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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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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저트는 메인 요리와 조화를 이루며 식사의 품위를 높여주는 일종의 장식적 혹은 보조적 메뉴이지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은 아니다. 그러나 소위 말하는 ‘훌륭한 식사’에서 디저트가 빠진다면 그것을 '성찬'이라 말할 사람도 없다. 우리 삶에서 예술은 디저트와 같은 존재다. 먹고사는 것과 크게 관련이 없어 보이는 예술, 몰라도 사는 데 지장 없지만 예술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인다면 작게는 나의 패션, 나의 자동차, 나의 사무실과 집을 꾸미는 일부터 시작해 주변의 소소한 것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아주,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예술이 아우르는 세계는 의외로 광범위해서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감흥을 느끼는 것뿐 아니라 사소한 것, 일상적인 것, 타인이나 나 이외의 세계에 대한 배려와 관심 등 우리가 예상치 못한 정신적 풍요로움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예술은 일상 속에, 우리의 삶 속에 늘 따로 또 같이 존재한다.
예술이 곁에 있어 좋은 이유는 때론 그것들이 진심으로 위안이 된다는 것이다. 음악만 해도 그렇다. 나는 음악 CD를 상황별, 감정별로 구분해 재편집한다. <이보다 더 좋은 수 없다>에서 잭 니콜슨에게 배운 노하우다. 우울할 때 듣는 음악, 분위기 잡고 싶을 때 듣는 음악, 드라이브할 때 듣는 음악, 한밤중에 고요하게 듣는 등으로 나만의 음악 리스트를 엄선하고 업데이트한다.
책 역시 뇌의 노동을 필요로 할 때 역사 추리 소설집을, 인간에 대한 실망으로 괴로울 때는 소설책을, 자유가 그리울 때는 여행 책을, 쉬고 싶을 때는 가벼운 인문학 서적을 집어 들기 쉬운 자리에 배치한다. 휴일이면 그저 뒹굴뒹굴 소파에서 빈둥거리는 가장도 실은 드라마나 다큐멘터리, 영화(심지어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조차) 등에서 시즌 트렌드와 인간에 대한 이해, 시각적인 즐거움이 주는 묘미에 푹 빠질 수 있다.
그래서 뭐가 달라지냐고? 스스로 감정을 편집할 수 있는 묘미가 있다. 우울할 때는 슬며시 내 감정으로 밝은 분위기를 투입할 수 있고, 최소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감정의 결을 잡을 수 있다. 그것이 주는 안도감과 즐거움은 느껴본 자만이 알 수 있다. 카페나 갤러리에서 힐끗 본 그림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잔영이 남는 것도 감사하고, 택시 안에서 우연히 들은 클래식 음악 한 소절이 운전기사의 얼굴을 백미러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만든다. 예상치 못한 음악적 취향이 그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이토록 예술은 멀리 느껴지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의 빛을 은근하게 발하고 있다. 다만 그것을 피부로 체감하거나 깨닫지 못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예술을 생산하는 사람에 대한 편견은 없는가? 우리는 예술가들을 별스러운 사람,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으로 오해 아닌 오해를 하고 거리감까지 가지고 갖고 있다.
그들의 창의적인 결과물보다 작업 과정이나 포지션으로 재단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난 집단으로 생각한다. 화가, 작가, 음악가, 작곡가, 가수, 연기자….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나의 음악 리스트도, 책 리스트도, 페이보릿 영화 리스트를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이것이 공기처럼 없으면 살 수 없는 것도 아니지만 예술이 없으면 견디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생활 속에서 어떤 사물이나 건물이 멋지다고 느끼고,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보고 감동하는 것, 내 옷을, 내 차를, 내 집을 아름답게 가꾸고자 하는 생각과 행위가 예술 활동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볼 수 있는 계절이 다가왔다. 사실 예술이라는 게 뭐, 별거냐? 그저 삶 속의 공기처럼 생활 곳곳에 존재하는 것, 내 인생의 달콤한 디저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