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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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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 서유럽의 좌파 정당들은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 물결에 대응하기 위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 평등과 사회정의라는 사회민주주의의 전통적 이념을 자유 시장을 토대로 하는 경제 시스템에 접목하는 방안을 찾아 나선 것이다. 특히 1989년에 일어난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사회민주당과 노동당 내에서 좌편향적인 진영의 움직임을 어렵게 만들며 우파 성향의 실용주의자들의 목소리를 두드러지게 하였다. 즉 좌파 정당 내에서도 신자유주의적 물결에 편승하되 당의 전통적인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새로운 방향으로의 흐름을 유도해야 할 것이라는 주장이 더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 흐름에 따라 ‘제3의 길’이 등장하였으며, 그것은 어떻게 보면 사민주의 입장에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선택이었던 셈이다. 왜냐하면 사회민주주의의 가장 효과적인 무기였던 국가의 힘을 세계화가 빼앗아 버리며 정부의 손발을 묶어 놓았기 때문이다.
새롭게 등장한 ‘제3의 길’은 이데올로기의 추구는 이제 지나간 시대의 산물이라 여기며 '지금 사회의 특징은 계급의 분단이 아니라 ‘복잡한 다양성’이며, 정치는 이제 계급의 지배나 사회변혁을 놓고 투쟁하는 장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였다. 앤소니 기든스는 투쟁의 정치는 ‘생활정치(life politics)'로 바뀌었고 ‘생활정치'의 진정한 관심은 자율성과 자기표현에 관한 문제에 있음을 말하였다.
‘제3의 길’이 등장하면서 정치는 사상과 이념의 문제에서 인물의 문제로 넘어갔다. 책임성을 갖춘 정책보다는 여론을 잘 가공할 수 있는 전문가가 정책분석가의 자리를 차지하였으며, 미디어 전략이 정당의 중요한 방법이 되었다. 대담한 개혁은 사라지고 이미지 관리가 중요해졌으며, 행동을 선택하는 것보다 말을 선택하는 것이 더 중요해 진 것이다. 실질적인 차이가 없어진 기존의 정당들은 원리원칙에 충실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보다는 출세주의자들과 기회주의자들을 영입하려는 것에 더 큰 목표를 두었다. 정치적인 목적의 실현이나 사회의 변혁보다는 실존의 가치가 정당을 위해서 더욱 중요한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앤소니 기든스는 다시 이렇게 표현하였다. “오늘날 정치적 이념은 사람들의 문제의식을 일깨울 능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이며, 정치 지도자들은 지도할 능력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새롭게 출범하는 민주통합당은 지도부 경선에 ‘80만 선거인단’의 참여를 확정하면서 시민선거인단으로 64만여 명의 일반 시민을 구성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64만여 명의 신청자가 어떠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선거인단에 가입한 이유가 무엇인지, 또 누구를 지지하는지는 파악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한나라당도 이미 쇄신방향으로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면서 20대의 젊은 청년을 영입하였으며, 4월의 총선에서는 젊은 층으로 대거 물갈이를 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양당의 이러한 전략은, 젊은 층의 다양한 시각을 반영하고 국민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정치를 위해서라지만 실은, 작년에 치러진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2030 젊은 세대의 정치적 영향력과 방관자에 불과하던 군중의 힘을 학습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트위터를 비롯한 정보화 정치의 파장을 혹독하게 경험함으로서, 득표 활동에 도움이 될 수단의 목적이 엿보인다는 것이며, 선동에 따른 동원으로서 흥미를 유발하려는 '꼼수'의 냄새가 더 진하게 풍긴다는 것이다. 참여 정치의 측면에서 이것은 정당의 진화된 형태로도 생각할 수 있지만, 궁지에 몰린 기성 정치권이 위기를 탈출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시각이 더 지배적이다. 맑스 베버가 지도자의 자질로서 말한 자신의 열정을 사회적 객관성과 결합 시킬 수 있는 정치나, 책임 있는 신념의 정치와는 한참 거리가 있는 행위인 것이다.
이처럼 정치가 ‘쇼’가 되고 지도자가 ‘배우’가 되는 것을 요구하는 상황은 이번이 처음인 것은 아니다. 민주화 이후 우리의 정치는, 자신의 목적을 대중에게 호소하고 대중이 그에 호응해서 지지하는 단계를 떠나 인기와 관심을 얻는 것이 최선의 방법인 것처럼 진화해왔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시하고 그에 따른 책임의 분담을 요구하는 본질적인 정치는 사실 우리에게서 점차 멀어져 간 것이다. 올바른 신념을 보이기보다는 분주하게 움직이며 사람들의 본능적인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이 ‘열정’으로 되었으며, 책임이 있는 행동을 선택하기 보다는 화려한 수사를 구사 하는 언어의 기술이 ‘의지’로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지금의 사회는 수탁자로서의 지도자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단지 우리의 정치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단순한 대리자의 기능만 수행하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차라리 다가오는 총선에서는 아까운 시간과 비용을 낭비할 필요도 없이 어느 정도 자격을 갖춘 사람을 골라 그 중에서 추첨을 하는 방법은 어떨까? 아니면 화끈하게 4월 11일 출생자 중에서 제비뽑기를 하든지.
흥미와 인기로 대중의 관심을 이끌려는 정당들의 몸부림을 보면서, 정치의 본질을 망각하고 화려함을 쫒다 대중의 지지에 실패한 ‘제3의 길’을 떠올리는 것이 혼자만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곱씹어 보는 히틀러의 지나간 이야기가 영 새삼스럽지 않는 것은 한낱 기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모든 선동은, 대상으로 삼은 대중 가운데 가장 지적 수준이 낮은 집단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성공이라는 기준에 비출 때 내용의 진실성이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말 공감 백배입니다. 김의원님의 칼럼이 오랫만에 속을 후련하게 해 줍니다. 항상 화이팅 하세요 ^^*
01/12 18:28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