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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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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위당 신헌선생이 일찍이 전라도 해남의 우수군절도사를 맡아 나갔을 때 스님과 더불어 노닐었다. 그 후에 녹도에 귀양 가자 스님이 산과 바다를 건너와 사귀었고, 서울로 돌아온 그 다음해 창랑정으로 나를 찾아왔으며, 스님은 불교의 경전에 정심하였고, 일찍이 나와 더불어 선종과 교종이 본시 두 가지 이치가 아님을 토론하였는데, 스님은 이를 몹시 옳게 여기며, 내게 자신이 지은 선문의 변이에 대한 글을 주었고, 나 또한 답한 것이 있었다. 스님은 시문에 뛰어났으니, 대개 정약용 공에게서 받은 것이다. 또 서화에도 뛰어났다. 사대부와 더불어 노닐기를 기뻐하였고, 신위와 김정희 등 제공과 특히 친하였다. 또한 근세의 허정혜원 조사와 선월관휴 대사의 부류이다. 일찍이 두륜산의 광명전에 거처하였으며, 그 고족 서암선기 스님 등이 스님의 영정을 보내어 내 말을 구하기에 스님의 깊은 학문과 맑은 모범은 형상으로 비슷하게 그려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지금 세상에 다시 일으킬 수도 없기에 그래서 찬문을 쓴다고 말했다.
-초의선사화상찬문-
余曾出棞蓮營. 與師遊. 後謫居鹿菀. 師跋涉嶺海而從焉. 亦再遭. 旣歸京師之翌年. 訪余於滄浪亭. 其厚於余. 而終不遺. 又可感也. 師深於玄典. 嘗與我論禪敎本無二致. 師甚是之. 示余以自著禪門辨異之說. 余亦有所答. 師長於詩文. 盖受於茶山公. 又工於書畵. 喜與士大夫游. 紫霞秋史諸公. 尤善焉. 亦近世之惠遠貫休流也. 嘗居頭輪之光明精藍. 臘八十. 其高足善機等. 委送師之影. 而求余言. 師之邃學淸範. 不可得以形似. 亦不可得以復起今之世. 噫遂爲之書.
내가 일찍이 전라도 해남에 둔 우수영(右水營)의 전라도 우수군절도사를 맡아 나갔을 적에 스님과 더불어 노닐었다. 뒤에 전라도 녹도(鹿島)에 귀양 가자 스님이 산과 바다를 건너와 종유하였는데 또한 두 번을 만났다. 서울로 돌아온 이듬해에도 창랑정(滄浪亭)으로 나를 찾아왔다.
내게 두터이 대하여 끝내 버리지 않았으니 또한 감사 할만하다. 스님은 불교의 경전에 정심하였다. 일찍이 나와 더불어 선종과 교종이 본시 두 가지 이치가 아님을 토론하였는데, 스님은 이를 몹시 옳게 여기며, 내게 자신이 지은 선문(禪門)의 변이(辨異)에 대한 글을 보여주었다.
나 또한 답한 것이 있다. 스님은 시문에 뛰어났으니, 대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공(公)에게서 받은 것이다. 또 서화에도 뛰어났다. 사대부와 더불어 노닐기를 기뻐하였고, 자하(紫霞) 신위(申緯)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등 제공과 특히 친하였다.
또한 근세의 허정혜원(虛靜惠遠) 조사와 선월관휴(禪月貫休) 대사의 부류이다. 일찍이 두륜산의 광명전(光明殿)에 거처하였고, 법랍이 80세였다. 그 고족 서암선기(恕庵善機) 스님 등이 스님의 영정을 맡겨 보내 내 말을 구하였다. 스님의 깊은 학문과 맑은 모범은 형상으로 비슷하게 그려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지금 세상에 다시 일으킬 수도 없다. 아! 마침내 이를 위해 쓰고, 다시금 찬한다. 위당(威堂) 신헌(申櫶)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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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선사의 화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