 그 뒤 당시 하와이의 지도자였던 박용만(朴容萬)이 주필로서 제작에 참여하였다.

한때는 이승만(李承晩)이 그 제작의 지도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승용환(承龍煥)·김현구(金鉉九) 등 많은 정치가들이 이 신문의 중요직을 담당하였다. 1946년 12월에는 백일규(白一圭)가 미국 본토로부터 와서 약 2년간 주필을 맡았다.

이 신문은 하와이에서 우리 말로 발행된 신문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면서 독립운동과 문맹퇴치 및 지식보급 등 교민의 계몽활동에 크게 공헌하였다. 따라서, 조국과 재미교포들의 소식을 상세히 알려 주는 보도적 기능에도 충실하였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의 발발로 하와이에서 영어 이외의 모든 외국어 신문의 발행이 금지되어 1941년 12월 10일 문을 닫아야 했다.

1942년 1월 21일부터 1944년 2월 2일까지의 기간에는 국민회와 이승만계열의 동지회(同志會)가 합동으로 제호를 ‘국민보-태평양주보(Korean National Herald-Pacific Weekly)’로 고쳐서 다시 발행해 오다가 1944년 2월 9일부터는 『태평양주보』와 분리하여 다시 『국민보』로 복간하는 한편, 영문 1면을 추가하였다. 이 영문면은 1945년 1월 31일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국문판 신문을 보려는 독자의 감소로 1968년 12월 결국 폐간하고, 그 대신 국문과 영문으로 된 『국민회회보』를 발행하여 회원에게만 배포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한국신문사연구』(이해창, 성문각, 1971)
『재미한인오십년사』(김원용, 캘리포니아, 1959)
「포왜한교신문사략고」(차배근, 『신문학보』 13, 1980)
(이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김종길 시니어 기자 / 입력 : 2024년 04월 12일
- Copyrights ⓒ경북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스토리네이버블로그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개인정보 유출, 권리침해, 욕설 및 특정지역 정치적 견해를 비하하는 내용을 게시할 경우 이용약관 및 관련 법률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가장 많이 본 뉴스
김천 ‘부곡택지1호공원’ 전면 새단장..
개그맨 이선민, 구미시 홍보대사 위촉..
직접 키운 버섯, 가공식품으로 부가가치 창출...착한영광버섯마을 손광식 대표..
`정원`으로 사람과 도시, 농촌을 잇다...`가드닝브릿지교육원` 김경애 대표..
상주시 함창읍, ‘우리 아이들 옷과 운동화 지원’..
[서장우의 일상(4)]어디가 불편하세요?..
상주시 화령장전승기념관, 전국 무궁화 명소 4곳에 선정..
구미 수점동 십수 년 묵은 주민 숙원 도로 전 구간 개통..
톡 쏘는 겨자처럼, 농촌과 도시를 잇다…‘겨자식생활’ 김재훈 대표..
경북도, 관광상품 24종 최대 50% 할인...7일간..
최신댓글
미술에 문외한이지만, 선생님의 그림에서 여름의 역동성이 느껴집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몰랐던 것 배우게 되네요. 멋진 조상의 유산 배우고 갑니다.^^
라면 먹으러 축제에 가야겠군요. 타지 방문객 통계도 한 명 더 올리고. ^^
벚꽃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장미처럼 유명하지 않아도, 낮은 곳에서 저마다 작은 결실 피워내는 식물들의 위대함을 느낍니다. 냉이꽃처럼...
선산봉황시장의 2층은 현재 어떻게 되었을까요? 좋은 결과를 지속적으로 내고 있을까요? 궁금합니다.
음악으로 보자면 어설픈 공연자 2백만원씩 5명 보다는 유명한 1명이 공연의 질을 더 높일 수 있죠. 그런데 스티븐 해링턴? 누가 아시나요? 그냥 행사 추진자가 좋아하는 사람 아닌가? 지역 예술가들을 우대하되 기준을 객관화해서 정치인이나 지방권력자 친분으로만 하지 말고요.
지역의 예술가들이 함께하고 성장할 수 있는 정책 집행이 아쉽군요. 음악이건 미술이건... 너무 외국 유명인에게 기대는 것은 좀... ㅠ.
건강하셔서 좋은 글 많이 주시기 바랍니다.
5억원. 가본 사람이 5만명이면 인당 1만원. 그 만큼의 가치를 주나요? 구미 연간 예산 2조원. 구미시민 40만명. 시민 1명당 5백만원. 난 왜 구미시의 공공서비스를 연간 10만원도 못받는 느낌이지?
금오산 정상 케이블카 설치가 추진되곤 했나보군요. 산은 '걸어 올라갈 수 있는 자' 들에게 문을 열어주게 두면 좋겠군요. 저는 딱 한번 ^^. 전국에 우후죽순처럼 지자체 케이블카 사업이 추진됐는데... 돈 버는 곳은 '여수 해상케이블카', '남산 케이블카' , '설악산 케이블카' 정도라고 하는군요. 나머지는 모두 극심한 적자라고... 좀 지난 기사기는 하지만... 혹 금오산에 케이블카 눈독들인 정치인 계시다면 조심하시는게... ^^
오피니언
마중 나온 아들의 차를 타고 병원으로 달려간다.. 
평소 다니던 정형외과 의원에서 문자가 왔다.".. 
<작가노트> '새마을'이라는 이름은 오래전 .. 
8월의 마지막 일요일이다. 간간이 비가 내리는.. 
여론의 광장
방통대 중문과 한시 모임 ‘불역시호’, 구미서 여름 캠프 개최..  
LG두드림봉사단, 취약계층 1인 가구 위해 `보람찬 한 끼` 나눔..  
국립금오공대, 집단연구 기초연구실지원사업’ 선정..  
sns 뉴스
제호 : 경북문화신문 / 주소: 경북 구미시 지산1길 54(지산동 594-2) 2층 / 대표전화 : 054-456-0018 / 팩스 : 054-456-9550
등록번호 : 경북,다01325 / 등록일 : 2006년 6월 30일 / 발행·편집인 : 안정분 / 청소년보호책임자 : 안정분 / mail : gminews@daum.net
경북문화신문 모든 콘텐츠(기사, 사진, 영상)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며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Copyright ⓒ 경북문화신문 All Rights Reserved.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요강을 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