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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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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약천 남구만선생은 성주목사 이시현이 그의 고조부 백사 이항복이 임금의 물음에 대하여, 의견을 개진한 손수 쓴 글을 첩자로 만들어 자손들이 오래 보존하여 지킬 것을 도모하기 위해서, 모각하여 목판에 새긴다고 하였다. 수초는 보지 못하고 인쇄본을 보았는데, 충의롭고, 정대한 기운이 일월과 광채를 다툴 만함을 오히려 여기에서 상상해 볼 수 있었고, 이항복선생의 글씨가 세상에 유포된 것이 많으나 이 글씨는 굳세고 힘차고 용맹하여 다른 것에 비해 더욱 새로우니, 아마도 보는 자의 감회가 더욱 깊어서 그런가? 라고 말하고 그러나 필체의 높고 낮음을 또 어찌 감히 여기에서 덧붙여 논할 것이 있겠는가. 전에 일찍이 북쪽으로 함관령에 올라가 보니, 바로 이항복선생이 이 의논을 올린 뒤에 쫓겨나 유배가면서 지나간 곳이었다. 북쪽 지방 사람들은 아직도 이항복선생이 고개를 지날 때 서글픈 심정을 부친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를 비삼아 가져다가 임 계신 구중심처에 뿌려 볼까 하노라.' 라는 노래를 전하며 지금까지도 외고 있으니, 지금 들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흐른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헌의(獻議)한 수초(手草)의 발문-
성주목사(星州牧使) 이시현(李時顯)이 그의 조고부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선생이 1617년(광해군 9)에 임금의 물음에 대하여 의견을 올리던 글의 수초를 첩자(帖子)로 만들어서 자손들이 오래도록 보존하여 지킬 것을 도모하고, 또 이것을 모각하여 목판에 새겨서 널리 전하였다.
이때 나는 물러나 서해(西海)의 바닷가인 홍성군 결성에 있었고 이시현은 영남의 성주에 있었으므로 수초한 첩자는 길이 멀어서 얻어 보지 못하고 다행히 인쇄본을 보았는데, 충의(忠義)롭고 정대(正大)한 기운이 일월과 광채를 다툴 만함을 오히려 여기에서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이항복선생의 글씨가 간행되어 세상에 유포된 것이 또한 많으나 이 글씨는 굳세고 힘차고 용맹하여 다른 것에 비해 더욱 새로우니, 아마도 보는 자의 감회가 더욱 깊어서 그런가 보다. 그러나 필체의 높고 낮음을 또 어찌 감히 여기에서 덧붙여 논할 것이 있겠는가.
지난해에 내 일찍이 북쪽으로 함관령(咸關嶺)에 올라가 보니, 바로 이항복선생이 이 의논을 올린 뒤에 쫓겨나 유배 가면서 지나간 곳이었다. 북쪽 지방 사람들은 아직도 이항복선생이 고개를 지날 때 서글픈 심정을 부친 “철령(鐵嶺) 높은 봉(峰)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冤淚)를 비 삼아 가져다가 님 계신 구중심처(九重深處)에 뿌려 볼까 하노라.” 라는 노래를 전하며 지금까지도 외고 있으니, 지금 들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흐른다. 초(楚)나라 회왕(懷王) 때의 충신인 굴원(屈原)의 글에 “뜬구름에게 말을 전해 주기를 원한다.”는 것과 내용은 같으나 뜻은 더욱 간절하며, 삼강오상(三綱五常)의 소중함을 더하게 만드는 것이 또한 어찌 이 헌의보다 뒤지겠는가.
그러나 가곡(歌曲)은 우리나라 말이니, 문자로 전하는 것처럼 오래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함관령에 오르던 날에 전해 오는 가곡을 외우고 운(韻)에 맞추어 사(詞)를 지으니, 그 사에, '함관령은 높고 또 높아 밤에 자고, 새벽에 날아가는 찬 구름 아득하네. 외로운 신하의 서러운 눈물 너에게 붙여 비가 되어 장안에 돌아가서, 장안의 구중궁궐 깊은 곳에 임 계신 곳 향해 한 번 비를 뿌렸으면 하노라' 하였다.
이 사의 문자는 비록 누추하고 졸렬하나 내용으로 말하면 실로 이항복선생에게서 나왔으니, 또한 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함께 이것을 써서 이시현에게 보내어 수초한 첩자의 끝에 붙이게 하는 바이다.
1676년(숙종 2) 남구만은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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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 이항복의 수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