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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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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청음 김상헌선생은 김상용형님이 돌아가신 뒤에, 평소에 써 놓은 한묵이 모두 병화에 없어져 다시는 볼 수가 없었으며 또 사람과 거문고가 함께 없어진 애통함이 이에 더욱더 심하였다. 그런데 마침 종손 김수홍이 상자 속에 보관해 두었던 서찰 몇 장을 얻어서 잘 장정하여 한 권으로 만든 다음 나에게 제하여 주기를 부탁하였다. 형님이 처음에 예원에서 노닐 적에는 글씨를 잘 쓰는 것으로 이름이 났고, 중간에는 내직과 외직을 역임하면서 정술로써 이름이 드러났으며, 말년에는 목숨을 버려 순국해 절의로써 드러났다. 그 이후부터는 글씨와 정술에 뛰어나다고 칭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어찌 절의가 글씨와 정술을 가려서가 아니겠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왕희지는 글씨가 그 사람을 가려 버렸다” 하였는데, 형님의 경우에는 사람이 그 글씨를 가려 버렸다고 할 만하다. 비록 그렇지만, 그 사람이 중하면 의당 중하지 않은 바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후세 사람에게 보이면서 이것은 아무개의 글씨라고 할 경우, 이것을 두 손으로 안을 정도로 아주 커다란 보옥처럼 보배로이 여기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서첩을 펼쳐 어루만지면서 한 번 완상할 적마다 한 차례 눈물을 흘렸다고 가록하고 있다.
-김상용(金尙容)형님의 서적첩(書跡帖)에 제하다-
김상용형님이 돌아가신 뒤에 평소에 써 놓은 한묵(翰墨)이 모두 병화에 없어져 다시는 볼 수가 없었는바, 사람과 거문고가 함께 없어진 애통함이 이에 더욱더 심하였다. 그런데 마침 종손(從孫) 김수홍(金壽弘)이 상자 속에 보관해 두었던 서찰 몇 장을 얻어서 잘 장정하여 한 권으로 만든 다음 나에게 제(題)하여 주기를 부탁하였다.
김상용형님이 처음에 예원(藝苑)에서 노닐 적에는 글씨를 잘 쓰는 것으로 이름이 났고, 중간에는 내직과 외직을 역임하면서 정술(政術)로써 이름이 드러났으며, 말년에는 목숨을 버려 순국해 절의(節義)로써 드러났다. 그 이후부터는 글씨와 정술에 뛰어나다고 칭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어찌 절의가 글씨와 정술을 가려서가 아니겠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중국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는 글씨가 그 사람을 가려 버렸다.” 하였는데, 김상용형님의 경우에는 사람이 그 글씨를 가려 버렸다고 할 만하다.
비록 그렇지만, 그 사람이 중하면 의당 중하지 않은 바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후세 사람에게 보이면서 ‘이것은 아무개의 글씨’라고 할 경우, 이것을 두 손으로 안을 정도로 아주 커다란 보옥(寶玉)처럼 보배로이 여기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서첩을 펼쳐 어루만지면서 한 번 완상할 적마다 한 차례 눈물을 흘리고는 이상과 같이 써서 주었다.
1640년(인조 18) 계추(季秋) 어느 날에 서간노인(西磵老人) 김상헌(金尙憲)은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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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 김상용의 전서’ |