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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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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미수 허목선생은 이색의 화상이 충남 서천군 문헌서원에 있는데, 찬문은 권근이 지은 것이며, 찬문 끝에 ‘1414년 9월 하순에 문인 권근이 짓다.’ 라고 쓰여 있다. 화상은 본디 2벌로, 1벌은 치관 서대에 붉은 도포를 입었고 수염이 희끗희끗한데 지금 서원에 소장된 것이 바로 이것이며, 영당에 있는 것은 이것을 보고 그린 것이다. 또 1벌은 전야의 옷차림이니, 슬픈 일이다. 나는 일찍이 그의 유리할 때의 감회시를 외고 있었다. 고려가 멸망한 뒤에는 농부나 촌 늙은이와 다름없었으니, 그때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전해지지 않는다. 문헌서원의 것은 임진왜란 때 잃어버렸는데, 후에 어느 사신이 일본에 갔다가 찾아왔다. 일본의 한 늙은이가 사신에게 가져다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옛날 귀인의 화상이니 그의 자손에게 돌려주시오.’ 하였다 한다. 이것은 귀신이 한 일이지 사람으로서는 기대조차 못할 일이다. 옛날 그림이 긴 세월을 두고 떠돌아서 천이 낡고 찢어져 아래 부분 절반은 없어졌다. 1654년 겨울에 후손들이 화상을 서울로 모셔다 2벌을 모사하여 1벌은 태창동동지중추부사 이현영 옛집에 봉안하고, 1벌은 구본과 함께 문헌사당에 도로 봉안하였다. 바로아래 동생 인물화가인 허의가 경기도 중림에 찰방으로 있을 때 모사한 것이다. 성균관 사예 이전이 이 일을 맡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화상기(牧隱畫像記)-
문정공(文靖公)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화상이 충청남도 서천군 문헌서원(文獻書院)에 있는데, 찬문(贊文)은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지은 것이다. 찬문 끝에 ‘1414년(태종 14) 9월 하순에 문인 권근(權近)이 짓다.’ 라고 쓰여 있다. 덕산현(德山縣) 이씨의 옛집에 또 문정공 영당(影堂)이 있는데, 그 영정에 씌어 진 연월(年月)은 1514년(중종 9)으로 되어 있으니, 앞서 그린 화상의 연도가 어느 해였는지는 잘 모르나, 우리 태조임금이 선위 받던 이듬해에 공이 죽었고, 그해는 1393년(태조 2)이다. 그러니 양촌 권근의 찬문은 아마 수십 년 후였을 것이다. 1414년에서 1514년까지는 124년이고, 1393년에서 숭정(崇禎) 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는 300년쯤 된다.
화상은 본디 두 벌로, 한 벌은 치관(豸冠) 서대(犀帶)에 붉은 도포를 입었고 수염이 희끗희끗한데 지금 서원에 소장된 것이 바로 이것이며, 영당에 있는 것은 이것을 보고 그린 것이다. 또 한 벌은 전야(田野)의 옷차림이니, 슬픈 일이다. 나는 일찍이 그의 유리(流離)할 때의 감회시(感懷詩)를 외고 있었다. 고려가 멸망한 뒤에는 농부나 촌 늙은이와 다름없었으니, 그때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전해지지 않는다. 문헌서원의 것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잃어버렸는데, 후에 어느 사신이 일본에 갔다가 찾아왔다. 일본의 한 늙은이가 사신에게 가져다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옛날 귀인의 화상이니 그의 자손에게 돌려주시오.’ 하였다 한다. 이상도 하다. 이것은 귀신이 한 일이지 사람으로서는 기대조차 못할 일이다. 옛날 그림이 긴 세월을 두고 떠돌아서 천이 낡고 찢어져 아래 부분 절반은 없어졌다.
1654년(효종 5) 겨울에 후손들이 화상을 서울로 모셔다 두 벌을 모사(摸寫)하여 한 벌은 태창동(太倉洞)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현영(李顯英) 옛집에 봉안(奉安)하고, 한 벌은 구본(舊本)과 함께 문헌사당에 도로 봉안하였다.
바로아래 동생 인물화가인 허의(許懿)가 경기도 중림(重林)에 찰방(察訪)으로 있을 때 모사(摸寫)한 것이다. 성균관 사예(司藝) 이전(李䄠)이 이 일을 맡아 보았다.
1654년(효종 5) 겨울 동짓날에 외후손 양천(陽川) 허목(許穆)이 삼가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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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은 이색선생의 영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